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 불후의 스포츠만화슬램 덩크의 명대사 중 하나다. 전직 농구선수 정대만은 불량학생의 삶으로 일탈을 거듭하다 우여곡절 끝에 코트로 돌아온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스승과의 만남. 한때 잘나가는 선수였던 그는 연이은 부상으로 좌절한다. 사랑과 증오는 맞닿아있듯 농구를 향한 애정이 가로막히자, 그는 농구 자체를 철저히 부정한다. 농구부원에게 싸움을 걸거나 농구부를 파괴하겠어!라고 거침없이 내뱉는다. 천천히 부상을 치료하고 복귀하면 되었을 텐데 왜 그리 삐딱선을 탔을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당장 실력발휘 하고 싶은데 1년 혹은 기약 없는 재활훈련을 견디라? 어지간한 인내심과 목적의식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순간을 참지 못하고 인생은 시궁창이라고 외치는 순간 오히려 멀리 돌아가기 마련이다. 정대만이 그랬던 것처럼..

이럴 때 항심(恒心)이 요청된다. 좀처럼 흔들리지 않고 진득이 임하는 것. 만사 끝까지 살아 남는 이가 진정한 승자이듯 공부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다. 고미숙 샘은 학인들이 공부의 마디에서 허덕임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 마디란 긴 호흡으로 공부할 수 있는 자세. 아마도 매 순간 고비를 넘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이들을 수십 차례 목격했으리라.슬램 덩크의 안 선생님은 좌절을 선택한 정대만을 그저 묵묵히 기다린다. 냉정히 말하면 좌절 또한 본인의 선택이다. 따라서 누가 대신 일으켜줄 수 없다.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스승의 몫이었던 게다. 정대만은 절망에서 벗어나기까지 일탈이라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임계점이 폭발할 즈음 스승을 다시 만났다. 그래서 정대만은 안 선생님을 보자마자 눈물을 좔좔 흘리며 농구가 하고 싶다고 절규했겠지. 그간 억눌러왔던 열정이 스승을 만나 봇물 터지듯 뿜어져 나온 것이다. 자, 이제 대사를 바꿔 보자. 선생님, 공부가 하고 싶어요..

나 자신을 불꽃남자 정대만에 비유하면 욕먹을 짓이지만 선생님, 공부가 하고 싶어요..라는 말은 각별하다. 작년 한해 동안 백수로 뜨문뜨문 공부한답시고 깔짝거렸으나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뭐 한 것도 없는데 확실함을 바라니 참 우스운 노릇이다. 아무튼 공부는 하고 싶은데 좀 애매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 그냥 다 접고 취업해버려? (정대만의 일탈이 조금은 이해된다) 이럴 즈음 고미숙 샘에게 문제의 대사를 친다.슬램 덩크안 선생님은 농구하고 싶다는 정대만의 울부짖음에 별말 없이 미소만 짓는다. 농구든 공부든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면 그만이다. 스승의 허락이 필요하지도 않다. 모든 것이 자기 내면의 문제. 발심(發心)이 되었느냐의 차원인 게다. 그때부터 비로소 시작이다. 발심하면 스승은 그저 가끔씩 툭 건드릴 뿐이다. 고미숙 샘의 말처럼 어떤 스승이 제자가 짐 싸서 뛰쳐나가려고 할 때 마다, 그 타이밍을 귀신같이 알아 한 수 가르쳐줬다고. 그러면 제자는 반신반의하며 다시 남았다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대중지성 1주차 고전에서 배우는 미래의 공부법 강의는 일종의 워밍업이다. 공부는 하고픈데 그저 막막한 이들을 위한 가이드라고 할까. 과연 친절할 곰숙씨이다. 고미숙 샘은호모 쿵푸스가 갖출 초식의 비밀을 일러준다. 그 핵심은 다름아닌 잘 읽고 잘 듣기. 책을 모기만하게 읽거나 웅얼거릴 때 흔히 ‘맥아리’ 없다고 한다. 이러면 알아듣기 힘들고 듣는 이 복장 터진다. 책을 소리 내어 읽어도 전달이 뛰어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이가 있다. 바락바락 악쓴다고 잘 읽는 게 아님은 두말할 것 없다. 문장은 머리와 꼬리가 있다. 고미숙 샘의 말을 빌리면 ‘기승전결’이 있다. 물 흐르듯이 리듬감 있게 읽는다는 것은 곧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다. 지금 살펴볼 일 첫 번째, 책 읽는 내 목소리가 맥아리 있는지 다 죽어가는지 알아볼 것.

왜 낭랑히 리듬감 있게 읽는 것이 중요한가? 우리 마음은 정신줄을 놓아버리는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하루에 얼마나 제대로 집중하는지. 집중한다고 해도 잡생각은 끊임없이 떠오른다. 내가 유독 그런지는 모를 일이나, 책을 읽거나 사람들과 대화를 하거나 기타 등등 활동을 할 때 딴생각은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른다. 독서할 때 이런 정신줄 놓는 습관은 치명적이다. 글 내용에 빠져들기 힘들 뿐더러 졸음이 덮친다. 리듬감 있게 읽으려면 의식적으로 집중해야 하며 따라서 잡생각이 들어설 여지가 줄어든다. 이것은 책 내용의 이해도를 대폭 상승하게 한다. 한발 나아가 고미숙 샘은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자는 들을 수도 없다’고 지적한다.

이 사실을 나는 연극 공연에서 어렴풋이 체험했다. 백수 케포이필리아 시절 연극 동아리 연습 중 하루는 대사를 까먹어 그걸 떠올리는데 급급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한마디로 눈에 ‘뵈는’ 게 없더라. 상대 배우가 보이지 않았다. 모든 신경을 대사 기억하는데 기울이니 당연히 상대방 연기에 ‘리액션’ 취할 수 없는 노릇. 이 에피소드는 말하기와 듣기가 한 뿌리임을 알려준다. 내가 대사를 완벽히 숙지했다면 여유 있게 말할 수 있다. 또한 상대방 것을 들으며 적절히 반응할 수 있다. 여기서 완벽히 대사를 외움은 내가 맡은 배역과 하나됨을 뜻한다. 여기에 잡념 따위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연기하는 그 순간 나는 이순신이요 햄릿이요 로미오다. 이런 경지가 제대로 된 연기다. 즉 잘 말하면 잘 들리는 것.

목소리가 잘 안 나오고 칼칼하면 목구멍에 가뭄 든 징조이다. 칼칼하다는 말은 목마를 갈(渴) ‘갈갈하다’의 변형이다. 몸에 물기가 없음은 에너지가 부족한 것이다. 에너지를 동양의학에서는 정(精)이라 한다. 이른바 정력(精力)을 낭비한다고 하는데 그때 쓰는 말이다. 살펴볼 일 두 번째, 무분별한 생활습관과 과도한 자의식으로 정(精)을 소모하고 있지는 않나 점검할 것. 정(精)이 모자라면 정신(精神)이 없다. 정신줄을 잘 놓아버린다. 집중하기 어렵다. 이때 잘 읽고 잘 들음은 여기저기 흩어진 정신의 조각을 수습하는 활동이다. 컴퓨터도 가끔씩 조각 모음을 해야 잘 돌아가는데 우리 마음도 그리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미숙 샘의 말처럼 제대로 읽고 들으면 현재를 온전히 살 수 있다. 자기 분열이란 말 별거 없다. 딴청부리는 순간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다’. 이처럼 우리는 매 순간 자기 분열을 경험하고 있다. 공부한다는 것은 이런 분열증과 망상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안전판과 같다. 그래서 공부를 수양(修養)이라 했나 보다.

정리해보자. 소리 내어 읽을 때는 글줄의 흐름에 따라 ‘리듬감 있게’ 읽도록 하라. 그러다 보면 자기만의 리듬이 몸에 밴다. 듣는 것은 그냥 귀를 열어놓음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오래 들을 수 있고, 상대의 이야기를 빨아들여야 하며, 나와 다른 의견까지 들어줄 수 있어야 진정한 청력의 소유자라 할만하다. 이제는 시력과 청력의 재정의가 필요하다. 가시광선과 데시벨이란 물리적 범위를 넘어 행간을 볼 수 있고, 듣기 싫은 말까지 들을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진짜 시력과 청력일 것이다. 이제 워밍업 1단계는 끝났다. ‘선생님, 공부가 하고 싶어요..’가 절박한 마음에서 흘러나왔지만 이제 겁낼 것 없다. 항심(恒心)과 발심(發心)이란 군사(軍師)를 좌우에 거느렸고, 읽기와 듣기라는 맹장(猛將)을 선봉에 세웠다. 게다가 스승이란 든든한 보급선까지 뒤에 버티고 있으니 무엇이 두려우랴? 천하무적! 정대만이 그랬듯이 대중지성의 장(場)은 이제 우리의 농구 코트가 되었다.

2010/02/01 - [연구공간 수유+너머] - [대중지성] 4기 오리엔테이션 후기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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