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사람들을 위한 약을 만드는 것이 내 오랜 꿈이다.” 무슨 소리인가 의아하리라. 건강한 사람에게 약이 필요한가? 게다가 그것이 오랜 꿈이라니. 발언자의 면모를 살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화이자, 글락소스미스클라인 등과 함께 거대 다국적 제약회사 중 하나인 머크(merck)의 전() CEO 헨리 개스덴의 포춘紙 인터뷰 발언이다. 그는 회사의 고객이 아픈 사람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현실에 고민하며 머크가 추잉검 제조사처럼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껌처럼 심심할 때 언제라도 사먹을 수 있는 약. 과연 다국적기업의 CEO 다운 획기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질병만큼 강력한 브랜드는 많지 않다. 남녀노소 모두 언제라도 병에 걸릴 수 있으며 방치했을 때 최악의 경우 사망한다. 명품이 이른바 지름신을 강림하지만 이 경우는 그나마 애교스럽다. 질병은 인간의 원초적 감정인 두려움을 자극한다. 당신, 이 약 안 먹으면 더 아플지도 몰라. 고통과 죽음의 공포에서 초연한 이는 별로 없다. 따라서 질병은 훌륭한 시장창출요인인 동시에 혁신 브랜드로 탈바꿈한다. 의약업계에서 떠도는 약을 팔기 전에 먼저 병을 팔아라는 말이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닌 게다. [각주:1]불안 완화제인 팍실의 생산 책임자 배리 브랜드도 이에 동의한다. 모든 마케터의 꿈은 미확인 혹은 미지의 시장을 찾아 개발하는 것이다. 사회불안증세와 관련해 우리가 해낸 일도 바로 그런 것이다. 그들은 정말 해냈다. 2001년 팍실의 미국 매출은 전년도에 비해 무려 18퍼센트나 상승했다. 팍실은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항우울제가 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연간 27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아무리 현대인이 소외와 고독의 결정체라고 하지만 이건 좀 심하다. 모두가 밥 먹고 근심걱정에 빠져 우울해하기만 하는가? 매년 상승하는 항우울제의 매출액을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런 상황은 미국정신의학협회, 다국적 제약회사, FDA(미국 식품의약국)라는 트라이앵글이 조성했다.

우선 정신의학협회는 질병을 재정의한다. 일상의 사소한 근심걱정을 질병화함으로써 그것들이 더 이상 사소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즉 수줍음이 많은 것은 비정상이며 치료받아야 할 장애인 것이다. 전문가들이 연구한걸 어떻게 반박하겠는가. 그러나 [각주:2]워싱턴 포스트는 DSM의 우울증과 정신분열증 기준 설정 작업에 참여한 모든 전문가가 제약업계와 금전 관계를 맺었으며, 기타 장애들의 기준 설정 작업에 참여한 전문가의 절반 이상이 그와 유사한 타협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고발한다. 의사와 제약업계의 유착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각주:3]이러한 덫은 병원 레지던트와 인턴들에게 공짜 간식을 제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멈출 줄 모르고 확산되고 있다. 숱한 의학 심포지엄 개최, 의사 재교육, 과학적 연구 등에 소요되는 사적인 자금 출처는 주로 제약회사이다. 앞서 말했지 않은가. 약을 팔기 전에 질병을 팔라고. 그러려면 질병을 승인해주는 의사들과 잘 지내야 하지 않겠는가. 공짜 점심도 대접하고 말이다. 의사들도 나쁠 것 없다. 여러 비용을 지원해주는 제약회사와 공생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의 커넥션은 지속된다.

일상의 근심걱정이 질병 혹은 장애로 인정받은 후에는 거침없다. 제약회사는 세련된 홍보 마케팅 기술로 대중을 겁주고 어른다. [각주:4]1960년대 제약광고는 마치 B급 영화 포스터들처럼 환각의 거미줄에 걸린 광분한 여배우 혹은 긴장 속에서 손수건을 쥐어짜거나 진주목걸이를 틀어쥔 가정주부를 진정시키는 의사들을 주연으로 내세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두려움의 마케팅이다. 요즘은 진일보해서 마냥 공포만 불러일으키기 보다 사람들이 갈망하는 결과, 균형과 행복과 자신감을 시각적으로 강조한다. 남성적인 힘, 절로 치솟는 충만감 (나야), 열정적인 사회성 (당신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을 광고한다. 그들은 당신도 동참해요 혹은 우리가 부럽지 않느냐며 어서 오라고 부추긴다. 역으로 말하면 약을 복용하지 않은 당신은 균형을 잃었으며, 사회성이 결여된 상태임을 환기한다. 이쯤 되면 어떤 상태가 될지 궁금해서라도 사먹고 싶을 정도이다. 먹으면 행복과 자신감이 충만한 환상적인 세계가 펼쳐진다. 내 상식으로는 그런 판타스틱한 약을 딱 한가지 알고 있다. 마약. (오해는 마라, 경험은 없으니) 쿵짝이 잘 맞는 의사들과 제약업계는 그렇다 쳐도 이들을 감시하는 FDA는 어찌된 일인가. [각주:5]() FDA 선임 자문관이었던 폴 스톨리는 미국식품의약국은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들이 조직적으로 억압되는 곳이자 과학적 논의가 차단되는 장소라고 묘사했다. 그는 그 기관이 제약 회사로부터 돈을 받고 있으며 스폰서의 비위를 거스를까 봐 지나치게 걱정한 나머지 혼란을 느끼며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환멸을 느끼고 미국식품의약국을 떠났으며 시민 단체인 퍼블릭 시티즌으로 들어갔다.

결국 소비자는 속고만 있고 모든 것은 검은 트라이앵글의 책임이다! 라고 말하면 얼마나 속 편할까. 모턴 민츠는 [악몽의 치료법]에서 제약회사가 밟아가는 마케팅 전략의 제1순위로 대중이 약물 뉴스를 원한다를 꼽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속아 넘어가는 당사자인 그들이? 그렇다. 알약 하나로 골치 아픈 걱정거리를 훅 날려버릴 수 있다면 이보다 손쉬운 방법이 어디 있을까. 몸드라망 도담 샘의 말씀처럼 고통을 쉽게 이겨내려고 하는 것이 바로 욕심이며 또 다른 고통을 불러오는 것이다. 자신이 쌓아온 업보를 쉽게 Reset하고 Restart하고픈 심보. 이봐, 이건 컴퓨터 게임이 아니야! 솔직히 본인도 이렇게 입이 살아서 말은 하지만 매일 매시간 짜증나고 괴롭고 우울한 나 자신을 마주 대하는 것이 힘들기 짝이 없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겠고 답답한 상황에서 누군가 알약을 내밀며 유혹하면, 넘어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설령 진짜 심각한 우울증과 불안증세에 시달린다면 치료와 안정이 아주 쓸모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약에 의존하는 것의 핵심문제는 증세의 원인을 철저히 개인 내부로 환원한다는 데 있다. 이 시대가 정녕 불안과 우울의 시대라면 뇌 속 화학물질의 조절도 필요하지만, 그렇게 우울하게끔 강요하는 사회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 진정 요청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공부하는 것이 바로 그런 활동임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인간은 알약 하나로 행복하고 불행해지는 단세포가 아니다. 검은 트라이앵글처럼 대중을 단세포화하려는 시도는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 호랑이에 물려도 정신만 차리면 살 길이 있다는 속담처럼, 눈을 말똥말똥 뜨고 살아간다면 단세포 취급은 면하리라. 마침 내년이 경인년(庚寅年) 호랑이 해다. 호랑이에게 잡아 먹힐지, 호랑이 날개 단 듯 훨훨 비상할지는 순전히 우리들의 몫이다. 다사다난했던 올해 기축년을 뒤로 하고 업장소멸!을 외치며 다가오는 2010년 새해를 맞이하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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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만들어진 우울증 / 크리스토퍼 레인 / 한겨레출판 [본문으로]
  2. 만들어진 우울증 / 크리스토퍼 레인 / 한겨레출판 [본문으로]
  3. 질병판매학 / 레이 모이니헌, 앨런 커셀스 / 알마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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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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