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원 안짝의 강좌와 세미나로 지적 목마름을 근근이 축이던 나에게 140만원의 수강료와 (그것도 일시불!) 1년의 기간은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신청하는 사람들 참 대단해. 달리 생각해보자. 요즘 대학교 등록금을 검색해보니 한 학기당 300~400만 원이란다. 1년이 아니라 한 학기에 400만원. 등록금 천 만원 시대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게다. 대학교는 학위를 챙긴다고? 아차, 그렇지. 문득 멋들어지게 자기소개를 한 정아림 님의 한마디가 떠오른다. 저는 올해 대학을 입학한 스무 살입니다. 수유+너머라는 대학, 대중지성이라는 학과에 입학했지요. 이 말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돈은 학위를 얻기 위해서라면 지르는 게 당연하나 졸업장은커녕 수강확인증 따위조차 없는 교양강좌에는 아까운 일. 이런 인식이 내 마음 속에 남아있었나 보다. 그래서 수강 전까지 덜덜 떨며 할까 말까 망설였다. 세상에 보여줄 어떤 증명서나 자격증을 얻기 위해 공부를 하나. 공부는 왜 하나.

대중지성의 담임인 고미숙 샘의 개회사(?)에서 그 힌트를 찾아보자. 공부를 하면 쌀이 들어오고 평소 만날 수 없었던 재주꾼들과 어울릴 수 있다. 한마디로 밥과 친구가 해결된다는 얘기. 맙소사, 취업률이 최악이고 히키코모리족이 나날이 늘어나는 이 시대에 이런 자신만만한 말씀을. 10년 동안 수유+너머가 걸어온 길이 이를 증명한다. 아직까지 연구실은 쌀독이 떨어져 굶지도 않고 딱히 친구가 없어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가끔 투닥거리기는 하겠지만 혼자 심심한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 고미숙 샘은 누구나 가르치고 배운다를 실천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모색했단다. 선생이 칠판에 적어가며 가르치는 강좌나 수강생들이 둘러앉아 토론하는 세미나 등이 우리가 익히 아는 형식이다. 그런데 강의실에서 공부만 하다 보니 영 재미가 없더라 이 말이다. 시험 끝나고 싹 잊어먹는 습관처럼, 공부의 장을 벗어나면 공부의 약발이 먹히지 않았다. 한마디로 공부와 현실의 삶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그럼 공부하고 바로 제각기 집에 휑하니 가지 않고 한데 모여 밥을 지어 먹으면 어떨까? 한솥밥 먹는 운동부처럼 밥 먹으면서 한 술 더 떠주고 북적이다 보면 좀더 친해지지 않을까? 문자 쓴다면 관계의 밀도가 높아지지 않을까. 사람이 꼴 보기 싫으면 공부를 같이 할 마음이 생기랴. 반대로 친해지면 공부와 담쌓은 이도 친구랑 어울리고 싶어서라도 공부할 수 있겠다, 옳거니. 그렇게 공부와 밥과 청소 기타 등등 사적인 생활영역을 공유하기에 이른다. 이런 기틀 아래에서 본격적으로 다양한 공부 방법을 실험하게 된다.

대학로에서 용산으로 거점을 옳길 즈음 이런 논의가 오갔단다. 그 동안은 세미나 강좌 등을 짧게 가져갔는데 확 늘려서 해보면 어떨까? 이를테면 1년 초장기 레이스로 말이야. 아무도 답할 수 없었으리라.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는 대개 이런 식으로 출발한다. 선례가 없다고 포기하지 않고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는 것이다. 1년짜리 강좌라. 강좌 명은 대중지성. 고미숙 샘이 극력 주장하여 관철한 이름이란다. 문리스 샘의 증언에 따르면 강압적인 분위기 하에 이루어졌다고 하나, 그들 또한 대안은 없었기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나 뭐라나.. ^^ 아무튼 이러저러하게 출범한 대중지성은 올해로 4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년 동안 공부와 생활공간의 장에서 지지고 삶다 보면 뭔가 먹을만한 사골국물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한마디로 1년짜리 프로그램의 기획의도는 강의실이라는 틀을 벗어나 어디에서도, 어떻게든 공부의 장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능력자를 기르는데 있다고 하겠다. 물론 1년간 아무 재료 없이 마냥 끓인다고 진한 국물이 우려날 리 없을 터. 건성건성 하느냐 훅 빠져서 하느냐에 따라 국물의 밀도(?)가 다를 것은 당연지사.

고미숙 샘은 4기 출발에 즈음하여 지난 3번의 경험을 돌아보았단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밀도가 어중간했다는 것. 직장인 수강생이 많아 공부의 강도를 높이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즉 국물 맛이 싱겁다고 하면 적절할까. 해서 공부의 마디를 넘지 못하고 지식의 습득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오해는 마라. 공부한다 해서 직장을 때려치우고 올인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밀도를 높여 마디를 넘는다는 것은 공부의 알맹이를 우적우적 씹어 자기의 언어로 소화해낸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글쓰기의 실천. 잘 알겠지만 책 읽기와 글쓰기는 전혀 다른 영역의 문제다. 음식을 먹기만 하고 싸지 못하면 어떨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독서가 섭취요 입력이면 쓰기는 소화요 출력이다. 변(便)의 색깔로 건강의 질을 점검한다고 하나 그건 변을 누고 나서의 문제다. 나오지도 않고 장에서 묵혀두고 있는데 색깔을 어찌 운운하랴. 일단 시원하게 싸란 말이다. -_-;; 내가 지금 싸는 이 글의 색깔이 거무튀튀하고 누리끼리 형편없다 하더라도 내보여야 상태를 진단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고미숙 샘이 3년의 관찰기간을 마치고 최초로 대중지성에 전면 모습을 드러낸 까닭 또한 공부의 마디 언저리에서 끌탕하는 동학들에게 약간의 친절함을 보여주시고자 함이렷다. 사골국물 한번 제대로 우려보자. 공부의 문은 열려있다. 물론 오고 감은 자유. 원하는 만큼 얻으리라. 욕망과 능력은 비례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샘이 밝힌 4기의 컨셉트는 공부의 밀도와 관계 장의 대폭 강화. 이를 측면 지원하기 위해 손수 담임을 맡으셨다고 하니 공부에 욕심 있는 자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공부의 밀도는 글쓰기의 첨삭 지도, 관계 장은 기획세미나의 신설로 보완한다고 하니 수강생들은 그저 항심으로 열심히 하면 될 일.

고미숙 샘은 고전평론가라는 직업을 스스로 만들었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를 배우고 즐기며 밥벌이 또한 해결하면 이보다 좋을 수 없다. 다소 고비어천가(?) 같으나 샘은 Role-Model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부터 샘의 글을 재미나게 읽고 공감했다. 공감하여 수유+너머로 발걸음을 움직였고 1년짜리 강좌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것은 글쓰기의 힘이다. 여러 사람들의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한 자리에 모이게 하는 글의 위력이란 참 오묘할 따름이다. 글쓰기를 첨삭, 지도해주신다니 참 감사하고 대단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게 참 귀찮은 일일 수 있는데 선뜻 그렇게 말씀하시니 처음엔 꽤 놀랐다. [보물섬]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문학의 어려움은 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뜻하는 바를 쓰는 것이라 했다. 고미숙 샘 또한 비슷하게 말했다. 글을 잘 쓰려면 쓸 거리가 있어야 한다. 즉 기술(Skill)이 아니라 풍부한 인생경험이 글을 쓰는 기초인 게다. 그럼 나이 많은 이가 유리하겠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젊어도 그만큼의 인생 서사가 있다. 영화 길다고 재미있나. 글쓰기는 간편하다. 악기연주 같은 것은 여러 장비가 필요하나 글은 노트와 볼펜만 있으면 그만이다. 타고난 재능과 무관하다. 자신의 인생에서 꺼내놓을 얘깃거리가 많으면 누구나 쓸 수 있고 타인과 공명할 수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지금 대중지성 이 자체의 경험이 참 흥미롭다. 그래서 이렇게 누리끼리하고 거무튀튀한 글을 써대는 게지. 글쓰기라는 만인에게 평등한 도구를 사용하여, 동학 여러분 모두 지속 가능한 공부의 영역으로 함께 걸어가기 바란다. 그것은 기관이 발급해주는 증명서보다 훨씬 가치 있음을 확신한다.

Posted by 지장보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