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3:정월대보름의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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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조설근 (나남,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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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옥의 자연론

앞의 논의에서 보옥의 주변인물 분석을 마쳤다. 보옥은 욕망의 노예가 되는 인간에게 무관심하거나 혐오감을 표출하는 반면 자신의 개성을 십분 발현하는 사람을 선호함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간접적인 유추이기에, 이번 장에서는 직접적으로 보옥의 입을 통해 자기다움의 욕망, 자기가 자기답고 싶은 욕망이 무엇인지 분석하겠다.

 

보옥은 부드러운 성품으로 유약해 보이나, 실은 좋고 싫음이 명확한 인물이다. 그것이 확 드러나는 장면이 대관원 낙성 후, 가정의 명으로 편액에 넣을 대련을 지을 때다. 보옥에게 아버지는 그야말로 두려움의 대상이다. 대옥이에게 온 관심을 쏟다가도, 아버지 소리만 들리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몸이 얼어 붙어 대옥이고 뭐고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그렇게 아버지 앞이라면 경기를 내듯 꼼짝 못하는 보옥이가 유일하게 겁 없이 맞서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 가정이 도향촌에 이르러 소박한 초당의 모습을 보고 감탄하자, 보옥이가 여기에 딴지(!)를 건다.

 

도련님은 다른 건 다 아시면서 어찌하여 자연스럽다는 말도 모르십니까? 자연스럽다는 것은 그냥 천연 그대로 있는 것으로, 사람의 인력으로 이루지 않은 것을 말하는 거지요.

 바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곳의 장원은 분명히 사람의 힘으로 가꾸어 만들어 놓은 것이지요. 멀리에 이웃마을이 있는 것도 아니요, 가까이에 성곽이 둘러치고 있지도 않습니다. 산을 배경으로 하나 산맥이 없고 물을 앞에 두었으나 수원이 없습니다. (중략) 앞서 본 곳은 자연의 이치와 기운을 갖추고 있어 비록 대나무를 심고 샘물을 끌어들였지만 인공적으로 꾸민 듯하지는 않았습니다. 옛사람이 자연스러운 그림이라고 한 말은 바로 그럴 말한 땅이 아닌 곳에 억지로 만들거나 그럴 만한 곳이 아닌 곳을 억지로 꾸민 것을 가장 경계한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비록 백방으로 정밀하게 꾸민다고 해도 끝내는 어울리지 않게 되기 때문이지요. (1 369~370)

 

요컨대 인공적으로 치장한 풍경보다, 자연미 그대로 살린 경치가 더 훌륭하다는 얘기다. 이 부분은 보옥의 욕망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한편 보옥은 향릉이 시에 미치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며 그야말로 땅이 영험 하면 사람이 영걸하다더니 하늘이 사람을 낼 때 제각기 독특한 성정을 부여한 것이야. 우리는 향릉을 볼 때마다 그저 평범하다고 늘 안타까워했는데 오늘 저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시인으로 변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과연 천지만물은 다 공평한 거야. (3 201) 향릉은 홍루몽에 등장하는 인물 중 무척 흥미로운 존재다. 설반의 첩으로 있는 둥 마는 둥 드러나지 않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존재감을 뽐낸다. 그 방식은 욕망의 노예가 되는 자들과 달리, 자기다움 즉 향릉에게 숨어 있는 시를 쓰고 싶은 욕망으로 드러난다. 그녀는 밤을 새서 시를 읽고 몸을 혹사하지만, 밤새 주색에 빠져 있는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차이는 관계성이다. 자기다움을 촉진하는 욕망은 주변 환경과 소통하고, 욕망의 노예에 사로잡힌 자들은 스스로 한 가지 욕망에 고립된다. 향릉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할 테니 이만 하겠다. 어쨌든 보옥이 향릉에게 감탄하며 말한 독특한 성정이라 함은 만물에 성정이 저마다 있다는 이야기다. 백 개의 개성, 천 개의 개성인 것이다. 그것은 사람과 동식물, 심지어 무생물을 포함하며, 성정이 있는 만물은 개체를 뛰어넘어 서로 소통이 가능하다.

 

만물에는 성정이 있다

초목뿐만 아니라 천하의 모든 사물은 모두 정리情理가 있는 거야. 사람과 마찬가지로 지기知己를 얻으면 아주 영험해져. (중략) 제갈량의 사당에는 측백나무가 영험하고 악비의 무덤에는 소나무가 영험하니 모두 당당하게 사람의 정기를 받아 타고난 초목들로서 영원토록 변함없어. (4 475)

 

보옥을 가리켜 할멈들이 수군거린다. 정말로 바보 같은 데가 있는 건 확실한 모양이야. 물에 빠진 암탉처럼 자신이 소낙비에 흠뻑 젖어서는 정작 남한테 비 쏟아지는데 어서 피하라고 하지 했다지 않아 글쎄. 정말 웃기지? 곁에 사람만 없으면 혼자 울었다 웃었다 한대. 또 제비를 만나면 제비하고 말하고 물고기를 만나면 물고기하고 말하며 별이다 달을 보면 하릴없이 그저 깊은 한숨을 쉬거나 알 수 없는 말을 뭐라고 주절댄다고 하더라니까. (2 358) 비웃으려는 의도였으나, 여기에 보옥의 진면목이 숨어 있다. 본 에세이는 보옥의 욕망을 우리가 지금 지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낯선 감각이라는 문제 설정에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동물과 대화한다는 것을 말도 안 된다고 치부하거나 혹은 엉뚱하게 초능력 따위로 봐서는 곤란하다. 나는 오히려 보옥이 사람과 사물의 뭇 있는 그대로의 개성을 투명하게 꿰뚫어 보는, 아니 본능적으로 느끼는 열린 감수성의 인간이라고 보고 싶다. 만물의 본성을 느끼는 것은 어떤 감각일까? 청문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제문 부용여아뢰의 한 대목을 보자.

 

옛날 엽법선은 혼을 불러 비문을 쓰고, 이장길은 하늘에 불려가 문장을 지었다고 하오니 일은 서로 다르나 이치는 한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사물에 맞추어 재주를 배치하는 것이니 그 사람이 적임자가 아니라면 어찌 함부로 그렇게 하겠습니까. 상제께서 골라 위탁하심이 가히 흡족하고 지극히 적절하여 그대의 소질을 저버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나이다. (4 521)

 

청문이 억울하게 죽고 보옥은 슬퍼한다. 그런데 그녀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묘하다. 어린 시녀가 거짓으로 청문이 죽어서 부용꽃을 관장하는 화신花神이 되었다는 말에 보옥은 이상히 여기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슬픔이 걷히고 기쁜 기색이 돈다. 이는 세상을 구성하는 그 어떤 사물도 쓰임새가 다 있다는 이야기이다. 사물이 자기가 있을 자리만 제대로 찾을 수 있다면, 그 사물은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다. 그렇게 자신의 성정을 다 쓰고 간다면 죽어도 후회가 없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살다 죽으면 최상의 행복이라 말할 수 있다. 원앙이 가모의 뒤를 따라 자살하자, 보옥은 참으로 천지간의 영기란 모두 이런 여자들한테만 서려 있나 보구나. 원앙인 과연 죽을 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한다. 원앙이 목숨을 끊은 이유는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다. 이를 두고 봉건적 발상이니, 자살의 정당성을 논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원앙의 죽음을 바라보는 보옥의 시선은, 원앙이 자기다운 죽음을 했음에 초점이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가 바라보는 최선의 죽음은 자기답게 죽는 것이다. 그래서 보옥은 다른 형태의 죽음에 대해 가혹한 비판을 가한다.

 

이 세상에 어디 죽지 않는 사람이 있겠어. 다만 죽을 때 곱게 죽기를 바랄 뿐이지. 수염 난 사내들 생각이란 것이 문신은 직간하다가 죽고 무신은 전장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지. 이 두 가지 죽음만이 사내대장부로서 명예와 절장을 위해 죽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런 일이라면 안 죽는 게 훨씬 낫지. (2 377)

 

한마디로 쓸데없는 공명심으로 죽는 것은 개죽음이라 일축한다. 소설 속에서 보옥은 자신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자주 언급한다. 삶의 완성은 죽음이기에, 보옥이 보기에 곱게 죽는 것은 삶을 잘 살아야 가능하다. 삶을 개판치고 욕망의 노예로 살아간다면 그 죽음 역시 허망할 따름이다. 그러나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삶을 자기의 성정을 십분 발휘해 자신을 다 쓰고 간다면 정말 눈감는 그 순간, 한 치의 후회도 없을 것 같다.
 

보옥의 자연론은 팔고문 혐오에서도 드러난다. 팔고문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필요한 요즘으로 치면 논술시험처럼 틀에 짜인 글쓰기다. 보옥은 이런 글을 가리켜 사람들이 쓸데없는 이름과 녹봉을 타내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천편일률적인 점수 따기 식의 글인데, 거기에는 어떤 상상력과 창의성 따위가 발휘될 수 없다. 보옥이 더욱 못 봐주는 글쓰기는 뱃속에 든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남의 글들을 이리저리 주워 모아 도깨비 같은 문장을 지으면서도 학문이 심오하다고 뻐기는 작자들이다. 일종의 짜깁기, 표절이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정보를 긁어다 보란 듯이 자기 글인 양 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이런 글쓰기는 개개인의 자연스런 마음을 드러내기는커녕 박제된 글만 양산한다. 보옥은 자기의 색깔이 선명한 글을 선호했던 것 같다. 남의 말이 아닌 자신의 뱃속에서 우러나온 글 말이다. 시험점수를 따거나 돈 벌기 위해 찍어낸 글줄은 결국 그러한 욕망의 배치 하에서 나왔기 때문에, 자유로운 욕망의 발현과는 거리가 멀다. 글이 곧 사람이라는 말처럼 그런 글만 써대면 자신을 소외시키는 일에 다름 아니리라.
 

이상으로 보옥의 자연론을 분석해보았다. 결론적으로 자기답게 살아라!라는 게 핵심이다. 어떻게 자기답게 살 것인가?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물욕, 색욕, 권력욕의 노예가 되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고 모두가 산이나 절간에 들어가 모든 욕망을 끊고 수련할 필요는 없다. 맹목적인 수행은 신선이 되려다 수은 중독으로 죽은 가경, 수행자로써의 자부심이 강했던 묘옥, 그녀를 보고 배운 석춘이 될 수 있다. 그들은 세상과 절연하고 홀로 고고하게 사는데 그것이 과연 진정한 수행일까? 막연히 속세로부터의 탈출이 자유라면 난센스다. 오히려 그들은 욕망을 끊으려 했으나, 하는 척만 했을 뿐이다. 그 속에는 신선이 되고픈 욕망과 명예욕, 홀로 깨끗하겠다는 결벽증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주제에서 한번 다뤄보고 싶다.
 

욕망을 다스린다는 것은 자신을 알아야 가능하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강렬한 욕망이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고 있으면, 적어도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은 면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소극적인 자기에 대한 앎이라면, 적극적인 형태로 자기 욕망의 길을 스스로 뚫는 방법이 있으리라. 그 길을 두 여인의 엇갈린 삶의 행보로 살펴보겠다.

 

새로운 욕망의 실천_결언

둘 다 개망나니로 일등인 설반의 여인들이다. 향릉은 본래 양반 집안의 무남독녀였는데, 어릴 적 유괴되어 각지를 전전하다 설반에게 첩으로 팔려온 비운의 여인이다. 반면 금계는 설반의 정실부인으로 계화밭으로 부자가 된 하씨네 집안의 외동딸이다. 남편이야 워낙 말할 것도 없는 종자라 별로 기대할 게 없으나, 재미있는 건 설반이 집을 비웠을 때 보이는 두 여자의 대조되는 행동이다.
 

설반은 유상련에게 죽도록 맞고 사람들 눈이 창피해, 잠시 행상을 이끌고 집을 떠난다. 이때 향릉은 독수공방, 외로워 하기는커녕 마치 이때를 만났다는 듯이 설반의 누이인 보차를 졸라 대관원에서 함께 살게 된다. 그리고서 하는 일이란 대옥에게 찾아가 다짜고짜 시를 가르쳐 달라고 한다. 시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넘치는 지, 대옥이 시를 배우려면 우선 이백과 두보의 시 백 편은 외워야 한다는 말에 며칠 안되어 싹 암기해버린다. 와우! 시에 몰입한 그녀는 자나깨나 오직 어떻게 시를 지을 것인가에 육신과 영혼의 무게를 싣는다. 곧 시가 향릉이요, 향릉이 시인 경지! 넋을 잃고 시상에 잠겨있는 그녀의 얘기가 대관원 자매들에게 순식간에 퍼진 것은 당연지사. 해당시사의 멤버들은 즉시 그녀를 회원에 캐스팅(!)하고 향릉은 주요 시 멤버로 활약하게 된다.

금계의 경우는 더욱 기막히다. 금계와 혼인한지 얼마 안되어 설반은 실수로 사람을 술병으로 쳐 죽여 관아에 잡혀간다. 생명이 경각에 달려, 설씨 집안에선 다방면으로 청탁을 넣고 난리를 치른다. 하지만 일이 일인지라 설반은 옥살이를 치르고, 금계는 독수공방 신세가 된다. 금계는 울며불며 집안을 소란스럽게 하다 욕망의 방향이 색욕으로 향한다. 설반의 사촌동생인 설과를 어떻게 꼬셔보려고 온갖 수를 쓴다. 교태를 부리고 계략을 써서 설과를 자기 품에 안으려고 하나 실패로 돌아가자, 나중에는 자기 수양동생을 데려와 은밀한 관계를 갖는다.
 

요컨대 지아비가 사라지자 두 여자가 보여준 행태는 극과 극이다. 향릉에게 설반은 자기다움을 막고 있던 방해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사라지자 때를 만난 것처럼 무서운 집중력으로 자신을 풍요롭게 한다. 게다가 해당시사의 멤버들을 친구로 얻는다. 이렇게 봤을 때, 내가 욕망의 노예인지 아닌지 확인해보는 방법은 자신을 둘러싼 주변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새로운 관계의 생성이 욕망을 바라보는 시금석인 셈이다. 금계는 여전히 색정에 사로잡혀 있기에, 설반이 잡혀가도 그 욕망은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여기에 다른 욕망은 끼어들 틈새가 없다. 그렇기에 시동생을 꼬시는 등 막장 짓을 하다, 결국 자기가 탄 독약을 자기가 마시고 절명한다. 욕망에 허덕이다 그 욕망을 떠나 보내면 새로운 욕망이 언제나 빈자리를 채운다. 그 공백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향릉인가 하금계인가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어야겠다. 보옥과 자매들의 해당시사 장면은 자기다움의 한바탕 향연이라 할 만큼 매력적이다. 사실 보옥이 공부하기를 게을리한다고 하나 그렇지도 한다. 보옥과 자매들의 일상 대화를 들어보면 그 내용이 시문학, 회화, 불교, 노장사상 등을 아우르는 높은 수준의 잡답(!)이다. 이 부분을 다루지 못해 아쉬우나, 후일로 남겨두겠다. 향릉이 시에 미친 것을 내내 상상하며 에세이를 썼다. 이 글이 노예적 욕망이기보다, 스스로에게 정직한 글이었으면 좋겠다._()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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