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선생은 '칼의 노래', '남한산성'으로 유명하나, 그를 본격적인 문필가로 독자에게 어필한 작품은
다름아닌 '자전거 여행'이다. 선생이 평소 자전거 애호가임은 익히 알려진 사실. 매니아틱한 이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자전거에 쏟는 정성도 남달랐나 보다. 시시하게 수십 만원 짜리가 아니라, 수백 만원을 호가하는 자전거를 굴렸다고 하니 이쯤되면 그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 뭔가 하려면 이렇게 지르는 거란 말이지. ㅎㅎ

아무튼 중년의 나이에 시사저널 편집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소일하던 그가, 취미인 자전거를 매만진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일터. 그러나 집에서 할 일 없이(?) 놀고 있는 남편이 그러고 있는 모습이 아내에게 좋아 보일리 만무하다. 실업자인 선생에게 타박이 돌아가는 것 또한 자연스럽다.
그런데 김훈은 이렇게 말했단다. '이게 (자전거) 우리를 먹여 살릴거라고.'


그 자전거를 끌고 산천을 누비며 기록한 글 묶음이 바로 '자전거 여행'이다. 자전거 여행을 시작으로 그의
기자 생활 이후 인생의 2막이 펼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때까지 활약한 김훈의 애마가 바로 풍륜(風輪)이다.


자전거 여행에 이런 구절이 있단다.

"1999년 가을부터 2000년 여름까지 전국의 산천으로 끌고 다닌 내 자전거의 이름은 풍륜風輪이다. 이제 풍륜은 늙고 병든 말처럼 다 망가졌다. 2000년 7월에 풍륜을 퇴역시키고 새 자전거를 장만했다. 이 책을 팔아서 자전거값 월부를 갚으려 한다. 사람들아 책 좀 사가라."

월부는 갚으셨는지. ^^ 담담하게 밥벌이의 지겨움을 말하는 그가 좋다.

외람된 비교지만, 한 번 해보련다. 김훈의 식솔을 먹여 살리는 것이 '풍륜'이었다면 나에게는 '아범 x31 놋북'이다. 집에 데스크탑도 있고 글 쓰는 환경은 갖춰져 있건만, 집에서는 글이 안 써진다는 둥 갖은 핑계를 동원해 놋북을 장만하려고 마음 먹었다. 생계수단인만큼 아무거나 고를 수 있나. 관운장에게 적토마가 있고, 손오공에게 근두운이 있고, 김훈에게 풍륜이 있다면, 나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즉각적으로 글을 생산해낼 수 있는 수단, 즉 놋북이 필요한 게다.

조사에 들어갔다. 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적토마, 근두운을 찾아서!
애초에 이렇게 오랜 시간 고민을 할지는 몰랐다. 수능시험 보고 나서, (가)~(라)군 사이의 지원대학을 고르는 것보다 더 어려웠던 것 같다. 하아..

가장 중요한 총알 상태를 고려해 선택의 폭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대략 7~80만원대를 염두에 두었으나

모델을 하나하나 살펴볼때마다 지름신은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저 인터넷 팡팡 터지고, 타이핑과 기본적인 것만 쓰면 되는 것이 최초 구매동기였으나 점점 희망사항은 커져만 간다. 블루투스니.. HDMI니.. 그래픽 카드니.. 듀얼 코어니..

이 모든 것을 충족하는 것은 없다!! 있다면 돈이 아~주 많거나. 그렇다면 백만 원은 훌쩍 넘어가는 것.
배 보다 배꼽이 크다고.. '싼게 비지떡'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고, 이왕 사는 거 확 질러? 하는 욕심이 생긴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다 이런 식이다. 초심은 간데없고, 욕망만 덕지덕지 느는 꼴이다. 각종 노트북 가격 비교 사이트를 약 4박5일간 섭렵하며 컴맹이 어느정도 컴퓨터에 대한 기초 지식이 쌓인 것이 수확이면 수확일까?

그래도 그렇게 아이 쇼핑을 하는 것은 피곤하기는 하지만, '즐거운 비명'이다. 사지는 않아도 이렇게 기종을 서로 비교하고 특성은 무엇이 있는지 알아가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다. 아무리 봐도 나는 이 검색과 조사의 과정을 꽤나 좋아하는 것 같다. 예전 회사를 다닐 때의 기억을 떠올려봐도, 각종 자료를 찾아 나름의 분류체계를 만들고 정리하는 것 자체에 오르가즘을 느끼는 듯 하다. 헥..

MSI가 대세로 떠오른 요즘 놋북 시장. 그래도 가격대는 55~70만원 선이다. 아니야.. 이것도 내 구입의도에 비해서는 과분하다. 욕심이다라는 마음이 스쳐 지나갔다. 문득 여친님의 한 마디. 'IBM 중고를 알아보라..' 중고?? 중고라는 말 자체에 나는 경기를 일으켰다. 그렇다고 내가 무조건 신상만 선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나눔장터나 아름다운 가게, 헌책방 등에서 싸게 물건을 구입하는 것을 좋아하나, 고가 전자제품의 경우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것도 노트북과 같은 미지의 세계는 말 할 것도 없는 일.
허나 며칠밤을 고민하며 점차 좁혀지는 것은 '덕지덕지 붙은 욕망을 걷어내고 초발심을 밝히자'로 좁혀졌다.
좋은 것 사면, 게임도 잘 돌아가고 이것저것 하고 싶고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의도했던 것과 초장부터 어그러지는 일. 뜻을 세웠으면 그 뜻에 가장 적합한 것을 구입하는 것이 바른 길.

울트라씬이다 뭐다 해서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그 순간, 사양이 한참 낮은 중고로 수직 이동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어쩌랴. 일단 여친님이 말해준 IBM이라는 놈을 중고시장에서 검색해보자. 별다른 기대없이 조사에 착수.. 그런데 어라? IBM(이하 아범)은 유저들에게 희소성을 가진 클래시컬한 느낌으로 어필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알 사람만 쓰는 그런 매니아틱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기까지 했다.

베스트셀러는 안 읽고, 천만 관객이 든 영화는 안 보고, 남들이 Yes라고 하면 No를 외치는 등 
삐딱선을 잘 타는 나에게 딱 맞는 것 같은 이 넘의 정체는 뭘까?

좀더 찾아보니 아범 유저들이 아범에게 바치는 찬사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 이상의 힘이 있었다.
뭔가 숨겨져있는 비밀 결사 같은 느낌이랄까.. 그들만이 공유하는 그 무언가가 나를 확 잡아끄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아이비엠매니아 사이트에 접속해 그들의 세계를 탐험하며 나는 이미 그들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가장 중요했던 선택사항으로 지목된 '쫀득쫀득한' 키보드감.
사실 막눈, 막손인 나는 그런 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거론하는 LCD의 불량화소 같은 것도 별로 개의치 않기에 키보드감이라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키보드감이 좋으면 얼마나 좋겠어? 다 거기서 거기 아냐?

그러나 용산 현장 조사 중, 접한 모 브랜드 놋북을 직접 시연했을 때 경악했다. 타이핑이 어찌나 스무스하던지.. 오타 작렬 크리였다. 물론 쓰다보면 적응되겠지만, 가격도 비싸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결국 노트기어 등 리뷰사이트를 돌아다니며 x31과 x40으로 압축되었다.
여친님이 쓰는 기종은 x40. 가끔 내가 빌려서 쓰곤 했는데, 조사를 마친 후 이제는 여친님이 달라 보인다.
문제의 키보드감은 정말.. 타이핑하는 맛이 난다고 할까? ㅎㅎ

며칠밤을 지새우게 했던 놋북.
나를 먹여살릴 적토마.
아범 싱크패드 x31과 그렇게 지금 함께 하고 있다.

판매자 분이 컴퓨터 관리를 잘하셔서 그런지, 쓰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대만족!

모델명 : IBM ThinkPad x31
CPU : 펜티엄 M (1.4GHz)
RAM : 526
HDD : 100G
크기 : 12인치
무선랜 : 필립스 아데로스

내 생애 최초 랩탑. 너를 흑토마.로 명명하노라.
흑토마답게 어디서든 나를 웹으로 날라다주는 무선 아데로스 칩!
흑토마의 간지가 좔좔 흐르는 무광 상판!
뚜가닥 뚜가닥~ 착착 손가락에 감기는 말발굽 키보드 소리!
거기다 전(前) 주인이 입혀놓은 안장 (인조가죽 시트지)까지!

이제 부지런히 글쓰는 일만 남은 게다. 달릴 이유를 잃어버린 적토가 죽어버린 것처럼,
놋북 '흑토'가 사는 이유는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일 뿐.

사진은 지금 찍어 놓은 것이 없어, 일단 전 주인이 올려놓은 사진으로 대체합니다. ^^

'흑토' x31

인조가죽을 입힌 '흑토' x31

사진 출처는 여기

아이비엠 매니아 사이트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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