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 3: 정월 대보름의 잔치

저자
조설근 지음
출판사
나남 | 2009-07-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국내 최초 정통 중국문학 학자들의 완역본!중국 근대소설의 효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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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봉은 신산神算이다. 몇 수 내다보는 예측으로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간다. 임기응변이 탁월하다고 할까?
아름다운 여인들의 웃음꽃이 피어나는 규중閨中은 그저 한가로워 보이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기氣 싸움이 대단하다.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지키려는 시어미 형부인, 그런 그녀를 훤히 파악하고 있는 며느리 왕희봉, 진정한 실세 노老마님 가모.
원앙을 둘러싼 해프닝은 희봉이 가부라는 공간에서 생존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득실을 헤아려 요리조리 위험을 빠져나가는
희봉의 책략은 제갈공명의 꾀를 보는 듯 하다.

그런데 희봉은 총명하기 그지 없으나 시를 짓지 못한다. 그저 대관원 해당시사 멤버들의 감찰어사.. 아니 물주(?)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칠 뿐이다. 이렇게 똑부러지는 이가 어째서? 그것은 무식해서가 아니라 배울 필요가 없어서이다.
그녀가 속한 세계는 대관원의 별천지와는 차원이 다른 시공간이다. 즉 서로 다른 언어체계가 유통되는 곳이다.
원앙 사건에서 요청된 것은, 실세가 누구인가를 재빨리 파악하는 일이었다. 뭐니뭐니해도 이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이는
가모였다. 형부인이 뭐라 하든, 가사가 성화를 부리든 간에.. 가모의 허락이 없으면 땡! 끝나는 일이었다.
희봉은 이런 역학관계를 잘 알고 있기에, 형부인 앞에서 어떻게든 자신이 엮이지 않으려고 온갖 방략을 동원한다.

이렇게 보면 쉬운 일이나.. 그것을 수행하는 과정은 만만치 않다. 형부인과 대화하는 와중에, 희봉의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행동모듈은 거의 자동기계 수준이다. 눈치가 백 단이요, 연기력 또한 대단하다. 그녀의 그런 전략은 예전
가련이 바람 피웠을 때, 마구 난리치다 가모 등이 나타났을 때 돌연 청순하게 눈물 짓는 것에서도 볼 수 있다.

그녀의 패턴은 복잡한 인간관계를 명료하게 파악하여 최적의 해법을 찾는데 집중되어 있다. 
이는 전쟁터에 임한 장수의 경우와 유사하다. 전쟁터는 무수한 변수가 작용하는 복잡계이며, 승리라는 결과를 위해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하는 곳이다. 요컨대 희봉에게는 多에서 一로 변환하는 언어가 필요했다.

그런데 대관원의 해당시사에서는 반대로 一에서 多로 펼쳐지는 언어체계가 유통된다.
하나의 시어, 운자를 갖고 다양한 표현법을 만드는데 몰두한다. '시는 메타포'라는 말처럼, 여기에 하나로 수렴되는 법칙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천변만화하는 개성이 존중된다. 

일본의 인류학자 나카자와 신이치는 그의 저서에서, 합리성을 문법에 따라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합리성은 인류의 '미치기 쉬운 마음'을 제어해 합리적인 마음의 운용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합리성이란 구조나 질서를 부여하는 논리적 언어체계라 할 수 있다. 희봉이 구사한 언어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합리성을 벗어난 '미치기 쉬운 마음'은 광기, 무의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카자와 신이치 식으로 말하면 '유동하는 지성'으로, 인간의 예술성 혹은 자연에 대한 감응력을 가리킨다.
시어詩語 자체가 현실 세계의 합리성과는 동떨어진 '논리적 언어질서 외부'에 위치한다. 그래서 그것은 매력적이며 동시에 위험하다. 아무 하는 일이 없이 바쁜 '무사망無事忙' 가보옥이 현실의 견고함을 깨부술 수 있는 '혼세마왕混世魔王'의 모습을 동시에 지니고 있음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인 듯 싶다. 한가하니 세상을 바꾼다? 백수가 세상을 변화시킨다? 오잉? 어디서 들어봄직한.. ㅎㅎ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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