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 2: 흩날리는 꽃잎을 묻고

저자
조설근 지음
출판사
나남 | 2009-07-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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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고미숙 반장님이 지적한 '냄새'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보옥이가 대옥이에게 끌리는 이유는 다름아닌 그녀에게서 배어나오는 '체취' 때문이라는 설..
과연 보옥 도련님은 후각에 민감한가?

#1 상운이 얼굴을 씻고 난 물을 취루가 밖에 쏟아버리려고 했더니 보옥이 달려들었다. ... 여기 대야 속에 잔뜩 풀려 있구먼그래. 따로 비누칠이 필요 없겠어. ... 화장품이 눈에 들어오자 곧 손을 뻗어 자신도 모르게 연지를 집어 들어 입으로 가져가려고 하였다. <홍루몽 21회 中>

#2 보옥은 얼른 일어나 다가가 얼굴을 그녀의 목덜미에 가까이 들이대고 킁킁거리며 몸에서 나는 향기와 체취를 맡았다. 그러고는 새끼 원숭이처럼 엉겨 붙어 매달리며 통사정했다. 누나! 제발 누나 입술에 바른 연지를 조금이라도 빨아먹을 수 있게 해줘, ? 보옥은 말과 동시에 온몸을 꽈배기처럼 비비꼬면서 원앙의 몸에 달라 붙었다. <홍루몽 24회 中>

남이 씻은 세숫물에 세수하기, 입술연지 빨아먹기, 달려들어 체취 맡기 등등. 모두 냄새와 관련있다. 분명히 유별난 구석이 있다. '자신도 모르게' 혹은 '온몸을 꽈배기처럼 비비꼬면서'와 같은 묘사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이끌림을 나타낸다. 우리는 그런 끌림을 본능이라고 부른다.

보옥이가 비눗물 풀려 있던 세숫물에 코박고 세수하는 일은 일종의 메시지 판독이다. 개들이 산책 나와서, 나무 혹은 전봇대에 묻은 다른 개들의 분비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것과 비슷하다. '오~ 그래 이 세숫물은 우리 상운이의 것이로구만! 음, 오늘 향기를 맡아보니 상운이 기분이 좋구만~ 몸 상태도 개운하고..' 대략 이런 식으로 상대방의 정보를 습득한다고 할까. 음.. 저렇게 써놓고 보니 다소 변태스러운 듯.. ;;

애니웨이.
상운이의 체취가 담겨있는 세숫물은 상운이의 그날 기분, 심리, 건강상태 등의 정보가 담겨있는 IC카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복잡한 언어체계를 즉물적으로 이해하는 이는 드물다. 보옥이는 그 언어를 본능적으로 이해한다. 타고난 것이다. 역시 난 놈이야.

아니, 냄새 따위가 뭐길래 저런 기능을 해? 말도 안돼! 라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갓 태어난 아기는 인간이고 동물이고 할거없이 냄새로 세상을 지각한다. 아기는 태어난 이후 본능적으로 엄마의 젖꼭지를 찾는데, 이때 어미 젖을 닦아놓으면 체취가 사라져 찾지 못한다. 엄마의 체취를 언제 맡았단 말인가? 바로 태중에 있을 때 자신을 감싼 '양수'의 냄새로 알아챈다고 한다. 양수의 냄새가 '엄마의 기억'을 환기시키고 자연스레 엄마를 엄마로 알아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만약 태어난 아기가 후각상실증에 걸렸다면 그건 생존의 위기와 다름없다. 냄새를 맡지 못하면 엄마젖을 먹을 수 없고, 이는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냄새는 그저 향기롭거나 고약한 것으로 양분되지 않는, 근본적인 삶의 기억을 불러 일으키는 감각이라 할 수 있다.

고미숙 반장님은 보옥이가 대옥이를 각별히 여기는 이유는, 바로 그녀의 체취에 있다고 말했다. 뭔가 보옥이를 끌리게 하는 향기가 있다는 말인데.. 이는 앞서 언급한 냄새가 지닌 특성과 관련이 있다. 하고많은 여인들 중에 왜 오직 대옥이의 향기만 끌리단 말인가? 또 반드시 대옥이의 체취만 킁킁대며 탐하지도 않는다. 상운이의 체취가 담긴 세숫물, 원앙 누나에게 꽈배기처럼 달겨들어 향기를 맡는 등.. 여기저기 들이대지(?) 않는 데가 없다. 뭐.. 그게 보옥이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그런데 어째서 유독 보옥이에게 대옥은 좀더 특별한 인물인가? 홍루몽 1권을 읽으면 다 나와있다. 그냥, 걔내 둘이 전생에 맺어진 인연이라서 그래~ 이러면 할 말 없다. ;; 흐.. 그런데 전생의 인연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가 바로 냄새라는데 흥미로운 점이 있다. 로마인에게 향기는 영靈과 육肉의 세계를 통합하는 역할을 했으며,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잇는 통로로 작동했다. 종교의례는 특정한 향기를 필요로 했고, 이는 신에게 다가가는 한 방법이었다. 또한 향기는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강력한 감각정보이다. 어떤 향기를 맡으면 그에 얽힌 기억과 사건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경험을 한 적이 있으리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주인공이 차에 담근 마들렌 냄새를 맡음으로써 시작한다. 촉촉한 마들렌의 향기가 주인공의 기억을 환기시키고, 끝없는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게 한다. 아마 대옥이의 체취는 보옥이로 하여금 전생의 기억을 간접적으로 일깨워 준 것은 아닐까? 전생의 태허환경에서 신영시자(가보옥)가 영주초(임대옥)에 물을 주던 그때의 기억을 후각으로 감지하지 않았을까.. 마치 '양수의 냄새'를 맡은 갓난아기가 같은 향기를 풍기는 엄마품으로 파고 들듯이. 하지만 그때의 향기는 무척 정갈하고 맑았으나, 이제는 변질되고 타락하고 말았다. 보옥이가 마도파의 주술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나두창 스님과 절름도사는 말한다.

#3 하늘에도 구애 없고 땅에도 자유로운 너, 마음속에 기쁨 슬픔 하나같이 없었던 너. 단련을 받고 나서 영혼을 통하게 된 너, 인간 세상 찾아와서 시비곡절만 얻는 너. 분칠과 연지는 보배의 빛을 더럽히고, 화려한 저택에서 밤낮으로 고달픈 원앙. 달콤하게 꾸는 꿈 언젠가는 깨는 것을, 전생업보 청산하고 깨끗하게 흩어지리! <홍루몽 25회 中>

통령보옥은 우리들의 잃어버린 후각, 즉 본능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문명사회에서 살면서 필연적으로 퇴화된 감각과 그에 따른 기억까지.. 오늘날 후각은 시각에 밀려 찬밥신세인듯 하다. 정말? 시각과 후각이 서로 '경합'할 때 우리는 어떤 정보에 반응할까?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사과 한 알이 눈앞에 있어도, 썩은 냄새가 나면 식욕이 뚝 떨어질 것이다. 원시인류는 후각으로 안전한 먹거리를 감별해냈다. 냄새를 맡지 못하면, 맛도 잘 느낄 수 없다. 상했거나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위험에 처하기 일쑤다.

냄새를 잘 맡는 것, 그것이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 길이 될까?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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