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고미숙 (그린비,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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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수 케포이 6번째 강좌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는 달인 시리즈 중 가장 매력적인 주제가 아닌가 싶다. 평소 주요 관심사였고, 이 책을 고를 당시 마침 연애의 늪에서 한창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나는 연애하기 이렇게 힘들까? 라는 의구심에 빠져있던 즈음, 호모 에로스가 눈에 띈 것은 우연이라 하기엔 운명적이었다. 모르긴 해도 짝사랑과 집착의 구렁텅이에서 아우성치던 내 신체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것이리라.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다짐하고 짝사랑한 여자와 연락을 끊은 후, 무작정 서점에 갔다. 과감히 연락을 두절했으나 이때만 해도 뭘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백수 신세에다가 짝사랑의 피로감으로 넋이 나간 반(半) 좀비 비슷한 존재라 할까. 그저 책을 읽으면 조금 기분이 나아질 것 같은 막연한 바람으로 서가를 배회하던 중, 1시간의 서성임 끝에 호모 에로스를 발견했다. 생각해보면 우연이기엔 그 이후에 일어난 일련의 과정이 꽤 극적이다. 호모 에로스를 읽고 호모 시리즈, 고미숙 샘에 대해 흥미를 느꼈으며 마침내 수유+너머 홈페이지에 접속하게 된다. 물론 수유+너머는 예전에 활동한 적도 있고 잘 알고 있었으나, 거의 잊고 지내다 거의 2년 만에 클릭한 것이다. 거기서 만난 백수 케포이 모집 공고는 내 삶의 궤적을 바꾸게 되고, 그 얘기는 지금까지 써 온 글에 잘 나와있다. 짝사랑의 실패를 예감했을 때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고 외로움에 치를 떨었으나, 그로 인해 더 열린 시공간과 풍성한 관계망으로 이동했으니 이 또한 작은 인생 역전이라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를 쌀쌀맞게 거부했던 그 친구에게 이제는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 들기까지 한다. 이런 여러 이유로 호모 에로스 강좌에 각별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모든 일은 바로 에로스에서 비롯하였던 것이다. 백수 케포이에 합류한 게 ‘외로워서’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괜찮은 사람 만나 연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같은 백수라 꿀릴(?) 것도 없고 공부하러 온 백수라면 성향도 비슷할 터,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일. 8주간의 여정을 함께하며 이런 유쾌한 스캔들(?)이 일어나지 않을까 내내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 당사자가 나 자신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다른 이의 경우라도 반가운 것은 매한가지이다. 그 성사 여부는 천천히 밝혀보기로 하자.

  보통 연애라 하면 청춘 남녀의 사랑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다른 주체들의 소외현상이 발생한다. 신체적으로 청춘이 아닌 세대의 사랑은 다른 언어로 희화화되곤 한다. 이를테면 중년의 로망, 노년의 주책처럼 말이다. 그래서 싱싱한 육체를 가진 남녀가 벌이는 사랑이 우리 시대 사랑담론의 제일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형국이다. 어디 사랑이 남녀의 이성애뿐인가? 우정도 사랑이고, 사제간의 정도 사랑이며, 부모 자식간에는 말할 것도 없다. 고미숙 샘은 청춘 남녀의 사랑이 블랙홀처럼 다른 모든 사랑을 흡수한다고 말한다. 이런 구조는 다른 관계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 힘을 원천 봉쇄해버린다. 연인에게는 하루에도 사랑한다는 표현을 수없이 하지만, 부모님에게 그 한마디가 무척이나 어색한 것은 다름아닌 이런 담론구조하에 있기 때문이리라. 사랑은 정해진 틈으로만 흐르는 물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하게 퍼질 수 있고, 그래야 빛을 발한다. 이성애만 사랑으로 여기는 것은 그 자체로 폐쇄적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떤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가? 사랑은 최고조로 촉발된 신체상태이다. 그 무엇과도 접속할 수 있고, 자신을 낯선 곳으로 내던질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는 수준을 말한다. 보통 사랑하면 만사에 긍정적인 시각을 지니고 관대해진다. 사랑에 빠졌는데 인상 쓰고 있는 이는 드물다. 짝사랑이든 뭐든 간에 사랑하는 동안에는 마음을 착하게(?) 쓰려고 한다. 이런 열린 마음가짐은 무한한 소통과 접속을 가능하게 한다. 또 사랑하면 대담해진다. 평소 소심한 이도 사랑을 위해서면 과감해지니 이야말로 백척간두 진일보의 경지가 아닐 수 없다. 그 무엇도 흔쾌히 수용할 수 있는 아량에 절벽에서 떨어질 수 있는 용기까지 있으니 가히 군자(君子), 요즘 말로 대인배라 할 수 있다. 인자무적(仁者無敵), 어진이는 적이 없다고 했듯이 무적이다, 무적! 사랑의 파동으로 둘러친 신체는 이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사랑의 달인이 된다는 것은 이 파동을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수준에 도달한다는 뜻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 사랑의 달인이기는커녕 흉내도 못 내고 있는지라 이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현재로선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그에 대해 더 이상 쓸 수 없다. 아는 만큼만 말할 수 있나니! 여기서는 그저 간만 조금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군자, 무적의 대인배가 될 수 있는 찬스가 사랑의 달인 쿵푸 수업에 담겨있다면 귀가 솔깃해지지 않는가. 사실 별거 없다. 사랑은 외부에 거(居)하고 있지 않고, 내부에 있음을 깨달으면 절반은 끝이다. 보통 나랑 어울리는 사람을 못 만났다고 생각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나, 냉정히 말하면 내 수준이 그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수준이라 함은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평소 일상의 배치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개입하느냐의 문제이다. 즉 외부문제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삶에 애정을 갖는 만큼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 일례로 내가 연애를 잘(?) 했을 때는, 내 목표와 가치관에 믿음이 있을 때였다. 점점 망가지기 시작한 것은 세상의 기준, 취업이나 연봉 같은 것에 신경을 쓰면서부터였다. 자신의 가치관을 버리고 남의 것을 갖다 쓰니 오래 갈 턱이 없다. 스스로 열등감에 빠져 허우적대고 애인에게 짜증을 내던 찌질한 모습을 떠올리니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남의 잣대에 자신을 맞춰 헤매는 꼴이라니 블랙 코미디도 이런 게 있을 수 없다. 사랑하면 군자가 된다고 했는데, 대인배가 일순간에 소인배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상대가 아니라 나로부터 비롯한다. 딱 내 존재의 크기만큼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이 쿵푸인 것은 알아야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귀고 헤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사람마다 일정한 패턴이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는 다르나, 파고들어가면 비슷한 요인으로 끌리고 또 미워한다. 그것이 계속 돌고 돈다. 운명을 개척한다는 것은 삶의 동선을 바꾸는 일이다. 매번 같은 길로 가면 똑같은 풍경만 접할 뿐이다. 봤던 영화 돌려보는 것처럼 레퍼토리가 뻔하다. 그래 놓고 재미없다고 하면 난감하다. 다른 그림을 보고 싶으면 다른 영화를 틀어라. 자신의 삶에 새로운 시나리오를 쓰고, 낯선 풍경에 카메라를 들이대라. 사람의 세포는 한 달 정도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새로 생성된다고 한다. 즉 한달 전의 나는 엄밀히 말하면 지금의 나와 다른 존재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무의미한 것이다. 새로 셋팅한 세포로 조성된 내 신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따져보는 데서 개운(開運)은 출발한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걸려 넘어지는 지점이 어디인지 직시해야 한다. 길가다 넘어지면 창피하다. 무릎에 피가 철철 흘러도 주변 눈치 보느라 모른척하고 걷거나, 아파 죽겠는데 아무도 없는 곳으로 전력 질주하는 괴력을 발휘한다. 정말 자의식은 신체의 고통마저 뛰어넘는가 보다. 이러면 어느 곳에서 넘어졌는지 알 수 없다. 창피하고 고통스러워도 나중에 또 그런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사랑은 나로부터 비롯함을 깨닫고, 걸려 넘어진 지점을 눈 부릅뜨고 볼 수 있는 각오가 섰다면 달인이 되는 기본 초식은 마친 셈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신체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자. 언제 어디서나 무엇과도 사랑할 수 있는 호모 에로스의 세계로 말이다. 이 글을 구상하고 있던 즈음, 결혼한 ‘첫사랑’이 아주 오랜만에 안부연락을 해왔다. 첫사랑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리라. 내가 이 사람을 ‘첫사랑’이라 부르게 된 까닭은 다름아닌 전화통화를 밤새도록 할 수 있던 첫 이성친구였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의아하리라. 지금도 여전히 연애에 미숙하지만, 예전에는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말 못 붙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희로애락이 표정에 바로 드러나는 신체특성 때문에 대화할 때 그 어색함이란! 마주보고 대화하는 것이 이 정도니, 전화통화는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다. 면전에서 얘기할 때는 상대의 반응을 어느 정도 봐가며 대처할 수 있으나, 전화는 오직 목소리로만 대화하는 것 아닌가. 할 말이 딱딱 끊기고 이어지는 침묵에 황급히 작별인사 후 수화기를 내려놓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며 놀랐던 것은 몇 십분 통화로 느꼈는데, 실제로는 몇 시간 동안 대화를 했다는 사실이었다. 말 그대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했던 것이다. 그 동안 이성과 3분 이내 통화를 꾸준히 실천해오던 내가, 밤새도록 수다를 떨 수 있다니!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 친구와 대화 중 내가 감탄하며 던진 말 한마디가 떠오른다. ‘내가 너와 별 얘기를 다해도, 삼국지의 제갈공명 출사표 얘기까지 나눌 줄은 몰랐다.’ 신변잡기부터 철학적인 얘기, 삼국지 출사표까지. 한마디로 대화의 스펙트럼이 차고도 넘쳤기에 쉬지 않고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미숙 샘의 말처럼 ‘서사를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었나 싶다. 그렇기에 사귀지도 않고 기간이 길었던 것이 아님에도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것이리라. 재미있는 것은 그 친구가 연락한 배경이다. 친구 말로는 고미숙 샘의 특강을 듣고, 오랜만에 수유+너머에 접속했는데 거기서 활동 중인 나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백수 케포이 게시판에 올려놓은 글을 읽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에 자극 받았다고 하니, 쿵푸는 이렇게 오래된 첫사랑도 촉발하는 힘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앞서 사랑은 이성애뿐만 아니라 다양한 관계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했다. 한때 서사를 즐겁게 나누던 벗과의 조우가 쿵푸 덕분이라면 오버일까? ^^

  첫사랑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렇게 서사를 주고받았는데 왜 헤어졌냐 하면 헤어질 때가 되었기에 그랬다고 밖에 말할 도리가 없다. 고미숙 샘은 이를 ‘시절인연’이 다했다고 일컫는다. 바다에서 헤엄을 치는데 파도가 안치길 바랄 수 없다. 파도는 흐름이고 그것이 부재하면 헤엄 자체를 할 수 없다. 인생의 파도가 있기에 희로애락이라는 물놀이도 즐길 수 있다. 만남과 헤어짐의 때를 안다는 것은 파도를 타고 노는 것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운명을 바꾼다는 것은 몰아치는 파도를 인정하고 그것과 어울림을 뜻한다. 파도타기의 명수들은 파도와 싸우지 않고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유히 나아간다. 그런데 대개는 시절인연이 언제 발생하고 소멸하는지 알기 어렵다. 아니 지금 누군가와의 만남이 진짜 사랑인가 구별하기조차 어려운 게 현실이다. 시절인연이라는 파도가 오고 가는 흐름을 안다면 파도타기가 한층 수월할 것이다. 그럴 때 좋은 방법은 내 일상의 동선을 상대와 얼마나 공유하고 있는지 따져보면 된다. 이를테면 나는 여자친구와 책을 함께 읽고 공부하고 싶은데, 그녀는 공부가 딱 질색이라면? 백수 동학인 장영진이 고미숙 샘에게 호기롭게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선생님과 친해지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대담한 질문에 모두 웃었으나 샘의 답변은 간단명료했다. “수유+너머에 나오세요. 매일 같이 밥 먹고 공부하면 친해질 수 밖에 없어요.” 요컨대 삶을 나눌 수 있는 장(場)에 함께 설 수 있는지 여부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처럼 쿵푸의 욕구가 있는 백수들은, 함께 공부하는 백수 동무들과 연애하면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일이다. 같이 공부하고 연애도 하고 일석이조! 반대로 나는 싫은데 상대가 집요하게 쫓아다닌다면 같은 전략을 구사해보자. 쿵푸 수련 중인 백수라면 책 함께 읽으며 토론하자고 제안하라. 용하게도 꾸준히 대화가 이어진다면 싫다가도 좋아져 친구가 될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귀찮은 짐을 떼어내는 것이니 이 또한 일석이조! 그만큼 일상을 공유하는 것은 친구가 될 수 있는 기본 바탕이다. 사회생활하며 숱한 만남이 스쳐 지나가는 것은 결국 일상의 한 시절만을 함께하기 때문이다. 배낭여행가서 만난 인연들, 계속 만날 것 같이 해도 한 달을 넘기기 어렵다. 만남과 헤어짐은 닫히지 않고 열려 있는 것, 파도를 타고 가다 보면 드넓은 대양(大洋)에서 어떤 모습으로 또다시 마주칠지 모르는 일. 그때 만나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줘라. 당신이 바다를 항해하며 만난 다양한 삶의 서사를.

  백수 케포이 시즌 1, 8주간의 여정은 이미 끝났다. 이 글은 졸업 후 쓰고 있다. 기록을 남기는 일은 스스로 삶의 서사를 재구성하는 행위이다. 서사라 함은 얘깃거리를 뜻한다. 남의 것, 즉 연예인, TV 드라마 주인공 얘기 말고 자신의 이야기 말이다. 백수 동학 차성덕은 서사의 달인이며 스트립쇼(?)에 남다른 재능이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까발리는데 아무나 그렇게 못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까발릴수록 나눌 이야기가 퐁퐁 샘솟는다는 점이다. 속마음, 비밀을 다 드러내면 내가 텅 빌 것 같은데 그 반대라니 희한한 일이다. 내가 먼저 속내를 털어놓으면 상대방도 자연스레 이에 호응한다. 이렇게 서사는 또 다른 서사를 낳는다. 이야기는 입과 입을 통해 널리 전해지고 그 수만큼 풍성해진다. 그리고 서사는 당신과 나 사이를 이어준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가? 당신 삶을 이야기로 가득 채우라.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헤라자데처럼 천일 동안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내공이라면, 이미 당신은 쿵푸의 고수일 것이다. 임꺽정과 그의 형제들도, 연암(燕巖) 박지원과 그의 친구들도 모두 수다의 달인이라고 하니 이는 믿어도 좋다. 앞서 백수 케포이 내부에 잠재하고 있는 스캔들(?) 여부를 알아보겠다고 했는데, 사실 그런 것이야말로 물밑 속에 잠복하고 있기에 파악하기 어렵다. 고미숙 샘은 우리들더러 ‘모범생 백수’라고 타박하고, 백수 상호간 스캔들도 없음을 개탄하셨지만 그야 모를 일 아닌가. 졸업 후 각자의 자리에서 뭉치고 흩어지며 꿈틀대고 있는 그들이 또 어떤 모색 중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양생(養生)의 지혜는 멀리 있지 않다.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아 천하를 헤맸으나, 우리는 쿵푸하는 지금 여기서, 동학들과 함께하며 생명 연장의 꿈을 실천하고 있다. 그것도 재미있는 삶의 이야기를 안주 삼아 말이다. 이제 연암 그룹, 임꺽정과 함께하는 백수들의 향연을 즐기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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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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