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포스티노
감독 마이클 래드포드 (1994 / 이탈리아)
출연 필립 느와레, 마씨모 트로이시, 린다 모레티, 마리아 그라찌아 꾸치노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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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포스티노'를 다시 보았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합니다. 음악시간 이었지요. 그때 우리 음악 샘은 지금 생각해보면, 참 핸섬한 분이었습니다. 강마에 같은 까칠함은 없었지만, 부드러운 예술가의 기질이 철철 넘쳐 흘렀던 것 같습니다. 음악 샘이 문득 떠오르는 이유는, 그분과 영화 '일 포스티노'가 관련이 있기 때문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혈기왕성한 고딩들에게 차분함을 바라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하루는 음악 샘께서 우리를 음악실로 집합해 놓으시곤, VTR을 이리저리 조작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오늘 수업 안하고, 영화 본다~ 하며 그냥 신나 했지요. 그런데 화면에 나오는 것은 기대했던 액션, 스릴러, 에로 (?) 영화가 아니고, 느릿느릿한 배경음악이 흘러나오고, 칙칙한 외국의 시골 풍경이었습니다. 게다가 할리우드 미국영화도 아닌 듣도 보도 못한 이탈리아 영화라니!

'일 포스티노'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전반적으로 느립니다. 아이들의 주의를 끌만한 요소가 그닥 없지요. 아니나 다를까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음악실은 술렁거립니다. '아.. 지루해..', '아 뭐야, 졸려..' ^^
그런데 이런 초반의 술렁임이 영화가 끝날 즈음에 어떻게 변했는지 아십니까. 졸린 눈은 휘둥그레해졌고, 아이들은 너무나 큰 충격으로 또다른 술렁임에 빠져버렸지요. 진심으로 말하건대 실화입니다. ^^

저는 좋은 영화가 주는 신선한 충격을 언급할 때, 이 경험을 떠올립니다. 그 영화를 보던 모든 학생이 다 같은 마음은 아니었겠지만, 대부분의 친구들이 놀라던 기억이 납니다. 그들 스스로도 지루해 보이기만 했던 영화가 자신들을 이런 감동으로 인도할 수 있음에 놀랐던 것이지요.

옛 추억을 더듬으며, '일 포스티노'를 다시 봤습니다. 영화에서 시인 '네루다'는 우편배달부 '마리오'에게 말합니다.

'이봐, 마리오. 자네의 고향의 자랑거리를 말해보게나.'
'자랑거리요..? 글쎄요..'
한참 고민하다 마리오가 말하지요.
'베아트리체 루~우소.'

베아트리체는 마리오가 짝사랑하던 동네 처녀였습니다. 고향의 자랑거리를 딱히 생각해 본적 없는 그는 좋아하는 여자의 이름으로 대신하지요. ^^
멋진 선물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네루다가 고국 칠레로 떠나고, 마리오는 네루다에게 줄 선물을 준비합니다. 바로 그의 조국인 이탈리아의 아름다움을 소리로 담지요.

작은 파도소리, 큰 파도소리, 절벽에 부는 바람, 나뭇가지에 부는 바람, 아버지의 서글픈 그물, 신부님이 치시는 교회의 종소리,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곧 태어날 아들 파블리토의 심장소리..

이 장면을 보며, 저 역시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런 선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이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와 소리의 장소를 함께 기억해주기를 바랍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지난 주에 사랑하는 사람이 다녔던 학교 캠퍼스에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그 이가 학창시절을 보낸 그 곳을 천천히 걸으며 상상했습니다. 그 이가 걸었던 운동장, 살았던 기숙사, 밥먹은 식당, 공부하던 강의실.. 그 이와 함께 간 것도 아니었지만, 그 사람이 내 곁에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상상과 그리움의 위력은 참으로 큰가 봅니다. ^^

지금처럼 싱그럽게 미소지으며 캠퍼스를 누비는 그 이의 모습이 떠올라, 학교를 돌아보며 내내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에게 보여주려고 사진 몇 장을 찍었습니다. 학창시절을 추억하게 하고 싶었지요. '일 포스티노'의 마리오가 이탈리아의 소리를 담았듯이요.

...

오랫만에 한겨레21을 읽었는데, 여기에도 괜찮은 선물 방법이 소개되었습니다.

편의점에 있는 12월 20일치 중앙일간지와 스포츠지 전부와 주간지까지 몽땅 계산대에 내려놓으니 곱게 생긴 아르바이트 아가씨가 이상하게 쳐다보며 "이거 다 사시게요?" 한다. "네!"
5만원 가까이  돈을 지불하고 집에 와서 <한겨레21>과 <씨네21>까지 보탰다. J가 출근하면 이걸 전해줄 것이다. 내가 직접 나무로 만든 '장난감 기차'와 함께 명서의 20살 생일선물로 주라고...
10년 전 딸아이 돌 때 무슨 선물을 할까 고민했다. 그때 생각해낸 것이, 신문 1면의 서해교전 소식이었다. '내가 한 살 때는 세상이 이랬구나.' 감동의 선물이 될 것 같아 1999년 6월 12일치 일간지와 잡지를 보관하고 있다. 10년 뒤 아이에게 생일선물로 줄 것이다. 아이의 반응이 궁금하다. 지인들 출산일을 기억하며 이렇게 신문을 선물한다. <한겨레21 742호 류우종 기자>

아이 생일에 선물해도 좋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기념하고 싶은 날에 선물해도 좋겠습니다. 이를테면 처음 연애를 시작한 날, 그 날치 신문을 다 사놓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 날을 기억하자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희노애락이 공존했다고.. 세상을 잊지말고, 함께 열심히 사랑하며 세상을 좀더 밝게 만들어 보자고 멋있게 (?)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

...

정리.

(1) 사랑하는 이의 추억의 장소를 방문해, 그 곳의 풍광을 담는다. 녹음해도 좋고, 사진을 찍어도 좋다. 형식은 상관없다. 좀더 적극성이 있다면 그 장소의 주변 인물들을 인터뷰 할 수도 있다. (학교 캠퍼스의 수위 아저씨, 교수님 등)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이의 소중한 기억을 나 역시 소중히 다룬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 이에게 보여주어 함께 즐겁게 나누면 된다.

효과 : 추억의 장소를 취재하며 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이해의 마음이 깊어진다. 그 사람도 그 이만의 인생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재미있다. 얼마나 설렌지 모른다.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 떠나는 흥미진진한 모험이다. 예전 삼국지를 즐겨 읽었는데, 그때 곧잘 떠올린게 삼국지의 영웅들이 활개친 중국대륙을 직접 방문하는 상상이었다. 영웅들이 숨쉰 공간에 내가 있다니..! 어찌나 가슴 떨리던지..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2) 신문 선물하기. 문득 내가 태어난 해 몇 십년 전의 신문, 잡지를 지금 생일선물로 받는 상상을 해본다. 그때도 참 많은 일이 있었을테고, 새삼 나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될 것 같다. 무엇보다 희귀한 옛날 신문, 잡지를 보며 낄낄거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선물을 해준 이의 마음 씀에 감탄할 것이다. 조금 센스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냥 통째로 신문, 잡지를 건네기보다 나름 편집 (?) 할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기쁜 소식만 추려내어, '기쁜 일을 전해주려고 네가 태어났구나.'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

효과 : 선물 받은 사람은 나와 내 주변 세상의 연관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덤으로 역사 공부까지 될 수도.. ^^ 선물 주는 사람은 꾸미기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선물할 수 있다. 사진만 오려 사진첩을 만들 수도 있고, 주제별로 분류해 역사신문을 제작할 수도 있다. 이 외에도 아이디어를 떠올리면 많지 않을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낭만스런 방법으로 선물하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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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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