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소설 전집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루쉰 (을유문화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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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루쉰 소설 전집 중 '광인일기'를 중심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매트릭스 시리즈를 감독한 워쇼스키 형제는 아마 루쉰의 광인일기를 읽지 않았을까 싶다. 그 모티프와 이야기 전개가 많은 부분 일치하기 때문이다. 광인일기를 집필하게 된 계기인 무쇠 방 이야기부터 그렇다. 무쇠 방 이야기란 견고한 무쇠로 만들어진 방안에 사람들이 갇혀 있는데 이들은 모두 잠든 채로 질식해 천천히 죽어간다. 깨면 극심한 고통을 느끼나, 일어난다고 해도 그들을 둘러친 무쇠 방을 부술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다. 이들을 깨우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루쉰은 몇 사람이 깨어 일어난다면 이 방을 뚫고 나갈 수도 있다는 일말의 희망으로 광인일기를 썼다. 매트릭스에서 사이퍼는 고통스런 깨우침보다 안락한 가상세계를 택한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만큼의 대가를 요구한다. 아는 만큼 자유로울 수도 좌절할 수도 있다. 사이퍼도 네오처럼 스스로의 주체적 선택으로 빨간 약을 먹고 깨어났다. 그러나 그는 동료들을 배신함으로써 자신의 선택을 극단적으로 부정한다. 광인일기의 광인은 미치지 않았다. 아니 그는 한때 미친 적이 있지만, 이제는 완쾌되어 버젓이 모지(某地)의 벼슬살이를 기다린다. 사이퍼가 스미스 요원과 레스토랑에서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썰며 나누는 대화에서 이 모든 것이 가상임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좋다라고 한 것처럼, 광인은 광증을 회개하고 전향함으로써 지금은 임관도 하게 되고 큰 소리로 웃으며 자신의 지난 광기의 행적을 아무렇지 않게 옛 친구에게 건네준다. 광인일기는 어떻게 보면 매트릭스의 비밀을 폭로한 금단의 열매 같으나, 광인 이었던 그는 이제 그것을 안락한 가상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하나의 농담으로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진실은 우스갯소리가 되거나, 피해망상증의 연구사례로 변형 가공되고 만다. 광인일기에 언급된 이 광인은 네오도 모피어스도 아닌 사이퍼에 가깝다. 이 기록을 읽는 우리의 주체적 선택은 무엇이 될 것인가. 더 깊고 다양한 해석을 얻기 위해 빨간 약을 먹고 네오가 될 수도 있고, 네오처럼 싹수가 보이는 이들을 찾는 모피어스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하고 내던지는 사이퍼가 될 수도 있다.

꼭 사회구조나 시스템 같은 문제를 말하지 않더라도 앎의 주체적 선택은 일상 곳곳에서 직면한다. 타인과 인간관계를 맺을 때는 대개 호기심으로 시작한다. 이 호기심은 상대방이 나를 유혹함에 이끌리는 것일 수도 있으나, 거기에 끌림 조차 나의 주체적 선택이다. 즉 빨간 약을 집어 삼킨 것이다. 상대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만족감도 커지나 이에 비례하여 두려움도 늘어간다. 친해지며 발견하는 나와 다른 점을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써 상대를 바라보게 된다. 그 극단은 사이퍼가 자신의 선택을 뒤집어 동료를 팔아 먹은 것처럼, 상대를 부정하고 증오하게 된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점은 가장 싫은 단점이 된다. 한때 이끌리던 그 사람이 말이다! 앎의 주체적 선택은 그 앎에 대한 책임을 포함한다. 알게 됨으로써 겪게 될 결과를 모두 떠안는다는 의식이 있어야 앎에서 오는 충격을 견딜 수 있다. 앎은 기본적으로 충격의 속성을 띠고 있다. 광인이 어떻게 미쳤는지는 작품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각성하여 주위 사람들의 이상한 눈초리를 의식하게 되고, 사람 잡아먹는 그들의 비밀을 알아챈다. 광인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는 정말 광증을 회개하고 전향한 것일까. 아니면 진실을 눈치채고 정상적인 것처럼 행세하며 적진 내부에 숨어 제2의 네오를 찾는 모피어스가 된 것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광인일기라는 텍스트를 아무렇지 않게 건네줌으로써 그 숨어있는 행간의 의미를 읽을 기회를 독자들에게 주었다는 점에 있다. 결국 앎의 주체적 선택은 작자가 대신 해줄 수 없는 일. 그가 사이퍼냐 모피어스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가 텍스트 혹은 사랑하는 연인을 읽으며 사이퍼냐 네오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앎의 주체적 선택은 주위를 둘러싼 무쇠 방을 깨부술 수 있다. 어설픈 호기심으로 한 발만 걸친 어정쩡한 자세면 숨막혀 죽는 고통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나도 이제 주체적 선택을 하리라. 삶의 모든 앎에서._(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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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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