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공부의 최전선이다. 모든 것이 여기서 판가름 난다. 호기롭던 발심(發心)은 작심삼일로 패퇴하고, 굳건한 항심(恒心)은 지리멸렬해진다. 그뿐이랴? 선봉에 내세운 관우(關羽)·장비(張飛)가 이끄는 읽기와 듣기의 부대는 정신줄을 놓아버려 산만함 앞에 추풍낙엽이다. 스승이 이끄는 보급선은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 그러나 전멸하더라도 끝까지 깃발을 지킨다면 부활할 수 있다. 이 험난한 글쓰기라는 전쟁터에서 말이다. 고미숙 샘도 소싯적에는 글을 무지하게 못 썼다고 한다. 석사 논문을 완성하기 위해 겪었던 고초가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하니 우리는 그저 눈만 끔뻑이며 짐작만 할 따름이다. 사람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지도교수와 선배들에게 빨간 펜으로 난도질 당했다니 오죽하면 그 시절의 글을 평생 가장 힘들게 쓴 글이라 말할까.

고미숙 샘은 전투에서 수 차례 패했을지 몰라도 전쟁은 승리로 이끌고 있다. 치열한 전투의 현장에서 단련된 샘의 창검은 날카롭고 병졸은 용맹하며 장수는 지혜롭다. 그렇게 하다 보니 리라이팅 클래식이라는 굵직한 전장에서도 적벽대전 마냥 대승을 거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문학으로 인생 역전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당신이 전열에서 이탈하지만 않는다면 기회는 있다. 당신을 따르는 참모와 장군을 활용하라. 그러려면 덕(德)이 있어야 한다. 삼국지연의 유비(劉備)하면 떠오르는 것이 덕망 있는 군주이다. 백성을 내 몸처럼 생각하는 마음. 그 매력에 제갈공명, 조자룡 같은 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글쓰기에서 덕이라 함은 몸과 마음 씀씀이를 뜻한다.

좋은 글은 좋은 삶에서 비롯한다. 글과 삶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다. 내가 현실에서 비비고 있는 딱 그만큼만 표현할 수 있다. 돌아보면 부모님이나 애인과 다툰 후, 화해 혹은 용서를 구하지 않고 마음에 담아둘 때가 있다. 이른바 냉전에 돌입한 경우이다. 이때 뭔가 글을 쓰려고 할 때 (특히 인문학!!) 쓸 수 없다. 써지지 않는다. 아까만해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극언과 망언을 속사포처럼 날리고 눈을 까뒤집고 난리 부르스를 췄건만 글에서 고상한 척 개념과 지식을 주워 섬기기는 힘들다. 글과 삶은 이렇게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나란히 움직인다. 삶은 글이 되기도 하고, 글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글쓰기를 태교(胎敎)에 비유하고 싶다. 아이를 임신하면 부부는 몸과 마음가짐을 바른 생활 모드로 전환한다. 생각도 긍정적으로 하고, 문란한 일상도 좀 괜찮게 바꿔보려고 애쓴다. 이런 노력이 모여 건강한 아이를 낳게 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평소 몸을 막 굴리지 않고 건강하게 관리하며, 마음 또한 칠정(七情)에 매달리지 않게 한다면 이것이 덕을 쌓는 바이다. 그럼 인재가 덕망 있는 주군을 찾듯이, 뿔뿔이 흩어진 발심과 항심, 정신줄 놓았던 읽기와 듣기, 소식 없던 스승이 모여든다. 전열의 재정비. 전투를 다시 개시할 수 있다. 이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때이다.

고미숙 샘은 100% 있어야 10% 쓸 수 있다고 말한다. 지당한 말씀이다. 솔직히 이 글도 밑천이 훤히 드러난 지 오래다. 이럴 때 하던 말 또 하고, 별 얘깃거리도 아닌데 길게 쓰곤 한다. 고미숙 샘은 이런 글을 전문용어로 쓰레기라 한다. 문득 찔린다. -_-; 100%는 단순히 지식의 양을 뜻하지 않는다. 쓰고 싶은 주제에 100 퍼센트 빠져들어 있느냐가 참뜻이다. 글을 쓸 때는 오매불망 그 주제에 몰입해야 한다. 글이 잘 안 써지면 대개 딴 짓을 하기 마련이다. 인터넷 검색을 한다거나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말이다. 기분전환의 측면에서 이런 행위는 바람직한 면도 있으나, 문제는 주객이 전도될 때다. 조금 안 써진다고 무한 인터넷질을 스스로 기분 전환 혹은 휴식이라고 부르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일이다.

100% 몸과 마음을 바치면 비로소 약간의 글이 흘러나온다. 이때는 무중생유(無中生有), 즉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라 할만하다. 웹에 떠다니는 자료를 긁어 모으는 일은 창조라기 보다 편집기술에 가깝다. 고미숙 샘의 용어를 빌리면 짜깁기 혹은 표절의 위험이 있는 것이다. 스스로 무게중심이 없으면 이렇게 정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기 마련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생각의 한 점에 초점을 맞춰라. 그리고 자나깨나 그 한 점을 붙들고 늘어져라. 무게중심을 잡는 훈련이다.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은 아무 생각도 없는 것과 다름없다. 자기 생각에 자기가 걸려 넘어지는 꼴이다. 이런 마음은 어지러운 일상에서 비롯한다. 내 주변의 일상을 어떻게 배치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존재를 가볍게 비워야 그 자리에 로 채울 수 있다는 고미숙 샘의 말씀을 허투루 들을 수 없는 까닭이다.

무게중심 잡는 한 가지 방법으로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어보라. 나만 해도 책을 보통 한 번 읽고 덮는다. 그리고선 다 읽었다고 뻐길 뿐더러, 이 책에선 도무지 질문이나 얘깃거리가 별로 없다고 단정짓는다. 선무당 사람 잡을 소리다. 한 번 읽으면 한 번 읽은 만큼만 얻는다. 그게 우주의 진리다. 그래서 조상들은 반복해서 글을 낭송했던 것이 아닐까. 읽을수록 지혜가 샘솟음을 진작부터 간파했는지 모른다. 더구나 그들이 읽은 글은 천하의 원리를 논하고 우주만물의 비밀을 탐구한 경전이니 다만 아득할 뿐이다. 조상들의 레벨에 기죽을 필요 없다. 우리들은 옛 사람들이 누리지 못한 좋은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한 자리에 앉아 동서양 고금의 서적을 맘껏 즐기는 게 가능하다. 한마디로 인프라는 완벽히 제공된 상태이니 갖다 쓰기만 하면 될 일. 이런 혜택 속에서 꾸준히 무게중심을 실으면 그런 무게의 책과 언젠가는 운명적으로 만날 수 있다.

고미숙 샘은 글쓰기 행위는 지식의 주체를 선언하는 것이라 했다. 이를 위해 수동적으로 가르쳐주는 행위를 중단하신단다. 이제 알아서 스스로 배워야 한다. 돈 냈다고 받아먹을 생각은 접어야 정신건강에 좋다. 그럼 스승은 뭘 하느냐? 공부할 책과 읽을 범위, 즉 진도만 알려준다. 뒤쳐진다고 선생이 따로 안 가르치니 다양한 책에서 구해야 하고, 더불어 함께 공부하는 우등생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 모르면 그들에게 물어봐야 하니 평소에 잘해야 할 것은 두 말할 필요 없다. 이것이 자생적 학습망 구축이다. 족집게 선생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지 않고, 공부하기 위해 스스로 책을 찾고 사람을 만나니 그 몰입과 무게중심 쏟음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자기주도학습은 엄마가 진수성찬 차려주고 내가 골라먹는 자유가 아니다. 내가 들판과 산속을 헤매며 채집한 나물로 직접 차려 먹는 것이 진짜 자기주도적 배움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인프라는 다 마련되어 있다.

먼 길을 갈 때 지루하지 않은 방법. 좋은 사람과 동행하는 것이다. 친구와 우정을 나누며 공부의 여정을 함께 한다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으리라. 연암 그룹의 백탑청연이 이곳 대중지성에서 재현되는 것도 결코 허황됨은 아니다. 모두가 제 발걸음으로 걸어가되, 오버 페이스를 할 때마다 다른 친구들을 거울삼아 우직하게 가자. 고미숙 샘의 말처럼 성취의 시점은 모두 다르다. 세월만 낚았다는 강태공은 나이 70에 천하를 경영했다지. 공부의 五常(발심·항심·읽기·듣기·스승)을 갖추고, 좋은 삶으로 덕행을 쌓으니 100%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으며 무게중심이 잡힌다. 그런 무게중심 잡힌 친구들과 더불어 동서고금의 경전을 공부하니 난 운이 좋아도 한참 좋다. ^^

2010/02/05 - [연구공간 수유+너머] - [대중지성] 고전에서 배우는 미래의 공부법 - 上
2010/02/01 - [연구공간 수유+너머] - [대중지성] 4기 오리엔테이션 후기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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