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벽초홍명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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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홍명희 (사계절,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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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승부사

 

서림이를 유심히 보면 투전판의 노름꾼과 비슷하다. 본전도 못 찾고 패가망신하는 일개 노름꾼과 차원이 다른 고수다. 손에 잡은 패가 나쁠수록 겉으로 더욱 태연해진다. 포커페이스 기질을 타고 났다고 할까? 탑고개에서 처음 화적들에게 붙들렸을 때 속으로 조급할수록 겉으로는 더욱 태연한 체하고, 거짓말이 발각되었음에도 지수굿하게 있다가 하는 말이 볼 것 다 보았거든 인제 도루 이리 내우.라고 말한다. 서울에서 포교들에게 체포 당했을 때도 놀라움과 겁이 작히 차고 고비가 넘었으나 오히려 악이 나고 담대하여졌다.

 

엿방망이판에서 지껄이는 말소리를 서림이가 무심히 듣다가 무뜩 생각하니, 자기가 포도대장을 보는 것이 흡사 한 장 더 뽑는 셈인데 더 뽑아서 따라지나 만들지 하니할까. 아니다. 자기는 이왕 잡은 것이 따라지니까 뽑아서 더 못 되면 무대밖에 더 될까, 겁날 것이 없었다. - 임꺽정 9권 p212

 

엿방망이는 포커나 고스톱 같은 노름이다. 화적패의 모주(謀主) 서림임을 자복하면 능지처참이요 부인하면 혹독한 고문을 면치 못하는데, 신체 부실한 서림에게는 둘 다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리라. 한마디로 따라지 신세, 이왕 이렇게 된 거 갈 데까지 가보자! 죽기밖에 더하겠느냐? 최후의 수단으로 포도대장 뵙기를 청하고, 이로써 임꺽정과 서림의 운명은 갈리게 된다. 포도대장을 만나 자신이 서림임을 당당히 밝히며 한바탕 말을 늘어놓는다. 조금이라도 입을 잘못 놀리면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조리 있는 서림의 발명은 거짓말에 이골 난 대장마저 책잡을 구석이 없다. 노름판에서 코너에 몰렸을 때, 오히려 판돈을 더 올리면 상대방 기가 질린다. 그걸 이용해 전세를 뒤집는 선수의 솜씨! 어지간한 배짱과 생(生)의 집념이 아니면 흉내내기 어렵다.

 

중인으로 세상을 겪다

 

서림의 이런 대담함과 수단의 용이함을 살펴보려면 그의 행적을 하나하나 추적해보는 게 필요하다. 경기도 광주의 아전으로 경기 감영의 감리를 다녔다는 얘기로 미루어 그가 중인 신분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중인은 사농공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특수층으로, 지역의 토호에서 유래한다. 관청의 사무를 처리하는 이방·형방·사령·통인 등이 중인이었으며, 자신들만의 네트워크로 아전문화를 형성했고 업무는 자식에게 세습되었다. 서림이는 광주 관아의 형방이었으며 그가 의학·수리·천문·지리에 두루 밝은 것은 중인 계층의 실무능력과 무관하지 않다. 중인들은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문(文)·법(法)·수(數)에 관련한 지식수준이 매우 높았다. 이들은 능력은 있었으나 양반이 될 수 없는 사회적 한계 때문에, 오히려 그 능력을 더욱 꽃피울 수 있었다.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상황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현실적 이익을 추구한 것이다. 그래서 중인들은 사고가 유연했으며 새로운 사상과 문물에 열린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다. 18세기 무렵 전해진 서양문물과 천주학의 보급은 역관을 위시한 중인의 활약 덕분이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견고한 신분제에 균열을 일으키는 촉매제로 작용한다. 언뜻 보면 자족하는 것 같으면서도 변혁의 중심에 서 있는 조선의 중인들. 서림이의 욕망이 팔도정복을 부추기는 것에서, 명철보신에 이르기까지 자유롭게 오가는 것은 이와 같은 중인의 속성과 연관 지을 수 있다.

 

게임을 지배하다

 

서림이가 고향 광주를 떠나 평양에 나와있게 된 것은 포흠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공금 횡령과 비슷한데, 당시 아전들에게 따로 봉급은 없었고 포흠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 해먹는 정도가 지나치거나 청렴한 수령을 잘못(?) 만나면 경을 치는데, 서림이가 딱 그 케이스였던 것이다. 임꺽정 내에서도 드물게 훈남으로 여겨지는 이윤경이 경기감사일 때 걸렸으니, 웬만하면 그냥 넘어갈 것도 호되게 당했으리라. 그 까닭에 거의 추방되다시피 하여 타향에서 빌빌거릴 때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이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평안감사의 눈에 들어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니, 일개 심부름꾼에서 장사로 쾌속승진 하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서림이는 청석골에 입당할 때도 두령으로 한방에 지위가 급상승한다. 이건 그냥 아첨에 능해서가 아니다. 이를테면 주변 상황을 장악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는데, 서림이는 사람의 심리를 꿰뚫고 상황을 면밀히 판단한다. 그렇게 판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재주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이다. 한마디로 게임을 지배하는 포스가 남다르다 할까?

 

게임을 승리로 이끌려면 감정에 치우치면 안 된다. 워낙 배신자 이미지에 비열함이 부각되어 그렇지, 서림이의 승부사적 기질은 곳곳에서 포착된다.

 

죽게 된 건 내 잘못이구, 살려주신 건 두령의 은덕입니다. 나를 낳아준 이두 부모요, 나를 살려준 이두 부모라니 두령은 곧 나의 부모신데 내가 정신을 차리구서야 먼저 와서 보입지 않을 길이 있습니까. 서림이가 나직나직 말하는데 말소리는 약하나 말하는 것은 똑똑하였다. - 임꺽정 6권 p139

 

서림이가 청석골에서 꺽정이의 이름을 팔다 죽다 살아나, 살려준 길막봉이에게 사례하는 장면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기 바쁠 텐데, 은의를 표시하기 위해 다시 적굴로 돌아온다? 도무지 무슨 속셈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서림이가 운명의 순간마다 뚫고 나가는 힘이 바로 이 승부사적 기질에서 비롯한다. 청석골에서 부질없이 죽을 곤경을 반전시켜 두령의 자리에 오르고 포도청에 체포되어 저승의 길목에서 살아 돌아오는 건, 나쁜 패를 쥔 상황에서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활로를 찾는 서림의 대담한 기질 때문이다. 웬만한 사람이면 공포에 질려 살려 달라고 빌거나 까무러쳤을 텐데 말이다. 한마디로 서림에게 게임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게임에도 법칙이 있다

 

서림이가 비록 남의 비위를 잘 맞춰주나 아무 때나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들이 Yes할 때 No하는 강단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평양봉물을 탈취하는 장소를 물색할 때 다수의 두령이 탑고개에서 일을 벌이자는 주장에 서림이는 고개를 가로 흔들며 “아무리 주장하는 사람이 많드래두 탑고개는 신통치 못합니다.”라고 말하고, 꺽정이가 전옥서 파옥 계책을 묻자 “위험을 무릅쓰고 파옥하려구 하시는 건 너무 과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 파옥할 계획을 파의하시는 것이 상책”입니다 라고 직언한다. 서림이가 마냥 분위기에 휩쓸려 입에 발린 말만 골라하는 아첨꾼과 거리가 먼 대목이다. 관군을 피해 광복산으로 본거지를 옮기자는 주장에 여러 두령들의 원성을 사도 할말은 다 한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딱 부러진다. 그러나 서림이가 그렇게 자기 의견만 고집하는 고지식한 인물은 아니다. 항상 빠져나갈 길을 틔어놓고 움직인다. 계책을 낼 때도 단답형이 아닌 친절하게 찍을 수 있도록 꺽정이를 배려한 삼지선다형! 상중하책 중 골라 잡어~

 

서림이 같은 사람이 화적패에 있는 것 자체가 이미 보통 일이 아니다. 오가와 이봉학이 같은 사람 정도만 비교적 점잖을 뿐이지, 거개가 서림과 종자가 다른 야생의 인간들이다. 곽오주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것만 봐도, 조금만 수틀리면 꺽정이 허락 없이도 서림이를 죽이고도 남을만한 위인들이 청석골 두령들이다. 이렇게 호랑이들이 득실대는 소굴에서, 그가 청석골의 모주(謀主)로써 장악력을 발휘한 것은 냉철한 상황분석과 감정을 다스리는 역량 덕분이다. 이미 그는 청석골에 흐르는 게임의 법칙을 몸으로 터득하고 있다. 꺽정이를 비롯한 두령들의 성격을 파악하고 좀처럼 거스르지 않는다. 청석골이라는 게임에 접속하는 순간, 그 룰에 적응하지 않고선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청석골의 룰? 한마디로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짐승남’들의 법칙이다. 도망가는걸 죽기보다 싫어하고, 자존심을 뭉개면 상대가 누구든 달려든다. 이런 점을 누구보다 서림은 잘 알았기에 게임의 룰은 지키되, 합리적 계책을 내놓아도 상중하책으로 꾸몄던 것이다. 게임의 속성을 잘 이해하는 서림 특유의 합리적 판단이 엿보이는 지점이다.

 

서림이가 게임에 임하는 원칙은 간단하다. 승산 없는 싸움은 좀처럼 하지 않으나, 일단 싸우게 되면 목숨을 건다. 송악산 대왕당에 그네뛰기 하러 가서, 관군에 포위되어 오도가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서림의 감춰진 포스가 작렬한다.

 

지금 안식구들을 끌구 업구 도망하다가는 창피만 더 볼 께니까 여기 앉아서 당할 도리를 생각합시다. 하고 잠깐 동안 양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기울이고 있다가 , 인제는 칼 물구 뛰엄뛰기니 세 분은 아무 소리 말구 나 하자는 대루 하시우.하고 말하는데 세 사람은 모두 잠자코 있었다. - 임꺽정 8권 p79

 

겁쟁이라 몰아붙이던 황천왕동이도, 되바라진 배돌석이도, 힘이 장사인 길막봉이도 말 한마디 못하고 서림이의 뒤를 졸졸 쫓는 모습에서 그간 서림의 이미지가 확 깬다. 여기에 더해 상궁을 볼모로 붙잡고 두령들과 얘기하며 “우리가 죽게 되면 고기값이라두 하구 죽을 준비를 차리구”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마침내 깨달았다. 서림, 알고 보니 짐승남 이었어!! 가냘픈 외모의 남자가 옷을 찢어발기며 근육질의 몸매를 선보이는 것마냥 이 반전은 꽤나 신선했다. 송악산에서 무사히 탈출한 후, 소원한 사이였던 황천왕동이, 배돌석이, 길막봉이와 절친은 되지 않았을망정, 그들이 서림을 인정하는 마음이 든 것은 두말할 것 없었다. 단지 계책의 신통함뿐 아니라, 서림의 숨겨져 있던 배짱에 놀라지 않았을까 싶다. 아쉽게도 그들이 더욱 가까워질 기회는 더 생기지 않아 유감이었지만, 쩝!

 

승부사를 빛내는 중저음의 미학

 

서림의 승부사적 기질을 돋보이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목소리다. 나직하나 똑똑한 말투는 서림 특유의 것인데, 그 백미는 포도청에서의 심문 장면이다.

 

서림이가 포교들의 잡아 꿇리는 대로 부장청 계하에 꿇어앉아서 대장을 치어다보니 중간에는 포도부장 한 사람이 화로를 끼고 앉았고 옆에는 서원인 듯 지필을 앞에 놓고 앉았다. 부장이 굽어보며

“묻는 말을 바루 대지 않으면 당장에 초주검을 시켜놓을 테니 그리 알아라!”

하고 첫마디에 으름짱을 놓는데, 서림이가 목소리는 나직하나 분명한 말로

“아는 일이면 다 이실직고 하옵지 일호라두 기망할 길이 있소이까”하고 대답하였다. 임꺽정 9권 p203

 

중저음의 톤으로 나직하게 말하는 모습에선 소름이 끼치다 못해 섹시하기까지 하다. 대개 마음이 급해지면 말도 빨라지는 게 예사인데, 서림이는 그 반대니 이렇게 냉철할 수가! 마치 알 파치노와 조니 뎁을 섞어놓은 느낌이랄까? 음성이 중요한 이유! 아무리 멋진 말이라도 웅얼거리면 먹힐 턱이 없다. 서림이의 구변이 잘 통한 것은 내용 자체도 무척 합리적이지만 그의 목소리, 말하는 방식도 톡톡히 한 몫 한 것 같다. 아마도 서림이는 낭송을 무척 잘했을 것 같다. 그래서 생각이 조리 있는 건가?

 

골계(滑稽)로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

 

승부사라고 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을 떠올리기 쉬우나, 서림이는 그런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김산이는 서림더러 ‘표리부동한 자’라고 비난하나, 그 속을 어떻게 알랴? 언제나 말하기 전에 빙그레 웃고, 풍류에 조예가 깊어 기생들을 비롯해 심지어 피리의 명인 단천령과도 수월하게 농담을 주고받는다. 심지어 살살(!) 눈웃음도 칠 줄 아니 꼬.. 꽃미남? 상황판단이 빠르고,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며, 게임의 법칙을 이해하니 이것만으로도 고수라 불릴 만하나 진정한 타짜는 게임을 즐긴다. 서림이 게임을 즐기는 방식은 바로 우스개다. 오가를 필두로 모두들 한 이야기꾼이고 우스개를 즐기나 서림도 만만치 않은 농담 실력(?)이 있다. 다만 뼈있는 농담, 즉 골계라 할까? 곽오주와 견원지간마냥 만나기만 하면 설전을 벌이고, 하도 미운 나머지 군율에 얽어 죽이려고까지 마음먹었으나 나중에는 대처하는 법이 달라진다.

 

“알 까닭 있소. 지금두 안 왔느냐구 말하니까 여러 형님네꺼지 날 속일라구 시침들을 떼구 있었소. 모두들 서종사 물이 들어서 사람들이 변했어.”

곽오주 황천왕동이 두 사람의 수작을 다른 사람들은 그저 웃고 듣고 서림이는 곽오주의 나중 말을 탄하여

“내 몸에는 왼통 곽두령의 잇자국이 백혔소. 하루 한 번이라두 그예 씹히니까”하고 깔깔 웃었다. - 임꺽정 8권 p106

 

농담이지만 날이 바싹 서 있다. 어차피 죽일 수도 없는 거 시원하게 대놓고 씹는 맛이 일품이다. 곽오주는 아예 드러내놓고 서림을 미워하는 사람이라, 걸핏하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다. 이에 스트레스 받을 법도 한데 그걸 받아 치는 솜씨가 만만치 않다. 그러다 보면 미운 정도 들법한데, 하긴 그 둘이 친해지는 건 도무지 상상하기 어렵다! ‘오가 열남’ 얘기는 더 기막히다. 오가의 마누라가 죽고, 오가가 상심하는 것을 보고선 하는 말이 “남편 죽는 데 따라 죽는 여편네를 열녀라구 하니 아내 죽는 데 따라 죽는 사내는 열남이 아니겠습니까. 오두령이 박두령의 해살루 죽지는 못했어두 그만하면 열남으로 치구 정문을 세워줘도 좋지 않겠습니까?” 이름하여 열남문! 청석골에서 종사관으로서 언뜻 지위가 높아 보이나, 언제 꺽정이의 비위를 거스를지 모르고 다른 두령들의 눈치를 봐야 하니 그 고달픔이 없었을까? 그런 스트레스를 뼈있는 우스개로 풀 수 밖에 없었으랴 생각하니 문득 서림이가 달리 보였다.

 

지극히 섬세한 혹은 소심한

 

서림이는 생각이 깊은 만큼 세심함이 몸에 밴 사람이다. 그래서 곽오주 같은 사람과는 천성적으로 상극이다. 생각과 행동이 거의 동시에 이뤄지는 이들과 몇 수 앞까지 내다보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 미련퉁이 혹은 불여우라 부를 것이다. 박유복이 정도가 속이 깊은지라 서림이를 좀 위해주고, 오가와는 말상대가 되기에 그럭저럭 어울리나 나머지들은 서림이와 다른 배치의 존재들인 게다. 이런 존재들이 어우러져 한 패거리를 이루는 것 자체가 신통한 일이나, 그들은 그저 물리적인 결합에 머물렀다. 진짜 어우러지려면 생활을 함께해야 하는데, 여기서 생활이라 함은 오늘날의 함께 먹고 자는 것 이상의 의미였다. 말하자면 결의를 맺어야 마침내 한 동류로 인정받는데, 형제결의의 의미를 한온이가 한 말에서 추측할 수 있다. “같은 두령이로되 예닐곱 사람처럼 사생동고할 의리가 업는 터인즉 함께 몰사죽엄을 당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한온이도 서림이 못지않게 머리회전이 빠른 사람이지만 형제 결의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래서 배돌석이가 형님 동생하는 꺽정이 유복이를 보며 부러워한 것이 까닭이 있다.

 

형제 결의의 순간에 서림이는 누구보다 먼저 찬성의 뜻을 밝힌다. 이것이 또 무슨 수를 쓰나 생각할 수 있으나,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서림이가 평정심을 잃는 순간이라는 점이 재미있다.

 

서림이가 맨 먼저 좋다고 말하고 그 뒤에 다른 두령들도 모두

“좋지.”

“좋겠지.”

하고 말하는데 곽오주는 좋다 싫다 말이 없어서 돌석이가 오주더러

“자네는 왜 말이 없나?”하고 물었다. 이면 없는 오주가 서림이를 빤히 바라보며

“서장사가 끼이면 나는 빠지겠소.”

하고 대답하여 서림이는 한동안 얼굴을 붉히고 있다가

“내가 빠질 테니 염려마우.”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웃었다. 임꺽정 6권 p366

 

나중에 박유복이가 함께 가자고 이끄나 입으로는 거절하면서도 ‘같이 가자는 말이 나오기를 바라는 눈치로 꺽정이의 입을 바라’본다. 허, 그것 참! 그냥 가고 싶다고, 형제 결의 맺고 싶다고, 왜 말을 못해? 소심하기 그지없다. 이런 세심한 남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꺽정이가 오금을 단단히 박는다. “우리하구 같이 가서 결의하는 절차나 좀 일러 주구려.” 결의 맺자는 것도 아니고 고작 절차나 알려 달라고? 여기서 서림이 완전 삐친다. ‘갑자기 앞이마에 손을 대며 “나는 머리두 아프구 일찌거니 자겠으니 속히들 갔다오시우.” 말하고 뒤로 물러앉았다.’ 승부사적 냉철함과는 거리가 먼 이 감수성! 그러나 말 그대로 이면 없는 꺽정이와 두령들은 (박유복이 제외하고) 싫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빈말이라도 더 권하지 않는다. 정말 그들답다! 무척 단순한 곽오주이기에 그만큼 한방에 친해지기도 쉽다. 그러나 서림이는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기에 그들의 결합은 이뤄지지 않는다. 그냥 여기선 단 한마디가 필요했을 뿐이다. 꼭 한번 하고 싶었어요.. 의형제. 솔직했으면 아마 곽오주와 서림이는 극과 극의 지점에서 콤비가 되지 않았을까? 만나면 맨날 싸워도 서로 보완해주는 그런 환상의 콤비 말이다. 팔자는 이렇게 고치기 쉬우면서도 한량없이 어렵다, 쩝!

 

승부사적 기질도 있으나 내면으로는 섬세한 인간! 서림에게서 무리에서 떨어져 홀로 움직이는 시라소니가 연상된다. 왜냐? 무리와 어우러지기에는 너무 조심성이 많기 때문이다. 조심이 지나치면 그만큼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영역이 좁을 수밖에 없다. 내가 마음을 안 여는데 누가 나를 받아주랴? 서림이가 춘동이를 의심하는 것을 김산이가 불쾌하게 받아들이니 “우리네는 매사에 조심을 해야 할 처진 까닭에 아무리 아이 쩍 동무라두 속을 선뜻 줄 수가 없단 말이지. 김두령 친구가 미덥지 못한 사람이란 말이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에서 그의 지나온 일생이 짐작된다. 매사 조심스럽게, 그것이 지나쳐 간교하다는 말까지 들으며 한 인생을 헤쳐온 신산함이 느껴진다.

 

욕망의 변주

 

청석골에 합류하며 서림이는 적어도 승부수를 던졌다. 아내에게 이르길 ‘나는 설혹 잡혀 죽더래도 그대는 남매 데리고 도망해 나가서 구명도생 해야 해’라고 하며 죽을 각오를 다진다. 그러나 꺽정이는 극히 귀하며 극히 천한 상을 입증하듯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이고, 가짜 금부도사 계략과 임진나루에서 새로 부임하는 윤지숙 봉변 주는 일이 연달아 실패하며 서림의 입지는 급격히 줄어들지 않았나 싶다. 이때의 심리가 은연 중에 드러난 것이 박연중이 평을 할 때라 생각된다.

 

‘여러 두령이 꺽정이 사랑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중에 박연중이의 처신하는 것이 이야깃거리가 되었는데, 서림이가 명철보신이라고 칭찬하다가 꺽정이가 후기 없는 늙은이의 일이라고 타박하는 바람에 그렇다고도 할 수 있다고 우물쭈물 자기의 말을 거두어치웠다. 임꺽정 9권 p160

 

박연중이 누군가? 한때 운달산패의 괴수로 당대 세도가인 남곤과 심정을 벌벌 떨게 했으나, 지금은 은퇴해 농사지으며 유유자적 보내는 인물이다. 명철보신이란 한마디로 나아가고 물러섬을 현명하게 판단하는 것이다. 서림이가 꺽정이를 만나 팔도정복을 부추기는 장면에서 그의 욕망은 진정 팔도정복이었으리라. 꺽정이라는 거대한 힘을 이용해 자신의 영달을 꾀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이 욕망은 차츰 변해간다. 꺽정이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닌데다, 주위 두령들의 견제도 장난이 아닌 것이다. 이후 꺽정이의 오입질에 이은 영웅호색 논란으로 죽을 뻔하고, 꺽정이가 혜음령패 정상갑이와 최판돌이를 때려 죽일 때 이미 팔도정복의 꿈은 접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어쨌든 살아야지!

 

팔도정복에서 명철보신으로 단숨에 욕망의 배치가 바뀌는 것은 서림이의 특이성이다. 대체로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은, 그것을 어떻게든 채우려다 화를 당한다. 서림이가 특이한 것은 자신의 욕망을 고집하고 않고, 자연스럽게 변화를 받아들인다는 데 있다. 말이 쉽지, 자신이 갖고 있던 욕망을 흩어뜨리고 새로운 배치를 조성하는 건 쉽지 않다. 승부사는 지난 승부에 연연하지 않는다는데, 그런 의미에서 서림이 이에 꼭 맞지 않을까? 결과가 배신으로 끝나 모양새가 좋지는 않았으나, 어차피 서림이는 다른 길을 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배신하지 않고 자기 길 갈 것을 꺽정이와 두령들이 가만 두고 보았을까? 조직에서 발 빼기는 쉽지 않다! 어쨌든 맺은 인연이 정리가 되려면 어떤 계기가 필요한데, 그게 배신이라는 뜻하지 않는 형태로 드러난 게 아닌가 싶다. 한바탕 게임을 즐기다 간 서림. 그의 다음 게임은 어떤 것일까?_(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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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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