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구()는 꽉 참 혹은 아주 많음을 뜻한다. 갖은 고생 끝에 겨우 살아남음을 구사일생(九死一生)이라 하고, 꼬리가 많은 요사스런 여우를 구미호(九尾狐)라 함은 이런 까닭이다. 때문에 연암 박지원이 열하를 여행하며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넌 이야기(一夜九渡河記)는 정말 아홉 물줄기를 이름이 아니라 그만큼 여정의 고단함을 표현한 것이리라. 아홉은 만수(滿數)이다. 그 다음은 다시 영(0, )으로 돌아가는 동시에 십()으로 단위를 바꾼다. 한 자리 숫자 9개가 모인 이후 마침내 두 자리 숫자로 변한다. 구십구 다음은 무엇인가? 일백(一百)이다. 9를 넘어설 때마다 그 순간 단위의 양질전환이 이뤄지는 것이다. 아홉 수를 조심하라는 속설도 있을 만큼 아홉은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깔딱 고개와 비슷하다. 계속 오르자니 죽을 맛이고, 그만하자니 올라온 게 아깝다. 양질전환의 법칙이 어찌 숫자 단위에만 그칠까? 아홉을 지나는 순간 새로운 단위를 얻듯, 산속에서 한 고비 넘기면 나무로 둘러싸인 숲 속에서 벗어나 탁 트인 무언가를 굽어볼 수 있다. 연구(硏究)·탐구(探究)·궁구(窮究). 모두 무언가에 골똘히 집중하는 모양을 뜻하는 단어이다. 전부 연구할 구()’가 들어가며, 이 글자 안에 또한 구()가 있음은 우연이 아니다. 구멍()을 아홉()번 파야 겨우 뭔가 건질 수 있는 게다. 연암도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너고 나서야 비로소 토해내듯 말했다지 않은가. 내 이제야 도를 알았다.

 발가락은 시려 퉁퉁 붓고 눈꺼풀은 천근만근, 손가락 끝은 흉하게 터서 쓰라리고 입술은 갈라져 핏물이 배어난다. 간밤에 내린 빗줄기로 속옷까지 다 젖은 질척함 그대로 침낭 속에 눅눅한 육신을 밀어 넣는다. 뒤척거리며 겨우 잠이 들려 하니 보초가 다가와 어깨를 흔든다. 근무 교대입니다. 2000년 즈음 군 복무 중 동계 혹한기 훈련 때 기억이다. 모르긴 해도 연암이 아홉 번 강 건넌 순간이 이보다 힘들면 힘들었지 덜 고되지는 않았으리라. 운송수단도 변변치 않았던 그 옛날, 연암은 18세기 당대 조선 지식인이 한 번도 가지 않은 열하라는 미지의 세계에 몸을 던졌다. 두 발자국을 온전히 땅에 찍어가며 하는 여행. 전무후무한 탐험대의 물리적 속력은 느렸을지라도, 연암의 멈추지 않는 붓끝에 채집된 에피소드는 몇 백 년 후인 지금까지 꿈틀대며 뻗어나간다. 이렇게 발바닥으로 하는 여행의 촘촘함은 20세기 벽두에 이르러 코끼리가 울부짖는듯한 굉음에 갈가리 찢긴다. 그 놈의 정체는 무한궤도를 질주하는 기차. 지금도 논산 훈련소로 입대하는 젊은이들은 서울역-용산 라인에서 열차를 탄다. 1세기 전에도 그랬다. 경성역으로 향하는 무자비한 쇳덩이는 모든 것을 실어 날랐다. 기차는 제국주의 침탈을 싣고 한반도를 경유해 만주 벌판을 내달렸으며, 망국의 청춘은 경성역에서 내선일체의 구호를 강요당하며 태평양 이역 만리로 끌려갔다.

 기차의 미학은 생략이다. 여기에 논리·사유·여정의 틈은 없다. 일직선의 레일은 모든 이질적 존재를 뚫고 가로지르고 집어삼키며 그저 달린다. 차이는 직선으로 수렴되고, 차창 밖 풍경은 액자 속 그림마냥 관람 된다. 기차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이동을 더 이상 여행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도착지까지 감내해야 할 지루한 시간으로 탈색되고 만다. 아홉 번 죽을 고생하며 강을 건넌 연암이 경성의 모던 뽀이 였다면 그는 어떤 여행을 했을까? 연암하면 누구와도 접속할 수 있고, 삼천포 샛길로 새어 수많은 변곡점을 만들어내는 인물이다. 그의 여행은 연경 사행단의 공식일정에 맞추기는커녕, 끊임없이 바깥으로 탈주하려고 온갖 기지를 발휘한 기록이다. 여기서 열하일기의 다채로운 서사가 펼쳐짐은 두 말할 바 아니다. 그런데 서로의 눈길을 피해 창가 혹은 신문·잡지꾸러미에 눈을 고정시키는 승객들 사이에 그를 던져놓는다? 모르긴 해도 연암 선생의 기질상 여기저기 말을 걸고 돌아다니는 통에 객차 밖으로 쫓겨나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아차, 기차의 작동원리와 묘법을 세세히 살펴 고향의 벗들에게 들려주려고 할 수도 있으렷다. 이러저러해도 그의 주요한 관심은 사람들과의 끊임없는 만남에서 차이를 반복하고 새로움을 이끌어내는 데 있다. 이런 인식은 객차 속 지정석에 앉아 오로지 기차가 언제 목적지에 도착하나를 기다리며 꾸벅꾸벅 조는 근대인과는 천지 차이라 할 수 있다.

 묵직한 쇠막대기, 목침마냥 단단한 게 베고 자기 딱 좋다네. 이에 낮잠 자러 간 동네 총각, 저녁 나절 목 달아난 귀신 되어 돌아왔네. 철길이 깔리고 기차가 운행되며 열차에 치여 죽는 사고가 빈번했다고 한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철로를 베게 삼아 잠들다 변을 당한 이들이 다수를 차지했다니, 지금 시선으로 보아 황당하기 그지없으나 어찌 웃을 수 있으랴! 미망(迷妄)에 빠져 죽음을 당한다. 이 에피소드는 세상 물정에 어두워 허울뿐인 당시 대한제국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근대 국민국가에 의해 충실히 양성되어 자본과 국가를 추종하며 살아가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대한제국은 돌진하는 제국주의 기차에 받혀 분해되었다. 나는? 아직은 유예 상태라 말하는 것이 정확하리라. 칠흑 같은 밤, 강을 건너며 연암은 말한다. 내가 이렇게 깊은 밤에 물을 건너는 것은 지극히 위태로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말을 믿고 말은 제 발을 믿고 발은 땅을 믿으니 견마 잡히지 않는 효과가 이와 같구나. 연암에게 믿는다는 행위는 스스로 믿음의 주체가 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말()이 되고, 내가 말의 발이 되고, 내가 땅이 되니 어찌 강물에 빠질 걱정을 하겠는가? 자칫 선문답과 같은 이 얘기는 반드시 자세히 살펴야 한다. , 궁구(窮究)해야 조금이나마 그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겠다. 열차 기적소리가 코앞에서 벼락같이 울리는데도 깨어나지 못하는 정신이여! 아아, 무릇 얕게 배우고 스스로 이치를 깨우쳤음을 자부하니 기차 바퀴에 포개어져도 다 자업자득일 뿐.

 연암이 말한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현대 사회만큼 신뢰와 신용을 강조하는 시대는 없는 듯 하다. TV를 틀면 준수한 이목구비의 남녀가 등장해 상품의 품질을 믿으세요!라고 권한다. 사회 이슈가 생길 때마다 신문지상에는 어김없이 국가신인도에 미칠 영향이 보도된다. 여기저기서 신뢰를 말해 급기야 신용은 등급이 매겨져 화폐로 환산되기까지 한다. 이쯤 되면 신뢰가 넘치는 일상이라 할만하다. 언어는 광고 혹은 선전의 기술로써 믿음직스러워 보이기 위해 보다 구체적이고 정교해진다.『아마존의 눈물』에 등장한 조에 족()’의 언어는 매우 단순하다. 한 개 단어가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된다. 그럼에도 의사소통이 별 문제없어 보인다. 수많은 언어를 보유하고 있고 더욱 확장하려는 우리는 어떤가? 조에 족보다 나아 보이지 않음은 확실하다. 연암은 아홉 번 강을 건너며 강물과 자신을 경계 짓지 않음으로써 빠져 죽을지 모르는 공포를 극복한다.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인디애나 존스 Ⅲ 최후의 성전』클라이맥스 장면# 존스 박사(해리슨 포드 扮)는 천 길 낭떠러지 앞에 마주한다. 뒤에선 적이 총칼을 들고 추격하는 급박한 상황, 박사는 수첩에 언급된 문장을 되뇐다. ‘믿는 자만이 건널 수 있다.’ 마침내 발걸음을 떼어 눈에 보이지 않던 다리를 무사히 건넌다는 얘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존스 박사 역시 절체절명의 순간, 몸을 그야말로 던졌다’. 여기서 이러다 잘못되면 어쩌지?’ 하는 마음은 개입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아마 포기하고 돌아서 쫓아오는 적의 총칼에 죽임을 당했겠지. 즉 말잔치 따위가 들어설 사이가 없다. 솔직히 내가 이 수준의 경지를 글로 떠드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나 조차 일상생활에서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이러다 잘못되면 어쩌지?’를 수없이 고민하기 때문이다.

 연암 선생이나 존스 박사의 비슷한 점 한 가지는 어디를 가도 친구가 있거나, 친구를 사귀는 재주가 있다는 점이다. 연암이 성경과 연경·열하 일대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이나, 존스가 밀림과 사막, 미궁에서 접한 무수한 도움의 손길은 그들 사람됨을 보여준다. 나는 연암이 자신을 던져 외물(外物)가 하나될 수 있었음은, 바로 그의 친구사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연암을 괜히 우도(友道)를 걸은 이라 하는 것이 아니리라. 그 증거를 살펴보자. 연암은 말한다. “벗을 잃는다면 행여 내게 눈이 있다 하나 내가 보는 것을 뉘와 함께 볼 것이며, 행여 내게 귀가 있다 하나 내가 듣는 것을 뉘와 함께 들을 것이며, 행여 내게 입이 있다 하나 내가 맛보는 것을 뉘와 함께 맛볼 것이며, 행여 내게 코가 있다 하나 내가 맡는 향기를 뉘와 함께 맡을 것이며, 행여 내게 마음이 있다 하나 장차 나의 지혜와 깨달음 뉘와 함께하겠나?” 정조대왕의 말도 들어보자. “박지원은 평생 조그만 집 한 채도 없이 궁벽한 시골과 강가를 떠돌며 가난하게 살았다. 이제 늘그막에 고을 수령으로 나갔으니 땅이나 집을 구하는 데 급급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서 천 리 밖에 있는 술친구와 글 친구들을 초대하고 있다니, 문인의 행실이 이처럼 속되지 않기도 참 어려운 일이다.” 아아, 처음과 끝이 이리도 한결같을 수 있다니! 대저 친구사귐을 좋아하는 자는 수많은 차원을 가슴 속에 품은 자라 할만하다. 사람이 소우주라는 말은 진부하나 그 깊은 뜻은 실로 헤아리기 어렵다. 사람마다 최소한 하나의 우주를 지녔고, 개개인도 수양의 정도에 따라 여러 차원을 넘나들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들을 친구로 받아들여 몸을 던져섞이고 어우러진다면 그런 그는 도대체 몇 개의 우주와 차원을 종횡무진 질주하는 것인지 나는 정녕 모른다. 다양한 세상의 진면목을 두루 받아들이고 품어 안는 연습을 꾸준히 하면, 진정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 그 순간 의식하지 않아도 강물로써 땅을 삼고, 강물로써 옷을 삼고, 강물로써 몸을 삼고, 강물로써 성정을 삼는다(以河爲地 以河爲衣 以河爲身 以河爲性情). 강물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마침내 그것을 타고 함께 흘러간다.

 , 무지몽매함에서 깨어나려면 내 안에서 비롯하는 외물에 대한 공포와 망상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외물과 하나가 되야 한다. 어떻게? 몸과 마음을 던져야 한다. 어디서? 친구를 사귀는 일상의 현장 곳곳에서. 여기서 연암은 어떻게 그리도 친구를 잘 사귀느냐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자칫하면 날 때부터 타고난 인물로 여기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이미 말했듯 연암 선생 같은 이도 일야구도하(一夜九渡河)’ 하며 겨우 도를 깨달았음을 밝힌다. 타고난 성품을 전혀 떼어놓을 수는 없으나 어디 난 놈만 그리 되겠는가? 내가 주목한 지점은 바로 던지는행위이다. 이 글의 핵심 키워드가 구() 혹은 구()인 까닭이다. 서두에 이것들에 대해 구구절절 괜히 얘기한 게 아니다. ()를 구()번하면 구()하리라. 다시 말하면 몸과 마음을 바쳐 고민하고 파고들어감을() 꾸준하고 무수히 실천하면() 원하는 중간 지점에 다다를 수 있다(). 왜 중간 지점이냐고? 끝이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아득하면서도 흥미진진한 것 아닌가. 이는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다. 동시에 누구나 할 수 있다. 외물에 현혹되기 싫다면 그에 맞서 담담히, 때로는 결연히 끝까지 뚫고 나가야 한다. 쓰리 구(究·九·求)로 말이다.

 고미숙 샘의 이 영화를 보라에서는 이 3구의 사례라 할만한 얘기가 나온다. , 외물(모더니티)에 희생당하거나 그것을 전복하는 인간 군상이 펼쳐진다.밀양의 신애(전도연)는 남편을 잃고 아들과 함께 이사해 온다. 다소 허영기가 있는 그녀는 있는 척하기 위해 부동산 투자를 한다고 과시해 결국 그로 인해 아들을 유괴당한다. 허영은 있어 보이기 위한 욕망이며 그 대가는 만만치 않다. 신애가 종교에 귀의하고 유괴범을 용서하는 장면에서 또다시 무너질 때, 그녀가 집착한 욕망이 실제 삶과 얼마나 거리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아저씨, 밀양이 영어로 뭔지 알아요? Secret Sunshine이에요. 비밀의 빛, 멋지죠? 밀양은 비밀의 빛도 뭐도 아니고 그냥 사람 사는 곳이다. 새벽 시장 복판에서 삶의 이론을 펼치는 자는 한가해 보인다. 말만 화려한 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게다. 신애는 남편의 사별, 밀양으로의 이주, 아들의 유괴, 종교 귀의 등, 인생의 변곡점마다 자의식이라는 망상을 버리지 못한다. 밀양으로의 이주는 바람난 남편에게 버림받은 초라한 피난이었고, 종교 귀의는 거룩한 신앙의 체험이 아닌 유치한 허세에 불과했다. 마지막 장면인 종교 부흥회에서 울려 퍼지는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는 신애의 망상이 철저하게 박살 나는 순간이다. 만일 신애가 현실을 직시해 치열하게 삶을 감내해내는 쪽으로 일상을 재배치했다면 허세 같은 망상은 들어올 틈이 없었으리라. 더불어 파괴적인 행동 또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라디오 스타에 등장하는 최곤(박중훈)과 그 주변인물들은 이질적인 공간에서 외물(모더니티)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한물간 스타 최곤은 스타지만 반() 양아치에 가까운 인물이다. 스스로는 이런 모습을 락커의 자존심이라고 우기지만 되도 않는 허세일 뿐이다. 여기까지는 신애의 허영심과 비슷하다. 그러나 신애와 결정적인 차이라면, 신애는 언제나 홀로였고 최곤은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최곤은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 신애가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인 종찬(송강호)은 철저히 소외 당했지만, 최곤의 메신저인 매니저 박민수(안성기)는 최곤과 끊임없이 티격태격하나 그 자체로 소통한다. 다시 말하면 신애의 종찬은 그림자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림자는 티격태격하기는커녕, 말할 수 조차 없는 존재이다. 사주명리학으로 얘기하면 종찬은 신애를 생()해주지도, ()하지도 못한 것이다. 그저 바라만 볼 뿐. 그러나 최곤과 박민수는 서로 상생·상극한다. 반 양아치였던 최곤은 이스트리버, 즉 동강(東江)이 흐르는 영월이라는 열린 코뮌에서 성장하나 신애는 밀양(密陽)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죽어간다. 신애와 최곤이 가족을 바라보는 관점도 재미있다. 신애는 바람난 남편과 아들의 유괴로 말 그대로 가족의 해체를 경험한다. 남편이 죽은 후, 신애가 선택한 곳은 다름아닌 남편의 고향인 밀양이다. 바람난 남편과 어떻게든 연결해보려는 신애의 마음을 순정으로 이해해야 할까? 신애에게 가족이 집착의 대상이라면, 최곤은 아예 가족 자체가 없다. 이는 라디오 스타 등장인물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박민수는 집에서 내놓은 가장이고, 밴드 이스트리버(노브레인 扮)는 척 보아도 집에서 뛰쳐나온 문제아들이며, 라디오 방송국 본부장, PD도 좌천당해 떠도는 부평초 같은 신세, 영월 다방 김양도 절절한 방송 사연 고백으로 가출소녀임이 밝혀진다. 한마디로 행복한 가정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인간들인 것이다. 기존 개념으로 읽으면 참 딱하다고 혀를 찰 만도 하나, 이들은 오히려 한데 모여 유쾌한 난장을 벌인다. 가족을 벗어난 이질적인 존재들의 만남으로 빚어진 기이한 코뮌의 탄생!

 별은 홀로 빛나지 않는다. 최곤에게는 민수가 있었고, 민수에게는 최곤이 있었다. 서로를 비춰주며 그들은 열린 관계를 형성한다. 신애와 종찬? 신애는 속물 같은 아저씨에게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 그러나 진짜 속물은 신애였다. 현란한 망상에 빠져있는 신애보다, 남루한 현실을 직시하는 종찬의 생명력이 더욱 건강하며 또한 강인하다! 열린 관계는 스스로 증식한다. 최곤과 민수의 관계망은 영월에서 다양한 관계를 만들어나간다. 그것은 기존의 가족과 조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변이다. 신애의 공고한 가족이 속절없이 무너졌다면, 최곤과 민수의 얼기설기한 가족은 새로운 구성원을 끌어들여 보다 강력해진다. 그 위력은 라디오 스타 엔딩 시퀀스인 대형 연예기획사의 거액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할 만큼, 자본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수준에 이른다. 가족을 바라보는 두 관점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지점이기도 하다. 가족이란 외물(모더니티)는 무엇인가? 신애처럼 부여잡고 지켜내야 하는 존재인가, 라디오 스타의 인물들처럼 열린 관계로 전환할 주체인가. 어디 가족만이 외물이겠는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 숱한 외물들의 실체를 집요하게 추적하자. 그리고 포획해 하나하나 껍질을 벗겨 박제로 만들자. 사냥꾼의 야성(野性)으로 사냥감을 대해야 한다. 사냥감과 사냥꾼은 실시간으로 그 위치가 변한다. 내가 사냥하려다 되레 사냥 당하지 않으려면 외물인 범이나 곰이 되어야 한다. 호흡, 발걸음, 습성 하나하나 완벽히 외물이 되어 마침내 그것을 뚫어낼 수 있는 나도 아니고 맹수도 아닌 새로운 변이를 창조해야 한다.

 투전판이 벌어졌다. 전날 구경꾼으로 전락했는데 이번에는 맘 먹고 판에 낀다. 대개 이런 판에서 돈을 따고 잃음의 도()는 한가지이다. “뜻을 얻은 곳에는 두 번 가지 않는 법. 만족함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네!” 병권 샘은 대중지성 특강에서 선물의 교환·증여적 성격에 대해 말했다. 요약하면 선물을 하려면 티끌만큼이라도 뭘 바라지 마라, 아니 오히려 필요 없는 물건을 떠넘기듯 하라. 선물할 뜻을 지닌 그 지점에 두 번 가지 않는 법. 바라는 게 없으면 안달하지 않는다네! 안달함은 곧 나와 외물을 구분한다는 것. ‘내가 선물했는데 별 반응이 없네, 뭐지?’ 이런 마음이 근심과 두려움을 낳는다. 매 순간 온 몸을 던져 나를 비워야 한다. 쉽지 않다, 당연하지. 학문이 짧고 견문이 부족하니 그저 무식하리만치 반복만이 장땡! 쓰리 구의 강령을 뼈마디와 혈관에 새기라. ()를 구()번하면 구()하리라. 연암은 이런 마음의 상태를 명심(冥心)이라 했다. 비우다 보면 어느새 채워져 있는 오묘한 경지. 이는 의식하지 않을 때 비로소 경험할 수 있으리라. 어쩌면 살아가는 동안 삶이 쭉 빨려 들어가는 상태가 그런 때일지도. 그때는 이런 생각조차 안하고 깃털마냥 가벼이 잘 살고 있을 게야. 문득 본문을 여러 번 쓰고 고치다 보니 비로소 토해내듯 말한다. “내 이제야 도를 흉내 내본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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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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