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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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알베르 카뮈 (민음사,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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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소도시와 페스트라는 대재앙

재난 블록버스터 영화는 대개 메트로폴리스를 배경으로 삼는다. 지진, 화산폭발 같은 자연재해나 고질라, 킹콩 같은 괴수, 이름 모를 바이러스의 출몰은 대도시에서 그 파괴력이 곱절로 늘어난다. 시각적 스펙터클의 화려함과 함께, 때려부수고 박살낼수록 영화의 오락성과 몰입도는 강렬해진다. 이에 반해 카뮈의 ‘페스트’는 알제리 북부의 소도시 ‘오랑’이라는 곳이다. 연대기의 서술자가 강조했듯이 지극히 평범한 장소이다. 평일에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일하고, 주말에 영화관람, 트럼프 게임 등을 즐긴다. 그냥 우리들 사는 모습과 별다를 게 전혀 없다. 그럼 소돔과 고모라처럼 향락에 빠져 타락해 신의 분노를 일으키는 인간들이 사는 곳이란 말인가? 그렇지도 않다.

다행히 서술자는 약간의 힌트를 남겨 두었다. 한 도시를 알기 위해서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랑하고 죽는지 살펴보면 된다는 한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오랑의 주민들은 권태에 절어 있다. 그 정도는 다른 도시마다 조금 더 한듯하다. 우선 계절의 변화를 사람들은 느끼지 못한다. 기껏해야 시장에서 꽃을 파는 걸 보고 봄이 왔다고 느끼는 수준이다. 서술자는 그러한 특성을 낌새가 없다고 표현한다. 어떠한 낌새, 즉 변화의 조짐도 없는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상태라 할까. 요컨대 반복만 있고 차이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면 지루하겠으나, 그것조차 익숙해지면 그런대로 살만하다. 습관에 쉽게 길들여지는 것은 인간의 특성이니까. 덕분에 오랑 주민들은 권태마저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그럭저럭 살아간다.

낌새가 없다는 말은, 권태를 향해 조금이라도 변화를 주려는 의지가 없음을 뜻한다. 조금 심심해도 그럭저럭 살아갈만하니까. 이게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천만에 별 문제는 없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마음은 살아갈만해도 몸이 요동을 친다. 몸은 어떻게든 움직여야 살 수 있다. 오래 누워있고 싶어도 허리가 아파 일어나야만 하는 것은 몸이 도무지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랑 인들은 아마도 억울하고 의아해할 것이다. 왜 우리처럼 평범한 도시의 사람들에게 페스트라는 어울리지도 않는 대재앙을 안겨준 것이냐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페스트가 거대한 추상으로 느껴지는 것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지금까지 너무 오랫동안 오랑 사람들은 변화 없는 습관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오랜 시간 등을 땅에 대고 누워 있는 통에, 등판에는 악성종기가 생겨 고름이 막 터져 나오기 직전이다. 오랑의 고요함과 평범함은 실은 끈적끈적하게 엉겨 붙은 어혈(瘀血)이며 꽉 막힌 기체(氣滯)였다. 페스트는 신의 분노도 아니요, 이전과는 다르게 살라는 좀 강렬한 낌새였다. 낌새가 사라진 도시에서 오래간만에 조짐이 나타나려니 그 과정이 순탄할 리는 없지 않겠는가? 증상을 오래 묵히면 상처가 폭발적으로 터져나올 수 밖에 없다.

문제는 페스트를 어떻게 겪느냐가 관건이었다. 불행히도 오랑 사람들은 일반적인 패턴을 그대로 보여준다. 페스트가 선포되고 외부로 통하는 관문이 폐쇄되자 주민들은 패닉 상태에 빠진다. 이때부터는 우울과 쾌락의 양극단만이 존재할 뿐이다. 사람들은 생이별에 고통 받으면서 도무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것뿐이라는 양, 목적 없는 산책과 부질없는 유희의 되풀이, 혹은 과거로 돌아가면 좋겠다는 과거 회귀의 심리에 빠져든다. 자기 자신의 고통에 홀로 매몰되어 깊숙이 침잠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이야말로 기회는 왔다는 듯이 향락을 추구했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기간에 맞물려 유흥 산업은 그에 못지 않게 번성한다. 영화관은 새로운 필름을 구할 수 없어 똑 같은 영화를 반복해 상영해도 관람객은 줄지 않았다. 거리에 즐비한 카페 테라스에는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고 술집의 술은 동이 났다. 병에 걸리면 사람들이 보이는 패턴은 대개 이렇다. 자신의 고통을 과장해 끝도 없는 우울 속에 빠져들거나,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쾌락에 탐닉한다. 두 가지 양태는 서로 극단에 서 있으나, 모두 자기파괴적인 행위라는 데에는 일치한다.

페스트가 기존의 습관에 질문을 던져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내는 요인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을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오랑 시 전체는 방황하는 망령으로 거리를 가득 메웠고, 전반적인 포기 상태는 그들을 더없이 줏대 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페스트를 자신들이 원래 지니고 있던 습관, 즉 권태를 더욱 합리화하는 것으로 흡수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페스트에 걸리는 것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죽은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신속히 축축한 땅속에 매장되지만, 살아있는 자들은 죽은 자 못지 않게 생기 없는 모습으로 거리를 배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우정을 나눌 힘조차 상실한 그들이야말로 살아있는 시체였다. 그렇게 되는 것은 차라리 손쉬운 일이다. 그냥 마음을 놓아버리면 그만이니까.

 

페스트에 맞서는 방식

페스트 환자가 되는 것만큼,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은 보다 피곤한 일이다. 그것은 자신의 견고한 습관과 맞서 싸워야 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페스트의 연대기는 그런 사람들로 인해 쓰여졌다. 여기에 등장하는 리유, 타루, 그랑은 각기 다른 개성을 보이지만,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그들 모두가 언어를 다룬다는 점이다. 의사 리유는 연대기를 이끌어가는 화자이다. 그는 어떤 계기에 의해서 이 연대기를 쓰게 되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의 친구인 타루와 그랑의 영향으로 추측된다. 페스트가 오랑을 덮치고,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리유는 성실하게 자신의 직분을 다한다. 강인한 그조차 페스트의 위력에 몸서리칠 때, 안도감을 얻은 곳은 다름아닌 그랑이었다.

50대 공무원인 그랑은 강인함과는 거리가 먼 늙은이다. 낮엔 시청에서 서기 일을 하고, 밤이면 자신의 비밀스런 작업을 위해 총총히 집으로 향한다. 그의 비밀스런 취미는 글을 쓰는 일이다. 그는 용어의 선택에 극도로 신중함을 보인다. 예컨대 약속이나 권리 같은 단어를 쓰는 것에 망설인다. 그 단어의 무게를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지 거듭 고민한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으면 쓰지 않는다. 덕분에 그가 쓰고자 하는 글은 상당히 지연되기 일쑤다. 한 문장을 써나가는 것조차 신중을 기하기 때문이다. 타루는 어떤가? 타루는 인간의 모든 불행은 정확한 언어를 쓰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상에는 너무도 불명확한 언어가 남발되고 있으며, 그 언어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은 정신을 잃는다. 그가 오랑의 주민들을 관찰한 수첩은 되도록 자신의 의견이나 주석을 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리유는 그들에게서 어떤 영향을 받았으며, 그것이 습관과 싸우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인가?

리유는 연대기 도입부에 서술방향을 짤막하게 피력한다. 그것은 되도록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의견을 섞지 않고, 자신이 본 것만 있는 그대로 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페스트라는 재앙의 한복판에서, 사람들은 시련을 극복하는 영웅의 이미지를 구한다. 이것은 오랑을 둘러싼 외부의 시선에서 확인된다. 오랑을 바라보는 바깥 세상은 그들을 시련을 겪는 거룩한 영웅으로 덧칠한다. 이는 사물을 대하는 인간의 욕망이자 습관이다. 그러한 패턴을 리유는 거부한다. 페스트가 휩쓸고 있는 장소에 머물러있으면, 그에 맞서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인 것이다. 포장하고 미화하려는 습관으로 인해, 우리는 진정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탈한다. 페스트의 연대기가 흔해 빠진 영웅담으로 쓰여졌다면 사람들이 거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단 말인가? 위대한 인물이 나타나 수렁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는 식이라면,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으리라. 결코 스스로 나서서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하거나, 고착되어 있는 습관을 바꿀 필요성을 느낄 수 없게 될 것이다. 스스로 구원하지 않고, 외적 존재에서 구원을 바라는 요행수, 그것이야말로 ‘영원한 패배’이다.

상상해보라, 페스트는 전쟁터처럼 전후방을 가리지 않으며, 당신이 퇴근하기를 집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오랑의 주민들이 불안과 절망, 향락과 우울을 롤러 코스터처럼 오가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들 속에서 정신을 차리고 있는 리유, 타루, 그랑 같은 이들은 특별한 인격이라서 그런 걸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페스트 보다 더한 무기력, 습관과도 같은 절망에 빠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글을 쓰는 것은 무척 피곤한 일이다. 더구나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쓰기에 더욱 어렵다. 그럼으로써 적어도 페스트라는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는 있다. 리유가 영웅주의를 부정하고, 오직 필요한 것은 각자 직분에 대한 성실함을 말하는 까닭이다. 성실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살아가는 것, 각자의 자리에서 일상을 내팽개치지 않은 주인공들이 모두 언어를 다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생업에 종사하고, 보건대 일을 하며, 저녁에 각자의 연대기 혹은 수첩기록, 비밀스런 작업에 몰두한다는 것. 그게 향락에 빠지고 목적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것보다 더 일상적이고 자연스럽지 않은가? 왜 병에 걸리면 평소에 안 하던 짓을 그렇게 하는가? 그것도 병을 부추기는 파괴적인 방향으로 말이다. 도무지 자연스럽지 않다. 병에 걸리거나 걸릴 것 같은 위험에 처해도, 평소처럼 성실히 생활한다면 정신 줄을 놓지 않고, 더욱 회복이 빠르지 않을까? 회복한다는 것은 이전 상태로의 복귀를 뜻하지 않는다. 중병을 앓으면 깨닫는 바가 있다고 하는데, 오랑의 주민들이 페스트 이후 어떤 가르침을 얻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페스트의 연대기가 남았다는 사실이며, 그 기록은 인간 정신의 면역능력을 업그레이드 하는 데 보탬이 되리라. 만약 연대기의 저자들이 사심을 섞어 자신들의 보건대에서의 행위 등을 영웅적으로 미화했다면, 그조차 무의미했을 것이다. 글 쓰는 작업은 그들 세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는 모종의 기능을 담당했다. 스스로를 재앙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붙잡아주는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던 것이다.

 

새로운 질서의 출현

랑베르 이야기를 해야겠다. 신문기자로 오랑에 취재하러 온 그는 페스트가 발생하자 꼼짝없이 발이 묶인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억세게 재수 없게 된 셈이다. 잠깐 취재하고 돌아갈 곳에 하필 페스트가 발생하다니! 게다가 바깥에는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아리따운 애인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안달 난 랑베르는 오랑을 탈출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모색하고, 거의 성공 직전까지 이른다. 그런데 막판에 포기하고 리유와 타루, 그랑이 활동하는 보건대 조직에 합류한다. 그저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가는 게 남부끄러워서 일수도 있으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리라. 그는 리유 등에게 친밀감을 느꼈던 것이다. 우정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들을 떠나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양심에 큰 걸림돌은 되지 못한다. 이건 이른바 묘한 우정이다. 리유가 그랑에게 안도감을 느끼고, 리유와 타루가 서로 왠지 이 사람에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그런 관계의 장에 들어가 있다.

페스트는 기존의 관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인연을 형성했다. 페스트가 발생하자 처음 오랑의 주민들에게 닥친 감정은 생이별의 체험이었다. 어느 날 문득 시의 관문이 폐쇄되자마자, 바깥에 잠시 나가있던 가족, 연인들과 헤어지는 경험은 그들에게 크나큰 고통이었다. 전염병이 닥치면 실제로 있을 법한 일이지만, 상징적으로 보면 이건 기존의 관계망을 재점검하라는 메시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끊을 관계는 끊고, 정리할 건 정리하고 그 과정에서 괴로움은 충분히 예상되는 바이다. 그때 새로운 관계를 다시 만드는 데 눈을 돌릴 건지, 아니면 흘러간 인연에 매달리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분명한 것은 지나간 관계에 집착한다면 오랑의 주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기대와 절망, 공허와 향락의 극단만을 정처 없이 배회하게 될 뿐이다.

묘하게도 보건대의 주요 인물인 리유, 타루, 그랑, 랑베르의 공통점 중 하나는 그들 모두 아내가 없거나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독거 노인들의 기이한 연대! 이건 페스트에 맞서 싸우기 위해 모인 정의감에 불탄 자들의 조직이 아니다. 그런 말은 거창하기 짝이 없다. 페스트에 맞서는 것은 당시 상황에서 지극히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일이다. 왜 병에 걸리면 절망하고 일상을 내팽개치는 것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질병에 대응하며 평소처럼 살아가는 건 어색하게 느끼는 걸까? 리유가 처음에 그랑을 보고 그는 페스트와 천 리는 떨어져 있다라고 여긴 것처럼 말이다. 어쨌든 랑베르가 리유 등과 함께 한 것은 그들과 지내는 게 아무래도 좋았기 때문이다. 가족, 연인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다. 지금 내 주변에 끌리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좋은 방법이다. 랑베르는 멀리 떨어져 있는 아름다운 것 같은 연인 보다, 눈 앞에 있고 지금 살을 부대끼고 있는 남자들과 겨울을 보내려 한다. 그게 그의 행복을 위한 선택이었다. 가족과 연인으로 환원되는 행복을 뛰어넘는 새로운 연대의 탄생! 페스트는 행복에 대한 습관적인 표상마저 대체 가능한 그 무엇으로 만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랑베르가 그것을 증명했다.

 

페스트는 내 안에 있다

페스트 연대기를 쓴 리유는 강철 같은 인물이다. 그가 보여주는 태도는 의사의 직분에 있어 이상적인 모범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한편으로 그의 행동은 지극히 의사라는 어떤 고정된 표상에 얽매여 있다는 느낌이 든다. 리유는 참 성실하다. 지치지 않고 끝까지 환자를 돌보며, 자신의 목숨은 나중으로 여긴다. 다 좋다, 그런데 그 과정이 무척 기계적으로 느껴진다. 페스트가 오기 전, 그는 오랑에서 구세주였다. 알약 세 알과 주사 한 대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고, 환자의 가족들은 문밖으로까지 나와 그를 극진히 배웅했다. 그런데 페스트가 닥친 후에는 이 모든 기존의 구도가 무너진다. 환자의 가족들은 더 이상 그를 구세주로 여기지 않는다. 리유는 혼란스럽다. 혹시 리유는 자신의 사회적 역할모델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는 않은 건가? 그렇다, 그 역시 자기의 고정된 습속에 빠져있던 것이다. 페스트가 그것을 마침내 터트렸다.

알약과 주사 따위에 페스트는 코웃음치고, 의사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속수무책, 무기력한 구세주! 배웅 나오는 대신, 그가 집안으로 못 들어오게 막아 섰고 옥신각신 눈물과 고함, 절규가 뒤섞인 난리가 한바탕 몰아친다. 페스트 이후에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그는 병을 치료하는 의사라기보다, 시체를 치우는 장의사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환자의 가족들은 리유를 마치 페스트마냥 집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으려고 악을 썼다. 리유는 스스로 그런 광경을 추상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어찌 이런 광경을 예상이라도 했겠는가? 구세주의 몰락 속에서 그가 굳게 믿어오던 역할에 대한 표상은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 그는 그저 누구보다 열심히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였다. 그게 죄란 말인가? 그럴 리가 있나. 그런데 비현실적인 추상이 닥친 이상, 그 추상과 대항할 새로운 현실을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 리유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의사의 역할모델을 다시 써야 했다. 이 괴롭고 이해 불가한 추상과 싸우기 위해서 말이다.

리유가 페스트의 연대기를 쓰기로 결심한 것은 그런 까닭이다. 아직 리유는 자신의 표상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그게 오죽 어렵겠는가? 단번에 자신이 지니고 있던 습속을 버린다는 건 말이 쉽지, 실제로는 어렵다. 그렇다고 시도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리유는 역시 성실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일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기로 마음 먹는다. 당장 자신을 바꾸지는 못해도, 지금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들여다보기로 한 것이다. 뭣도 모르고 그저 결심만 하고, 작심삼일 하는 것보다 훨씬 정직한 선택이다. 아마도 그는 페스트가 지나간 이후, 새로운 의학관(觀)을 얻었으리라. 자신이 지니고 있던 알약 세 개와 주사 한 대의 표상을 무너뜨리고, 병을 그저 고치는 일이 만사 Ok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또한 오랑 주민들의 양극단을 오가는 자기파괴적 행태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질병 치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인간의 욕망과 생로병사에 대한 통찰임을 깨달았으리라. 그것이야말로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우리 안에 내재해있는 페스트와 맞설 수 있는 양생의 비법이자, 영원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질병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_(끝)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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