토는 흙인데 흙의 속성은 만물을 심을 수 있고 저장합니다. 여러분은 흙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저는 ‘내가 딛고 서있는 토대’가 먼저 생각납니다. 서있는 흙(땅)이 튼튼해야 자신감이 생깁니다. 흙은 무엇이든 자신의 몸 속으로 품어 기릅니다. 여기에는 사사로이 가리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흙은 중후하고 배신하지 않습니다. 흙의 ‘만물을 맡아 심고 거두는’ 특징은 믿음 즉 신(信)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흙의 특징을 많이 품고 있는 사람은 대체로 후덕하고 화합하며 신실합니다.

토를 상징하는 고전은 서경(書經) 입니다. 오행대의는 ‘서경은 가장 오래된 옛날의 글로, 제왕들의 말을 기록하고 믿음으로 맹서하는 일을 다 기록했으니, 높이고 숭상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상고(上古) 시대 제왕의 언행을 담은 기록, 말하자면 모든 사상의 원류를 담은 책이라 할까요. 그래서 옛 선인들은 서경을 읽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위대한 제왕들의 언행과 합치하는지 견주어 판단했습니다. 사상의 원류 혹은 학문의 근간이라는 측면에서 오늘날로 치면 철학, 역사학 등 인문학 서적 및 인문학 글쓰기가 이에 속합니다. 이런 인문학 서적은 토(土) 기운이 많다고 할 수 있겠지요.

흙은 계하 (늦여름)를 상징하기도 하는데요. 여름과 가을 사이의 한복판에서 만물이 비로소 성숙하고 여무는 모습이 만물을 맡아 기르는 흙의 형상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은 글자에서 보듯 사람 그 자체가 연구대상입니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비롯해 삶의 문제를 전반적으로 다룹니다. 학문을 하는 자도 인간이요, 인간이 없으면 애초에 학문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내가 딛고 서있는 토대가 없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듯이 말이지요. 따라서 인문학 혹은 철학 없는 학문은 없습니다. 인문학으로 내가 밟고 있는 흙(땅)을 고르고 다져야 스스로 설 수 있습니다. 자립할 수 있으면 자기에 대한 믿음은 높아지고 우리는 이 순간을 자신감 있다고 표현합니다. 바로 흙의 속성인 신(信) 입니다.

토는 생각을 주관하며 역사·철학 등 인문학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타락한 문학·예술을 들여다보면 거기에 인간과 자연에 대한 성찰은 쏙 빠져있습니다. 저급한 돈벌이, 즉 세태에 영합하여 잘 팔리는 흥미 위주의 야담들이 득세합니다. 뭐가 잘 팔리겠습니까? 인간의 흥분적 촉감을 만족시켜주는 폭력·포르노 등입니다. 지혜가 교만으로 타락하면 아주 대놓고 폭력을 조장하고 성을 상품화합니다. 이것을 파는 업자들은 고객의 니즈를 충족해주는 전략의 승리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응축하고 저장하는 수 기운이 썩으면 그 징후를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히키코모리족, 즉 은둔형 외톨이들이 많아집니다. 이들은 자기 방에서 홀로 컴퓨터 모니터만을 들여다보며, 타락한 수 기운이 양산한 음란물과 폭력을 즐깁니다. 세상과 소통하기를 단절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활력이 없음은 물론이고 사람들과 인간관계도 서투릅니다. 바깥 세상으로 나가기는 겁나지만, 자기만의 온라인 세상에서는 활개치고 다닙니다. 이른바 키보드 워리어, 악플러 들이지요. 고여있는 물이 썩듯이 단단히 응축된 수 기운이 설기(泄氣), 즉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수생목(水生木)이 안 되는 형국이지요.

목은 발산하는 기운이라고 했지요? 집안에 틀어박혀 방구석을 쓰레기통으로 만들고 그곳에서 버둥거리니 발산이 될 리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정신이 우울해지고, 조금만 일에도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는 등 전형적인 수 기운의 질병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런 꽉 막힌 수의 응축됨을 풀어주는 것이 토 기운입니다. 이른바 문·사·철(文·史·哲)로 불리는 인문학입니다. 인문학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모든 학문의 근원입니다. 문학·종교·사회과학·기술공학 등 모두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학문이지요. 인문학적 뿌리가 함몰되었을 때 각 분야가 외골수로 치닫습니다. 이런 경우를 철학 부재 혹은 인간성 상실, 인간 소외 같은 말로 표현할 수 있겠군요.

토 기운은 균형 에너지입니다. 한편으로 기울임 없이 중도(中道)를 취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중(中)은 기계적으로 산출한 평균값이기보다, 절묘한 통합의 에너지라 보면 좋겠습니다. 전후좌우를 모두 품어 안을 수 있는 개념입니다. 토 기운은 생각을 담당하는데, 이것이 적절히 발휘되면 신(信)으로 이행합니다. 각기 다른 개성의 주체들이 서로 믿을 수 있고 의지하며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모습입니다. 반면 생각이 많아지면 의혹이 생깁니다. 그래서 생각이 타락한 형태가 의심하여 서로 다투는 것입니다. 목은 금이 자신을 극할 것을 의심하고, 금은 화를 경계하고, 화는 수를 미워하는 것이지요. 모두가 오행이라는 순환기제에서 함께 살아야 하는 동거동락(同居同樂)의 관계임을 망각하고 마냥 치고 받습니다. 자멸이지요.

토는 토극수(土克水)로 수를 직접적으로 제어하지만, 사실 모든 오행 사이에 존재합니다. 계절로 치면 환절기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목에서 화로 넘어갈 때, 금에서 수로 넘어갈 때 토 기운은 모두 작동합니다. 계절이 바뀌는 것이기에 연착륙할 수 있게끔 완충작용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환절기에 특히 건강관리에 유의하라지 않습니까? 천지의 기운이 변하기 때문에 인체 또한 그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것입니다.

토가 기운을 차리면 신뢰가 싹틉니다. 신뢰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인심이 타락하고 거짓이 횡행해도 이것만 붙들고 있으면 안심입니다. 극한 상황에 처하면 인간은 대개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게 변모합니다. 그래서 위기의 상황에서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럴 때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하는 이는 믿음직스럽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의지하고 따를 수 있습니다. 인간사랑이 없고 물신(物神)을 섬기는 사이비 종교, 사회적 공동선을 상실하고 강자의 논리에 영합한 사회과학, 자연의 생명원리를 무시하는 첨단공학, 잔인함과 성 도착을 부추기는 문화예술. 모두가 인간과 자연의 존엄성을 상실하고 목화금수 각 기운이 미쳐 날뛰는 현상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전부 안고 있는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 이 시대는 토기허(土氣虛)의 시대였단 말인가요?

인문학은 죽었다라는 말도 나오는데, 더욱 우려되는 것은 인문학을 살리는 방안으로 강구되는 것이 인문학을 돈벌이 수단으로 전용하려는 움직임입니다. 돈벌이 자체야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마는, 토 기운이 목화금수 각 기운 사이로 충분히 스며들어 완충작용을 하려면 한참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토의 균형을 취하는 에너지가 채 무게중심을 잡기도 전에 흔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인문학적 기운이 일상생활 곳곳에 젖어 든다면, 신뢰의 문화가 싹트리라 여깁니다. 믿음 자체의 특징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데 있습니다. 결코 속성으로 믿음은 생기지 않습니다. 빨리 좋은 결과를 보려고 인문학을 도입했다가 이내 용도 폐기하는 일은 인문학을 바라보는 세태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믿지 못하는 것이지요. 인문학이 과연 삶에서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회의하는 시선이 바로 토 기운이 타락하여 의심이 되는 현상입니다.

인문학은 믿음이란 것이 그렇듯이, 진득하게 추구해나가는 공부입니다. 뭘 바라고 믿어주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 아니듯, 특정 목표를 위해 인문학을 추구하는 것 또한 거짓입니다. 그저 인문학 그 자체를 위해 인문학을 한다고 할까요. 솔직히 이 부분은 저도 실천이 안되기에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왕년의 성현들을 보면 모두 사리사욕에 얽매여 학문을 추구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 제가 어찌 그들의 심중을 감히 헤아리겠습니까! 토 기운이 건강히 균형감각을 유지한다면, 목화금수는 인간과 우주자연을 섬기며 그 법도를 다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재는 화 기운이 극에 달한 시점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화 기운을 설기하는 토가 자연스럽게 등장하리라 봅니다. 그러나 모처럼 도래한 토 기운을 잘 보살피려면 굳건한 믿음으로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돈벌이도 안돼, 미래의 비전이 불명확해 같은 갖은 이유로 인문학을 저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면 또다시 의혹과 의심이 난무하는 토가 부재한 오행의 세계로 떨어지는 것이지요. 자신감을 가져야겠습니다!

토를 만병통치약처럼 예찬했지만, 과도하면 역시 문제가 발생합니다. 생각이 타락해 의심이 되는 것인데요. 좌고우면, 즉 여기저기 살피는 것이 심해져서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모습입니다. 머릿속에서 몇 수 앞까지 내다보고는 있으나, 여러 경우를 동시에 상정하기에 실행력이 약합니다. 질질 끌다가 결정할 타이밍을 놓치거나, 최악의 결정을 하기 쉽습니다. 생각이 많으면 흔히들 이렇게 됩니다. 생각 자체를 깊이 있게 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만큼 신중할 수 있어 실수를 안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너무 신중한 나머지 이도 저도 못하고 생각에만 빠져있으면 한심한 노릇입니다.

토의 균형을 취하는 에너지가 균형만 맞추느라 다음 단계인 금 기운으로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즉 토생금(土生金)이 안됩니다. 이른바 나약한 백면서생(白面書生)이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생각만 많고 실천이 없는 인문학이라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인문학 자체가 인간과 우주자연의 존엄성을 일상에서 연구하고 실현하는 학문입니다. 따라서 공리공론(空理空論)만 일삼고 실천적 행동이 결여되면 이는 이념 논쟁이나 소모적인 파당 싸움밖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에 나오는 이완 대장처럼 허울뿐인 북벌론(北伐論)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허생은 이를 철저히 논박하지요.

과도해진 토 기운을 조절해주는 것이 목(木)입니다. 목은 발산하는 에너지입니다. 망설이고 의혹에 가득한 토를 자극해 결단할 수 있게 합니다. 목 기운은 종교·자연과학이며 인(仁)을 주관합니다. 종교는 믿음에 바탕 합니다. 맹목적 믿음은 물론 문제가 되지만, 믿음 자체는 행동을 강하게 유발하는 요인입니다. 의혹이 세상에 만연하면 사람들은 외로워지고 경계심이 많아집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며 얻은 사색이 신(信)으로 오르지 못하고 의심으로 떨어지지요. 어느 곳에도 의지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반대급부로 굳건히 믿고 싶은 대상을 갈망합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꼭 특정 종교를 말할 수는 없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도 여기에 포함할 수 있습니다. 자신감만큼 의혹을 떨쳐버리는데 좋은 수단이 없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바로 목극토(木克土)의 원리입니다. 자신 있으면 미혹되지 아니하고, 인문학적 사색과 성찰은 더욱 빛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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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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