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방과 탈주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고병권 (그린비,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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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방과 탈주. 제목부터가 심상찮다. 게다가 부제는 Be minority!란다. 처음 몇 장을 읽어보니 새만금, FTA, 대추리 주민 등 굵직한 이슈가 등장한다.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취업용 시사문제로만 뒤적이던 내용이 다시 눈 앞에 던져졌다. 그 동안 이들은 답을 맞추기 위해 필요한 문제용으로만 인식되었다. 사지선다 문제로 박제된 그들은 내 주변의 이웃이 아니었고, 책이나 신문 속에만 등장한 가상의 존재였다. 고병권 샘이 쓴 추방과 탈주는 다름아닌 그런 사람들과 만남을 기록한 책이었다. 열흘 남짓한 행진 속에서 만난 국가 공권력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내쳐지는 비(非)국민들의 이야기. 그런데 이들의 사연이 나와 무슨 상관? 세상만사 그 당사자가 되지 않고서는 온전히 알 수 없다고 하듯이, 나는 백수지만 여전히 백수로써의 자각이 덜 된 것이다. 첫 번째 강좌 호모 쿵푸스에 참여하며 그래 공부 한번 해볼까 라는 마음이 병아리 눈물만큼 들었다면, 두 번째 책 추방과 탈주는 공부 이후에는 그럼 뭐? 라는 질문을 직격탄으로 날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8주간의 백수 케포이가 끝나고 나면 뭐? 라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불과 2주 만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민망하나, 벌써부터 Post 백수 케포이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결국 8주 동안 지적인 활동으로 몸과 마음을 추슬러 원기를 회복한 후, 다시 취업의 문턱에 서겠다는 것? 문제는 취업을 하든 안 하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오늘날 구조조정이 일상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고병권 샘은 이것을 예외의 일상화라고 말한다. 예외라는 것은 비상시에 일시적으로 이뤄지는 것을 뜻한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 폭격기가 런던 공습을 하면 처음 당하는 런던시민에게 비상이지만, 일주일 혹은 한달 내내 하면 공습 같은 위급상황도 어느덧 일상이 된다. 그러나 일상이 되어도 폭탄에 맞아 죽는 것은 큰 고통이다. 고통의 크기는 줄어들지 않는다. 따라서 이제는 취업이 기업이나 국가에 의탁하는 수준이 아닌,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는 더욱 국가, 기업이 개인을 돌보지 않을 것이다. 그 전조가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나도 곧 정규직, 중산층이 될 수 있어 라는 의식은 실제로 그렇게 될 수도 있으나, 그것이 일시적임을 무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 폭탄이 덮칠 지 모르는 비상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추방과 탈주는 새롭게 다가온다. 말하자면 맥없이 추방 당할 것인가, 아니면 과감히 탈주 것인가의 문제이다. 대추리 주민을 낯설게 느낀 것은 여전히 백수라는 자의식 속에 Be majority!를 염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리라. 추방당한 마이너 인생과 나는 다르다 라는 오만 혹은 설마 내가..라는 착각 속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너도 이들과 별로 다를 바 없다. Be minority!는 국가,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그래서 추방당할 걱정도 할 필요 없는) 스스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인간을 추구하는 선언이다. 자, 앞서 던진 물음에 답을 하며 정리해보자. 백수 케포이 이후 취업을 할 것인가? 취업해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구조조정의 일상화 시대를 살고 있다. 국가, 기업은 개인을 점점 더 주변으로 내몰고 있으며,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선수를 치는 것이다. 바로 추방당하기 전에 탈주하는 것! 함께 탈주한 이질적 집단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무언가를 모색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를 구체적으로 논하기에 아직 우리의 쿵푸 실력은 너무나도 미천하다. 분명한 것은 8주 이후를 미리 걱정하기 보다, 그 시간 동안 쿵푸에 푹 빠져보는 게 중요하다는 점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깨질 것을 예상하고 사귀지 않고, 영화는 결말부터 보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도 2주 강좌 만에 백수의 의식이 Be majority!에서 Be minority!로 전환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면 그것만으로도 현실감각을 크게 끌어올린 거라 할 수 있다.

추방과 탈주는 열흘의 행진 이후, 3년 동안 집필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한국사회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국가에 의한 추방과 국민 탈주의 흔적이 담겨있다. 고향 땅에서 쫓겨난 농민, 바다의 터전을 잃은 어부, 농성 중인 비정규직 등, 공통점은 집이 아닌 길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문득 이 백수 케포이 또한 추방과 탈주의 연장선상에 놓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차이라면 고병권 샘이 길에서 만난 이들보다 약간은 여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추방과 탈주의 중간에 서성이는 경계인 이라고 할까. 조선시대에 추방은 귀양, 유배를 의미한다. 눈엣가시 같은 존재를 국가 차원에서 통제하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반면 탈주는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처럼 탈주자의 행방이 묘연하다. 추방이나 탈주 모두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이탈하는 것이지만 그 행동주체와 진행과정은 무척 다르다. 추방은 드러나 있고 탈주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통제하고 관리할 수 없다. 국가에 의한 추방이 되레 탈주하는 국민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추측하건대 백수 케포이에 한때 쏠린 언론의 관심은 호기심 반(半) 두려움 반(半)을 내포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무릇 백수면 조용히 토익이다 뭐다 학업에 정진해 괜찮은 취업자리를 알아보는 것이 정석인데, 이렇게 고전을 배우고 우주만물을 성찰한다고 하니 당최 얘들한테 무슨 일이 벌어졌나 궁금한 게다. 여기까지 호기심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는 마이너들이 점점 많아지면 그것은 두려운 일로 변한다. 왜냐하면 자본으로 수렴되는 권력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조조정 같은 현상이 우리에게 공포를 자아내는 이유는, 그것이 돈이라는 생계수단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그럼 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권력자들이 두려워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수유+너머가 지향하는 공동체가 바로 그런 것이라 할 수 있다. 백수 케포이는 그 실험 중 하나이다. 자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유쾌한 실험! 그 첫 번째 임상실험 주체가 된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바이다.

백수 생활을 하다 보면 친구들이 위로 겸 질책으로 한마디씩 한다. 너도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이제 사회생활 해야지. 고병권 샘도 우리와 같은 경험을 했단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사회생활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무척 다르다. 친구들이 말한 사회생활은 돈 버는 여러 활동의 총합을 뜻한다. 그들이 그런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고병권 샘은 길 위에서 행진하며 다양한 우리네 이웃의 현실과 대면했다. 자, 묻는다. 이것은 사회생활인가 아닌가. 당신이 회사에서 억울하게 잘려 부당 해고투쟁을 한다고 하자. 이것은 사회생활인가 아닌가.  불행하게도 우리는 돈 버는 여러 활동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 외에 다른 사회활동이 있는지 조차 망각하고 있다. 그것이 경제만 살리면 장땡이라는 의식을 낳았고, 나부터 살고 보자 라는 분열을 초래했다. 강 건너 불이 조금만 있으면 자기에게로 옮겨 붙을 것도 모르고, 수수방관하고 있는 꼴이다. 결국 자본이라는 척도는 사회적 연대의식을 약화하는데 기여했고,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놀아난다. 이것이 자본권력의 기본적인 통제방식이라 할 수 있다. 고병권 샘은 낯선 사건과 만남으로써 비로소 나의 참모습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주변의 잊혀진 사회현상에 주목함으로써 자신이 서있는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추리, 새만금, 비정규직 등의 사례는 우리에게 닥칠 거대한 추방의 전조에 불과하다. 이것을 재빨리 읽고 어떻게 대비할 것이냐에 따라 비참하게 추방당할지, 사뿐히 탈주할 것인지 판가름나리라. 돈만 좇는 삶은 마치 좌우 눈을 가린 경주마와 같다. 그저 마부가 채찍질하는 대로 달릴 줄만 알지, 어디로 가는지는 상관없다. 우리는 사육된 경주마가 아닌, 초원에서 마음껏 뛰노는 야생마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선 마구간을 박차고 뛰어나와야 한다. 정해진 트랙이 아닌, 낯선 자연의 품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나 요즘 사회생활 좀 해라고 말하고 싶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사회생활이 뭐 거창한 운동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거대담론에 빠지는 것은 그 자체로 위험하다. 조금 세상이 안 바뀔 것 같으면 금방 실망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한걸음씩 내딛는다면 그것이 크나큰 진보 아니겠는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못하는 사람은 그 무엇도 할 수 없다. 추방과 탈주 책을 읽어오기로 했으면 제대로 읽는 것. 거기서 하나라도 더 의문을 끄집어내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열심히 읽어 깨달은 통찰을 동무들과 즐겁게 주고 받는 일. 그것 참 괜찮은 사회생활이다. 공부해서 좋고 친구들과 수다 떨 수 있어 기쁘고 이래저래 남는 장사다. 고병권 샘은 니체의 말을 빌려 용기와 유머는 함께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거대담론을 힘있게 이끌어 나가는 용기 못지않게, 일상의 사소한 사건에서 유머가 될만한 구석을 찾아내는 능력이야말로 요즘 같은 비상한 시대를 살아남는 양생술이 아닐까? 비상시의 탈주자들의 양생술! 유머!

어릴 적에 프랑스 혁명을 배우며 인상 깊었던 구절이 있다. 루이 16세의 부인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지? 철없는 아내의 프랑스 버전으로 느껴지는 이 말은 사실 진위가 확인되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주동자들이 왕정 세력의 한심함을 부각하기 위해 퍼뜨렸다는 얘기도 있다. 이 얘기를 하는 까닭은 중앙에 거(居)하고 있는 이들은 주변부에 정말 관심이 없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서다. 현대 버전으로 하면, 타워팰리스에 사는 부잣집 아들내미가 밥 못 먹어 굶어 죽는 이들에게 밥 없으면 피자 먹으면 되지?하는 것과 똑같다. 그래도 설마 그럴까 싶지만 점점 의심이 든다. 고병권 샘은 중앙에 있으면 전체 형태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주변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둔감할 수 있다. 좀비 영화의 거장 조지 로메오의 랜드 오브 더 데드를 보면 좀비의 습격을 처음 받는 이들은 거대한 타워팰리스 주변에 살고 있는 빈민들이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하급병사부터 죽어나간다. 쉽게 말해 총알받이 역할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가장 약하고 중앙의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계층이며 혹독한 변화를 정면으로 겪는다. 반면 좀비가 쳐들어오건 적군이 공격을 하건, 중앙에 있는 이들은 타워팰리스 혹은 작전사령부에서 편안히 존재한다. 아비규환의 전방 상황은 안중에도 없고, 상상조차 할 필요가 없다. FTA, 새만금, 대추리 등의 사례는 주변부에서 직접 그 일을 겪는 이들을 안중에 두지 않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고병권 샘은 이해심이 부족한 선생은, 이해할 수 없는 학생만 만난다고 말한다. 자신의 소통능력이 달리는 것은 인정하지 않고, 학생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운다. 너는 도대체 왜 그러니?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학생을 문제아로 낙인 찍는다. 국가는 이해할 수 없는 국민의 행동을 난동,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을 괴담이라 부르고, 자발적인 국민의 행동 뒤에 배후가 있음을 의심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황당한 말처럼 국민은 졸지에 괴담을 유포하고 배후에 조종당하며 난동을 부리는 세력이 된다. 촛불시위, 그리고 당장 벌어지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현장을 습격해 진압하는 것을 보면 이들은 어느 나라 공권력인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국민을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 문제아 집단으로 만들어 관리하려는 시도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병권 샘은 상황을 보다 가속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상황이 악화되고 일정 임계 치에 도달하면 경제 살리면 장땡이라는 구호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기본적인 민주주의가 부정되는 지경에 이르면 국민들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 민주주의는 투명성만이 존재하는 사회가 아니다라고 고병권 샘은 말한다. 모든 것이 훤히 드러난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에 근접해 있다. 떳떳하면 마스크 벗고 시위하라고 관련 법을 개정한다는데, 얼굴을 드러낼, 드러내지 않을 권리가 있는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인 게다. 권력자 입장에서는 만천하가 투명한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관리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언론, 방송을 통제하고 인터넷 여론을 조작해도 진실을 추구하는 행동은 피어나기 마련이다. 80년대에는 언더써클을 통한 출판 저널리즘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이른바 사상서 등을 돌려 읽으며 운동을 했다고 하지 않는가. 백수 케포이 집단이 이런 측면에서 어떤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를테면 개인 혹은 공동의 저작물을 발간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지적 생산물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작업으로 일정 부분 자본으로의 독립을 꾀하고, 사회활동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병권 샘은 그 자신이 어디서 월급을 받지도 않는 백수 (좋은 말로 프리랜서)지만 불안하지 않다고 한다. 강의도 나가고 책 인세로 어느 정도 수입이 돼서? 그 또한 세상 기준에서 보면 대단치 않은 액수이다. 왜 불안하지 않는가 하면 자신에게는 장악되지 않은 네트워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네트워크는 인맥이라기 보다, 사회 안전망에 더 가까운 의미이다. 적은 비용으로 먹을 수 있고, 친구들과 수다 떨고 공부하며 건강까지 챙길 수 있는 네트워크. 한마디로 식욕, 외로움, 공부, 건강을 한 큐에 해결할 수 있다. 이런 네트워크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수유+너머가 커다란 네트워크라면, 백수 케포이는 그 네트워크에서 스스로 증식해 진화하는 새로운 생명체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다. 그 신경망이 풍성해지느냐 단절될 것이냐는 두고 볼 일이다.

2009/05/24 - [나를 찾는 글쓰기] - 백수 통신-호모 쿵푸스 후기
2009/05/17 - [나를 찾는 글쓰기] - 백수 통신-수유+너머 '청년백수 케포이필리아' OT 후기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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