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케포이필리아? 이름부터 낯설다. 그러나 반갑다. ‘백수’라는 감추고 싶은 정체성을 내놓고 만날 수 있다니 이런 좋은 기회가 있을까. 마치 뱀파이어들이 낮에는 못 다니고 밤에 활개를 치는 것처럼, 그 동안 한국사회에서 백수라는 정체성으로 벌건 대낮에 활동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알고 보면 나와 같은 처지의 백수들이 어둠 속에 은신하고 있었고, 그들이 서로 만나고픈 욕구는 생각보다 강했나 보다. 사회가 백수를 바라보는 눈길은 뱀파이어를 보는 것 못지않게 백안시하는 경향이 있고, 이는 미네르바가 체포되었을 당시 모 일간지가 그를 ‘30대 무직자’라고 보도했을 때 확인할 수 있었다. 나 또한 ‘무직자’라는 단어가 주는 감흥에 이끌려, 미네르바를 덮어놓고 ‘별 것도 아닌 놈’으로 잠깐이나마 여겼던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백수’, ‘무직자’라는 단어는 주홍글씨처럼 사람의 존엄성을 팍팍 깎아 내린다. 한국사회에서는 아무리 사상과 인격이 고매해도, 당신이 ‘백수’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저 사회의 낙오자일 뿐이다.

  그 동안 백수들은 뭉치기 어려운 속성을 가진 집단이었다. 왜냐하면 ‘백수 탈출’을 목표로 하는 그들은 같은 종족인 ‘백수’를 경쟁에서 탈락시켜야 하는 숙명이 있기 때문이다. 기껏 모임이라고 해야 잠재적 적군인 ‘백수 동료’와 ‘전략적 동맹’을 맺는 스터디 그룹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자의든 타의든 백수가 된 이들이 ‘취업’에 그다지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공부’에 모여들었다. 여기서는 특이하게도 등산과 요가를 강제하고, 함께 책을 읽고 토론을 하며, 빵을 굽고 사주 명리학을 배우고 영화를 찍는다. 벌써부터 언론에서 난리란다. 백수들이 모여 무슨 ‘작당’을 하나 예의 주시하는 모양이다. 솔직히 백수 3개월 차인 나도 반신반의인 심정이다. 좀더 솔직히 말하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이 집단을 찾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른 참여자들도 대략 비슷하지 않을 성 싶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렇게 모여든 천하 강호의 백수 제현들이 그 동안 해왔던 것처럼 취업공부를 위한 학원의 문을 두드리거나, 취업 사이트를 클릭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백수에게 금쪽같은 15만원이라는 돈을 백수 모임에 과감히 투자한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의 욕구는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남산 108계단 언덕 위에 자리잡은 수유+너머 ‘산채’를 지난 5월 13일 (목) 오전 10시 30분에 방문했다. 백수 케포이필리아의 오리엔테이션이 열리는 날이었다. 동족을 만나는 설렘이었을까. 살짝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공간플러스로 입장한다. 들어가는 길에 매니저 (?) 3명이 등산, 요가 중 택 1과 동아리 (영화제작, 제빵, 사주명리학)를 선택하라고 한다. 동아리 활동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하겠다. 공간플러스 안에는 이미 다수의 동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를 몰래 훔쳐보는 어색한 눈빛이 오가고, 곧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대하는 눈치가 느껴졌다. “백수 생활하는 것도 시대가 좋아졌어요.” 담임이신 고미숙 샘의 말이다. 예전에는 백수 생활이 더 고달팠는데, 그만큼 내놓고 나 백수요~라고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물론 그렇기는 하나, 이렇게 백수들이 양지에서 청년백수의 간판을 내걸고 회합도 갖고 세상이 바뀌긴 바뀌었나 보다. 이런걸 역사의 진보(?)라고 해야 할지? ^^ 동지들의 면면은 다양했다. 나이로는 히말라야를 다녀온 10대 동생부터 30대 후반 형님 누님이 계셨고, 3개월차 파릇한 백수부터 5년차 베테랑 백수까지 백수 경력의 스펙트럼 또한 깊고도 넓었다. 이 중에는 1~2년 회사의 간만 잠깐 보고 백수로 전향한 나 같은 ‘풋내기’와, 10년 이상 직장을 다니다 컴백한 ‘풍운아’도 있었다. 자기소개를 하며 왜 이 곳에 왔는가 구구절절 각자의 사연을 늘어 놓는데,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참가자 한 분께서 한 마디로 정리를 한다. ‘솔직히 말해서 다들 외롭고 심심해서 온 것 아닙니까.’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삶의 질’을 높이고 싶어서 왔으리라. 직장이 더 이상 내 인생을 책임지지 못하는 시대에, 그렇게 원치 않는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 아둥바둥하는 것을 끝내기 위해서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문득 노숙인에게 인문학을 전파한 ‘클레멘테 코스’가 떠오른다. ‘희망의 인문학’의 저자로 알려진 얼 쇼리스는 노숙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따뜻한 밥 한끼와 잠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존엄성을 깨닫는 것이라고 했다. 밥 한끼는 한 순간의 끼니를 해소할 수 있지만, 내가 살아갈 존재 의미를 알지 못하면 매 순간 밥 한끼를 구걸하는 처지에 머물 것이다.

  솔직히 나도 이 집단에 참여하는 중에, 이미 몇몇 회사에 취업원서를 제출한 상태이며 합격한다면 도중 이탈할 수도 있다. 물론 아무 곳에나 지원한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취업 자체를 부정하기 보다, 별 목표도 없이 일단 ‘취업하고 보자’는 식의 묻지마 취업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회사에서 일하며 괴롭고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 하는 끝없는 고민만 낳을 뿐이다. 이런 상황이 한 두 달 지나다 보면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 때문에라도 그만두기 쉽지 않다. 경험상으로 정말 못할 짓이다. 열라게 올라왔는데 ‘여기가 아닌가 보다?’ 하는 개그가 있다. 결국 조금 돌아가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함께할 친구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런 이야기를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 하면 대개 ‘철없는 녀석’ 취급 당하기 일쑤이다. 오호라, 통탄할 일이라! 그래서 기본적으로 백수는 무지 외롭다. 그리고 심심하다. 고미숙 샘은 백수의 특징을 3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사회적 관계의 단절이 발생한다. 친구가 없다! 취업한 친구들은 바빠서 못 만나고, 또 만나자니 자존심 상한다. 둘째, 내놓고 활동할 수 없다. 이런저런 모임에 끼는 것에 소심해진다. 셋째, 자기 긍정하는 것이 어렵다.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머리를 쥐어 뜯는다. 자학에 빠져 심각한 우울증을 보일지도 모른다.

  그 해결책으로 백수 케포이필리아에서는 ‘몸’을 바꿔 ‘생각’을 바꾸고자 한다. 취업한 친구들은 백수를 부러워한다. ‘난 네가 부러워, 넌 시간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잖아. 난 야근에 너무 바쁘고 어쩌구 저쩌구..’ 콱 한 대 때려주고 싶지만 그래도 참는다. 고미숙 샘은 시간이 많다고 곧 그것이 자유를 뜻하지는 않는다고 일침을 가한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백수의 신분을 취득한 이후, 시간은 많아졌지만 빈둥대는 일이 늘어났고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는 것 같다. 늘어가는 것은 눈치요, 쌓여가는 것은 스트레스다. 즉 구속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그렇기에 백수 케포이에서는 백수들을 혹독하게 다룰 (?) 예정이란다. 의무적으로 주 1회 이상 산을 타야 하고, 요가를 해 뼈마디를 쓰다듬어줘야 한다. 그리고 시간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10분 늦으면 기다려주고 이런 거 없는 거다. 백수는 너무나도 자기주도적인 생활 패턴 때문에 시간 개념이 희박하다. 이 날도 1/3이 지각을 했다. 약속한 시간에 가차없이 오리엔테이션이 시작했음은 물론이다. 진정한 자유는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자유이다! 자기소개를 들어보면 꽤 많은 이들이 건강이 좋지 않음을 언급했다. 오랜 회사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생활, 그리고 백수 생활로 접어들며 무절제한 습관 등이 한데 뭉쳐 더욱 안 좋아질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롭기 위한 첫 번째 자산은 ‘건강’이라고 고미숙 샘은 말하였다. 건강해야 비로소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등산과 요가 등의 몸 혁명 프로젝트는 이런 뜻에서 나온 것이리라.

  앞으로 강의는 지정된 책을 읽고 질의응답 위주로 진행한단다. 어차피 강사 분들이 하고 싶은 말은 책에 다 해놓을 터이고, 우리는 책을 읽고 보다 궁금한 점을 물으며 상호 토론하는 것이 생산적이다. 매니저들의 면면 또한 이채롭기 그지없다. 별호부터 특이하다. 장금이, 퉁그스탄, 시성. 장금이님은 사주명리학, 퉁그스탄-퉁님은 영화제작, 시성 (맞나요?)님은 제빵과 등산을 동시에 담당한다. 제빵을 실질적으로 맡은 사장님은 현재 현지기술 취득을 위해 일본에 계신다고 한다. 이 분들의 면모는 강좌를 거듭해가며 조금씩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나는 사주명리학 동아리라서 장금이님이 알려준 교재를 소개하고자 한다. 세기 출판사에서 간행한 ‘음양이 뭐지’, ‘오행은 뭘까’, ‘음양오행으로 가는 길’ 이렇게 3권이다. 사주 명리학은 아주 간단히 말해 자신의 본성을 찾도록 돕는 학문이 아닐까 싶다. 사람마다 생긴 것이 다르고, 성격, 능력도 제 각각이다.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도 야구에선 1할 타자에 불과하다. 즉 사람은 자신의 타고난 능력과 본성을 잘 활용해야 행복할 수 있다. 그것을 안내하는 것이 사주 명리학 같다. 사주 명리학을 배우며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에 들어선 것 같다. 설렌다. 다음 주 모임부터 본격적으로 강좌가 시작된다. 백수 동학들과 함께 코뮌을 조직한다는 것,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나 이미 시동은 걸렸다. 재미있을 것이다.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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