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라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고미숙 (그린비,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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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번째 강좌가 끝나고 백수 케포이 또한 어느덧 반환점을 도는 시점에 이르렀다. 채운 샘은 자신이 서있는 그 자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으라고 말했다. 내가 마음 먹은 그 한걸음은 다름아닌 후기를 꼬박꼬박 쓰는 것이었다. 이것 또한 쉽지 않다. 새삼 그 한걸음이 만만치 않음을 느낀다. 후기를 알차게 적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강좌를 열심히 듣는 것은 물론, 백수 동무들과 밀착되어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백수 상호간 벌어지는 일에 주목해야 한다. 백수 케포이의 주인은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예전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씨가 언급해 화제가 되었던 말이 떠오른다. ‘국민 여러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나는 이 말을 나 스스로, 그리고 백수 동무들에게 던진다. ‘백수 동무 여러분, 백수 케포이하며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나는 분명 살림살이가 나아진 면이 있다. 외로움이 덜어졌다. 글을 올릴 수 있는 힘은 관계에서 비롯한다. 그 관계가 풍성하고 흥미로울수록 글의 길이는 점점 더 늘어난다. 후기라는 명목으로 장문의 글을 올릴 수 있던 것은 아마 백수 동무들과의 눈에 보이지 않는 상호작용이 그만큼 많았던 게 아닌가 싶다. 빈곤한 일상은 풍요로움으로 채워졌다. 늘어난 수다와 글의 분량이 그 증거이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 식으로 말해본다면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보다 많은 이들과 부딪히며 그들의 이야기와 모습을 글 혹은 사진으로 전하리라. 백만 백수 중 한 줌밖에 안 되는 40인 백수들의 사사로운 이야기일지 모르나, 이 글이 백수들의 우정의 정원에 합류할 2기, 3기 등 미래에 만날 동무들의 망설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3번째 강좌 ‘모더니티와 일상의 재배치’ 후기는 이런 비장한(?) 각오로 시작한다. 실은 후기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늦게 올려 찔리는 마음이 크다. 그래도 백척간두 진일보! 백수에게 견디기 힘든 것은 여러 가지 있겠으나, 무엇보다 ‘비교’당하는 것이 가장 불쾌하리라. ‘엄친아’는 연봉이 얼마네, 학교동창은 벌써 승진을 했다네 하는 소리에 괜히 마음이 조급해지는 현상을 한번쯤은 느껴보았을 것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100m 경주에서 꼴찌를 달리는 듯한 기분이다. 관중들은 혀를 차며 나를 쳐다보는 것 같고, 앞서 달리는 녀석의 꽁무니를 하염없이 바라만 보는 나 자신이 초라할 뿐이다. 그런데 누가 이 경주를 시작했는가. ‘산이 거기 있어 산에 오른다’고 말한 위대한 산악인처럼, 그저 내 앞에 트랙이 있기에 달렸는가? 이쯤 되면 왜 ‘열나게’ 뜀박질하고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스타디움은 경주의 열기로 이미 달아올라있고, 세상에 달리기하다 ‘내가 왜 뛰고 있지?’ 묻는 배짱을 가진 자는 별로 없다. 일단 시작된 이상, 무조건 열나게 달려서 이겨야 한다. 아무 이유 없다. 스타디움의 화려한 조명과 관중들의 함성, 승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환호의 달콤함, 정교하게 짜인 경주의 스펙터클에서 빠져나올 길은 없어 보인다. 애니 매트릭스 에피소드 #6 ‘World record’을 보면, 세계신기록을 세우는 육상 선수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우연히 달리다가 매트릭스의 허상을 깨닫는다. 무릎의 치명적인 부상을 안고 있었지만, 그것 조차 매트릭스에 불과했던 것. 그는 경기 중 무릎이 다시 파열되나 그것이 가짜임을 ‘알아차리고’ 세계신기록을 달성해버린다. 영화의 초반 내레이션은 이렇게 시작한다. ‘가장 특별한 사람만이 매트릭스를 알아차린다.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은 비범한 직관과 감성, 호기심의 소유자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가장 자유로운 사람만이 매트릭스를 알아차린다.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은 신체를 바꾸고, 일상을 재배치하는 자이다.’

  육상 선수는 무릎 근육파열의 허상을 인식한 후 비로소 그것을 뛰어넘었고, 우리는 그 동안 익숙하게 여겼던 가치(모더니티-근대성)를 되짚어봄으로써 자유로움을 탐색할 수 있다. 맹목적인 달리기를 멈추고 트랙 경계로 나아가 외부에 접속하는 것이다. 고미숙 샘의 ‘이 영화를 보라’에서는 모더니티에 희생당하거나 그것을 전복하는 인간 군상이 펼쳐진다. 밀양의 신애(전도연)는 남편을 잃고 아들과 함께 이사를 온다. 다소 허영기가 있는 그녀는 있는 척하기 위해 부동산 투자를 한다고 과시해 결국 그로 인해 아들을 유괴당한다. 허영은 ‘있어 보이기 위한’ 욕망이며 그 대가는 만만치 않다. 신애가 종교에 귀의하고 유괴범을 용서하는 장면에서 또 다시 무너질 때, 그녀가 집착한 욕망이 실제 삶과 얼마나 거리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아저씨, 밀양이 영어로 뭔지 알아요? Secret Sunshine이에요. 비밀의 빛, 멋지죠?’ 밀양은 비밀의 빛도 뭐도 아니고, 그냥 사람 사는 곳이다. 새벽 시장 복판에서 삶의 이론을 펼치는 자는 한가해 보인다. 말만 화려한 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게다. 신애는 남편의 사별, 밀양으로의 이주, 아들의 유괴, 종교 귀의 등, 인생의 변곡점마다 자의식이라는 망상을 버리지 못한다. 밀양으로의 이주는 바람난 남편에게 버림받은 초라한 피난이었고, 종교 귀의는 거룩한 신앙의 체험이 아닌 유치한 허세에 불과했다. 마지막 시퀀스인 종교 부흥회에서 울려 퍼지는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는 신애의 망상이 철저하게 박살 나는 장면이다. 만일 신애가 현실을 직시해 치열하게 삶을 감내해내는 쪽으로 일상을 재배치했다면 허세 같은 망상은 들어올 틈이 없었으리라. 더불어 파괴적인 행동 또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라디오 스타에 등장하는 최곤(박중훈)과 그 주변인물들은 이질적인 공간에서 모더니티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한물간 스타 최곤은 스타지만 반(半) 양아치에 가까운 인물이다. 스스로는 이런 모습을 락커의 자존심이라고 우기지만 되도 않는 허세일 뿐이다. 여기까지는 신애의 허영심과 비슷하다. 그러나 신애와 결정적인 차이라면, 신애는 언제나 홀로였고 최곤은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최곤은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 신애가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인 종찬(송강호)은 철저히 소외 당했지만, 최곤의 메신저인 매니저 박민수(안성기)는 최곤과 끊임없이 티격태격하나 그 자체로 소통한다. 다시 말하면 종찬은 그림자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림자는 티격태격하기는커녕, 말할 수 조차 없는 존재이다. 사주명리학으로 얘기하면 종찬은 신애를 생(生)해주지도, 극(剋)하지도 못한 것이다. 그저 바라만 볼 뿐. 그러나 최곤과 박민수는 서로 상생, 상극한다. 반 양아치였던 최곤은 이스트리버, 즉 동강(東江)이 흐르는 영월이라는 열린 코뮌에서 성장하나 신애는 밀양(密陽)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죽어간다. 신애와 최곤이 가족을 바라보는 관점도 주목할만하다. 신애는 바람난 남편과 아들의 유괴로 말 그대로 가족의 해체를 경험한다. 남편이 죽은 후, 신애가 선택한 곳은 다름아닌 남편의 고향인 밀양이다. 바람난 남편과 어떻게든 연결해보려는 신애의 마음을 순정으로 이해해야 할까? 신애에게 가족이 집착의 대상이라면, 최곤은 아예 가족 자체가 없다. 이는 라디오 스타 등장인물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박민수는 집에서 내놓은 가장이고, 밴드 이스트리버(노브레인)는 척 보아도 집에서 뛰쳐나온 악동 이미지이며, 라디오 방송국 본부장, PD도 좌천당해 떠도는 부평초 같은 신세, 영월 다방 김양도 절절한 방송 사연 고백으로 가출소녀임이 밝혀진다. 한마디로 행복한 가정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인간들인 것이다. 기존 개념으로 읽으면 참 딱하다고 혀를 찰 만도 하나, 이들은 오히려 한데 모여 유쾌한 난장을 벌인다. 가족을 벗어난 이질적인 존재들의 만남으로 빚어진 기이한 코뮌의 탄생!

  ‘별은 홀로 빛나지 않는다.’ 최곤에게는 민수가 있었고, 민수에게는 최곤이 있었다. 서로를 비춰주며 그들은 열린 관계를 형성한다. 신애와 종찬? 신애는 ‘속물 같은’ 아저씨에게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 그러나 진짜 속물은 신애였다. 현란한 망상에 빠져있는 신애보다, 남루한 현실을 직시하는 종찬이 더욱 생명력이 강하다. 열린 관계는 스스로 증식한다. 최곤과 민수의 관계망은 영월에서 다양한 관계를 만들어나간다. 그것은 기존의 가족과 조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변이다. 신애의 공고한 가족이 속절없이 무너졌다면, 최곤과 민수의 얼기설기한 가족은 새로운 구성원을 끌어들여 보다 강력해진다. 그 강력함은 라디오 스타 마지막 시퀀스인 대형 연예기획사의 거액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할 만큼, 자본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수준에 이른다. 가족을 바라보는 두 관점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지점이기도 하다. 백수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 신애처럼 부여잡고 지켜내야 하는 존재인가, 라디오 스타의 인물들처럼 열린 관계로 전환할 주체인가. 백수 생활을 하며 부모 봉양에 대한 문제를 지나칠 수 없다. 누구나 이 문제에서 쉽게 자유로울 수는 없다. 고미숙 샘은 ‘자식에게 부모는 극복해야 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부모에게 포섭되면 자신의 존재는 사라진다. 부모님을 봉양하느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했어 라고 말하는 것은 정녕 비극이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말이다. 이럴 때 자식의 삶은 왜곡되고, 그것을 부모 탓으로 돌리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최악이다. 흔히 부모 봉양이라 하면 생활비를 일정하게 지급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도 사고의 수준이 돈, 경제력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마치 경제만 살리면 만사 O.K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람에게 재산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바로 공동체, 코뮌의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외로움과 적막감을 해소할 수 있는 친구 혹은 이웃의 존재 여부이며 노인 세대에게는 더욱 절실하다. 이것은 결코 돈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며, 생활비 몇 푼으로 부모를 제대로 봉양하고 있다고 자랑한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별은 홀로 빛날 수 없다고 앞서 말한 것을 기억하리라.

  오히려 백수들이 부모 봉양을 고민할거라면, 그들이 다양한 코뮌에 접속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어설프게 봉양한답시고 마음에도 없는 취업을 하고, 인생을 후회 속에 살며 ‘나는 부모님 봉양하느라..’라는 핑계로 자신을 숭고한 희생양으로 삼을 이유는 없다.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얼른 찾아 매진하는 것이 더욱 생산적이다. 당장은 길이 보이지 않고, 월급(?)도 별로지만 사실 그게 지름길이다. 백수가 된 경로가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하지만, 쿵푸를 하러 온 이들은 뭔가 남다른 방법을 찾으러 온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남은 것은 배운 바를 동무들과 함께 꾸준히 실천하는 일 뿐이다. 공부, 그것도 코뮌 속에서 공부! 이렇게 말하지만 나도 부모님 봉양 문제는 여전히 걱정이 된다. 쿵푸가 부족할 따름이다. 중요한 것은 내 몸 하나 건사 못하면, 부모든 애인이든 그 누군들 감당할 수 있으랴. 사소한 일상의 재배치 조차 스스로 일궈낼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 이렇게 말하면 늙은 부모를 나 몰라라 외면하는 것이라 오해할 지 모르겠다. 물론 그렇지 않다. ‘효도는 기본적인 생존은 책임지는 것’이라고 고미숙 샘은 말한다. 중대사가 발생했을 때는 가족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 영화 괴물의 강두(송강호)네 가족처럼 말이다. 강두네 가족은 특이하다. 어머니의 존재는 기본적으로 부재하고, 강두의 동생은 형을 덜 떨어진 존재로 보는 등 대체로 ‘Sweet home’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괴물의 습격으로 현서(고아성)가 납치된 시점에서 가족은 하나로 뭉친다. 고미숙 샘은 ‘가족은 평소 무덤덤하게 지내되, 긴급할 경우 서로 걱정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화목한 가족’이라는 신화 속에 가려진 감정의 질곡이 얼마나 많은가?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치사한 감정싸움과 대립, 집착은 사랑이라는 포장으로 미화된다. ‘다 너를 사랑하니까 그런 거야’. 가족주의의 허구이다.

  가족주의에서 벗어나면 열린 광장이 기다리고 있다. 라디오 스타의 인물들은 가족이 없거나, 가족에서 떨어져 나온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별로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굳센 생명력으로 유쾌하게 일상을 버틴다. 닫힌 가족의 울타리에만 머물 경우, 그것이 파괴될 경우 신애처럼 갈 곳이 없어진다. 그러나 가족의 범위를 넓히는 시도를 끊임없이 한다면 그것은 무한히 증식할 것이다. 어디로든 접속할 수 있는 유목의 삶! 앞서 부모 봉양을 고민할거라면 그들을 다양한 코뮌에 접속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말했다. 젊은 세대들은 인터넷의 영향으로 커뮤니티 참여에 익숙하다. 그러나 우리의 부모 세대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대개는 교회, 절 같은 신앙공동체로 쉽게 편입된다. 어르신들이 연세가 드시면, 친구분들과의 모임도 잦아들고 주변에 같은 관심사를 공유할 수 있는 기회가 급격히 줄어든다. 말 그대로 인간관계의 사각지대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야 이렇게 백수 케포이 같은 모임도 하지만, 나이 드신 분들에게 그것은 익숙지도 않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동네에 있는 신앙공동체로 발걸음이 자연스레 향한다. 이 또한 부적절한 현상은 아니나, 그만큼 어르신들이 참여할만한 커뮤니티가 부족한 반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커뮤니티를 그분들께 접속해드릴 수 있을까? 고미숙 샘의 어머니 또한 교회 공동체에 나가신다고 한다. 이에 질문을 던졌다. 호모 쿵푸스의 창시자라 할만한 선생은 쿵푸(공부)는 늙어서도, 아니 늙을수록 하는 거라고 했다. 그럼 자신의 부모가 쿵푸를 할 수 있도록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라고. 답은 썰렁했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무슨 책을 쓴지도 모를 거라고’. 이어진 답변에 비로소 수긍했다. ‘가장 가까운 부모에게 영향을 못 미치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그 역량을 쏟으면 그만’이라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다 보면, 길은 열리고 욕망의 물줄기는 터지는 거라고. 할 수 있는 만큼 실천하는 것이다. 어르신들을 어떤 커뮤니티로 모시고 싶으면, 나부터 그 커뮤니티에 풍덩 빠지는 것이 순서이다.

  커뮤니티, 즉 코뮌에 대한 이야기는 할 게 많다. 마침 다음 강좌의 주제가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이다. 백수 케포이필리아의 ‘오래된 미래’를 여기서 통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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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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