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 떠는 편관


명예를 추구하는 성향은 일상생활에서도 잘 드러난다. 나는 사람들과 특정한 주제가 없는 대화, 즉 ‘수다’ 에 매우 취약하다. 수다는 일정한 맥락이 없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오가는 소통 방식이다. 따라서 토론마냥 정밀한 논리를 세워 말할 필요가 없다. 그냥 편안하게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내 얘기를 하면 된다. 그러나 나는 수다를 거의 심야토론처럼 받아들인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명예욕, 즉 인정욕망 때문이다. 수다를 떨어도 상대방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고 한다. 명예에 티끌만한 손상이라도 입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 때문에, 긴장이 체질화 되어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에게 먼저 마음을 툭 터놓기 어렵다. 사람들과 딱 마주앉으면 어색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이 말을 하면 얘가 어떻게 나를 여길는지..’ 머릿속이 복잡하다.


그래서 식사시간과 회식자리 같은 사적인 만남에서 나는 침묵한다. 반면 에세이 발표 때나 토론 시간에는 말이 많아진다. 토론에서는 빈틈이 드러날 여지가 적다. 한마디로 내가 ‘잘 아는 것’ 만 이야기하고 모르는 것은 그저 들으면 되는 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밥상머리처럼 이런저런 수다가 오가는 자리에선 어디서 말을 치고 들어가야 할지 알 수 없다. 화제가 확확 변하기 때문에, 속으로 가만히 ‘아, 이 상황에선 이런 논리로 말해야 겠구나’ 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중, 어느새 다른 주제로 넘어간다. 그래서 밥 먹는 내내 생각만 하다, 말 한마디 못 하고 만다. 이렇게 봤을 때 편관의 명예욕은 극도의 경쟁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수다 떠는 것 마저 반드시 승리해야 명예롭다고 생각하니 모두가 쓰러뜨려야 할 적(敵)으로 느껴진다. 그런 감각으로 일상을 살아간다고 했을 때, 시퍼런 칼을 내놓고 거리를 활보하니 만인과 싸움이 붙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수다 떨 때 우리가 승패를 가르려고 기를 쓰나? 그렇지 않다. 사실 빈틈을 감추고 호전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만큼 겁쟁이기 때문이다.


경쟁심 강한 편관도 가끔은 쉬고 싶다. 스스로 옭아매고 있는 긴장감을 풀어버리기 위해 선택하는 방법이 있다. 바로 술이다. 나는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과의 회식 자리에서는 일단 소주 3잔을 원 샷하고 시작한다. 그제야 슬슬 과감해지고 비교적 편안하게 빈틈을 보일 수 있다. 말이 빨라지고 무척 더듬으며, 쉽게 흥분하고 한마디로 다혈질이다. 이때 역시나 편관의 독선적 기질이 드러나 상대를 혹독히 비판하고 논쟁을 건다. 서로 맘이 잘 맞으면 급속도로 가까워지나 그렇지 않으면 싸움이 난다. 극과 극의 현상! 내게 필요한 것은 술 없이 맨 정신으로 사람들에게 빈틈을 보일 수 있는 용기다. 그런다고 편관이 추구하는 명예가 결코 손상되지 않는다. 진정한 명예란 강한 ‘척’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다. 약점도 있는 그대로 껴안고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수다를 떨자!


나의 개운법 Ⅰ‘태몽에 길이 있다’


어머니의 태몽은 ‘사나운 코뿔소’ 와 ‘얌전한 호랑이’ 였다고 한다. 코뿔소가 사납게 달려들어 진땀 뺀 반면, 호랑이는 애완견마냥 옆에 데리고 다녀도 무섭지 않았다고 하셨다. 예전엔 이 태몽 이야기를 들으며 그저 ‘아, 그래서 내가 성격이 불같구나’ 하고 이해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왜 둘 다 맹수인데, 하나는 사납고 하나는 온순할까 궁금했으나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이제야 편관의 속성과 나 자신을 함께 되짚어보니 비로소 해몽이 되는 것 같다. 사나운 코뿔소는 길들여지지 않아 제멋대로 날뛰는 고집불통 상태의 편관이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편관은 골칫덩이다. 기분 내키는 대로 성질내고 싸움을 건다. 그 끝은 소통 부재의 고립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외로웠다. ‘왜 세상 사람들은 나를 이해 못 해주는 거야!’ 라고 투정부리며. 입맛이 쓰다.


이에 반해 얌전한 호랑이는 훈련이 되어 다룰 수 있는 상태의 편관이다. 칼은 칼집이 필요하듯 편관의 속성인 명예욕, 투쟁심, 용맹함이 독선에 빠지지 않고 적절히 발현된다. 편관을 지혜롭게 쓰면 아집에서 벗어나 사물과 사람을 보다 폭넓게 바라볼 수 있다. 아버지는 나에게 항상 당부하셨다. ‘마음을 너그럽게 먹어라.’ 아버지는 알고 계셨던 것이다. 나의 용신(用神), 즉 팔자 고치는 방법을 말이다.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 위협을 가하는 것은 미숙한 호랑이의 품성에 불과하다. 존재 자체로 자연스럽게 호랑이의 위엄이 드러나는 것,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관성(官星)을 쓰는 방법이다. 호랑이를 다룰 수 있는 기백이 있으니 그 무엇을 겁내랴? 꺼둘리던 분노와 집착, 경쟁심이 모두 내적 성찰로 전환되니 이것이 관성을 인성(印星), 즉 공부로 만드는 것이다.


어머니의 태몽은 관성이 갈 수 있는 두 갈래 길을 암시한다. 극을 당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왜 나만? 왜 나에게 이런 불행이?’ 라고 되묻기만 한다면 어떤 고통에서도 배울 수 있는 건 없다. 오히려 세상과 사람을 향한 증오심만 키우거나 극단적인 자기비하에 빠진다. 이것이 사나운 코뿔소의 길이다. 사실 인간은 고통 속에서 삶의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고통은 나쁜 것이 아니라,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매 순간 다가오는 고통과 갈등을 내 공부로 삼는다면 그는 진정 너그러운 사람이다. 이것이 길들인 호랑이의 길이다. 참으로 어머니의 태몽에 관성의 비밀이 있었다.


나의 개운법 Ⅱ‘스승과 친구 만들기’


20대는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칼 한 자루 들고 다니며 내가 세상에서 최고라 여겼다. 하지만 뭣도 없는 미미한 존재였을 뿐이다. 알량한 자존심을 대의명분으로 포장하고, 성질머리는 있어 입만 살았지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다. 나는 배우고 싶다. 과시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싶다. 그게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두 가지 소중한 인연을 항상 걷어차며 살았다. 그것은 바로 스승과 친구다. 윗사람에게 대들고 내 의견을 관철하는 것이 한때는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기서 배울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내 편협한 생각에만 머물러 있을 뿐,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남은 건 똘똘 뭉친 고집과 ‘내가 그래도 맞아!’ 라는 의식이었다. 또한 친구가 없다. 내 빈틈을 드러내지 않고 상처 받지 않을 만큼만 그들에게 다가갔다. 내가 필요할 때만 친구를 찾고 갈등이 생길 때는 거리를 두는 것, 이 얼마나 편하게 관계 맺는 방식인가? 사람들끼리 살다 보면 즐거울 때도, 다툴 때도 있는 것이 당연지사다. 저 좋은 것만 날름 빼먹으려고 하니 친구를 만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나의 대운(大運)이 내년에 새롭게 바뀐다. 대운이란 10년마다 변하는 천지자연의 기운으로, 개개인의 사주원국이 자동차라면 대운은 길이다. 자동차가 시원하게 달리려면 뻥 뚫린 고속도로가 제격이다. 나라는 자동차가 달리는데 필요한 것은 스승과 친구이다. 다가오는 30대 10년간 열리는 길은 계유(癸酉) 대운이다. 계유 대운은 명리학상으로 인성과 비겁의 기운이다. 인성으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고, 비겁으로 친구와 사귈 기회가 생긴다. 이는 ‘밥 살 수 있는’ 찬스의 획득이다. 밥은 친구를 부르고, 이야기를 꽃피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인생을 배운다. 따라서 주변 친구들 데려다 밥 먹이며 맘껏 수다 떨면 그것이 바로 인생 역전의 방법인 것이다.


스승과 친구가 눈앞에 있어도 자신이 바뀌어야 진정으로 그들을 만날 수 있다. 여전히 편관 과다의 습(習)을 고수한다면, 스승을 만나도 똑 같은 방식으로 싸우고, 필요할 때만 친구를 찾을 것이다. 편관의 솔직한 품성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자신에게 성실하며 타인에게 너그러울 때 대운은 비로소 선물로 다가오리라. 칼집이 없는 칼은 언젠가 반드시 주인을 벤다. 불쑥불쑥 피를 맛보고 싶어 하는 칼을 잘 간수해야 한다. 아무 때나 칼을 뽑아 휘두르면 회칼 들고 설치는 폭력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검객은 오늘도 어떻게 하면 칼을 뽑지 않을까 고민한다. 그것이 앞으로 내가 할 공부고 수련이다._(끝)


2011/01/12 - [의역학(醫易學)] - [사주팔자 글쓰기] 어깨에 힘 빼면 동무가 생긴다 <中>
2011/01/05 - [의역학(醫易學)] - [사주팔자 글쓰기] 어깨에 힘 빼면 동무가 생긴다 <上>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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