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로써의 허무

 

 

 

 

사물을 흔드는 허무주의

  니체 평전과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을 연이어 읽으며, 허무주의라는 명제가 와닿았다. 나 역시 삶의 어느 순간, 허무의 느낌을 마주했었고 그 텅빈 느낌에 망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가장 강렬했던 허무감은 사람의 상실에서 비롯했다. 이별로 인연이 종결됨으로써, 나의 삶도 갈 곳을 잃은 채 마무리된 기분이었다. 문제는 삶의 의미였다. 삶의 이유라 생각했던 것을 상실함으로써 삶은 방황한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돈-여자-자식-직업 등등 다양할 것이다. 니체를 읽으며, 그 역시 맞서고 있는 것이 허무주의라고 여겨졌다. 신은 죽었다 라는 니체의 말은, 19세기 진화론의 탄생과 더불어 급속히 그 빛을 잃고 있는 신의 위상을 대변한다. 니체가 신을 죽인게 아니라, 주검이 된 신을 이미 죽었다고 확인해준 것이다. 그 이유는 의미를 상실한 신을 껴안고 인간이 함께 몰락하기 보다, 새로운 의미를 생성해서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무주의는 더이상 부정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극복의 대상이기 보다, 일종의 무기로써 작동한다. 왜냐하면 허무주의를 통해 기존의 가치체계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의미의 구조물을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허무는 방아쇠와 같다.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자신을 부여잡고 있는 낡은 가치를 파괴한다. 니체는 이러한 허무주의의 정신을 쇼펜하우어에게서 배운 것 같다. 삶의 실상은 고통이라는 것에 그들은 일치된 견해를 보이지만, 그에 대한 해법은 달랐다. 쇼펜하우어에게는 염세주의, 즉 실레노스의 지혜처럼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으나 일단 태어났으면 하루 빨리 세상을 등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었다. 그러나 니체는 이른바 강함의 염세주의를 추구한다. 그것은 고통을 인정하되, 거기에서도 삶의 의미를 구성하는 철학이다. 고통 속에서 삶을 이어가기 위해선, 기존 가치에 안주해서는 곤란하다. 고통을 삶의 의미로 승화할 수 있는 가치의 전도 혹은 의미의 재구성이 요청된다. 그리고 그렇게 의미화 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간만의 고유한 힘이다.

삶을 구성했던 의미들은 그것이 한번 허무의 순간을 마주함으로써 기존의 의미를 잃게 된다. 상실에서 비롯하는 일종의 의미의 공백기이다. ‘아무 의미없다’고 냉소적으로 바라보거나, 오히려 더욱 집착하거나 극단의 태도를 보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허무는 탈의미화의 작업을 수행한다. 허무로써 기존의 가치가 무력해지며, 비로소 새로운 의미를 구축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다. 허무는 망치다. 끈끈한 의미의 연결망을 박살내는 무기이다. 그래서 허무의 칼바람이 일상에서 불쑥 찾아올 때, 의미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기회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허무에 일방적으로 공격당하기 보다, 오히려 허무를 무기로써 사용할 수 있는지 탐색한다. 허무를 통해 나는 나 자신을 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 허무주의는 사물 혹은 관계 나아가 자아상을 흔들며, 고정된 자아의 신화에 도전한다.

 

 

역사적 기억으로써 자아

  나를 나라고 여기는 자아상은 천부적인 것일까? 개체는 기억으로 자기 정체성을 인식한다. 자아는 곧 기억의 총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현재의 나임을 증명해주는 것은 자신의 기억과 주변의 나에 대한 기억이다. 이 중 한 가지라도 사라지면 나는 내가 될 수 있을까? 본인의 기억상실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나를 알아보지 못해도 나는 이전의 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지 않고, 나로써 대하지 않으면 나는 이전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이러한 가정은 자아라는 것이 생각보다 굉장히 취약한 기반에 놓여 있음을 의심하게 한다. 자아가 취약할 수 있음은 그것이 기억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보면, 기억에 의해 자아는 얼마든지 그 모습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마치 프로그래밍을 하듯, 새로운 기억을 입력하면 새로운 자아가 출력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상태가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초인간적인 낯선 지평이 되지 않을까? 기억에 얽매이지 않고, 필요하면 기억을 스스로 망각함으로써 삶을 살아가게 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여기서 망각이라 함은 엄밀히 보면, 의미의 무게를 덜어냄을 뜻한다. 가벼워지면 그 기억은 자신을 짓누르지 않는다. 허무의 순간에 기존의 기억은 재평가되며 그에 따른 무게 역시 재조정된다. 가벼워진 기억은 소멸되고, 무게를 부여받은 신선한 기억이 삽입되어 새로운 자아 혹은 제2의 천성이 가동된다.

  제2의 천성은, 제1의 천성의 견고함에 맞서게 된다. 그것은 나를 형성하고 있는 기존의 강력한 기억망이다. 기존의 기억이 끈끈한 이유는, 자아 정체성의 유지를 위해 사회적으로 권장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과 가장 상이한 점은 기억을 보존하고 전승할 수 있는 능력에 있으며, 나아가 문명의 토대는 기억술에서 비롯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억은 긍정적인 반면, 망각은 부정적이며 질병에 가깝게 취급된다. 망각의 상태는 욕구만으로 충전된 동물에 가까우며,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없는 이로 여겨진다.

  이것은 일종의 기억 숭배의 경향이다. 기억은 개체별로 자아의 연속성을 유지하게 함으로써, 사회의 안정에 기여한다. 각자가 자신의 위치를 기억해서 이탈하지 않고, 사회 구성원으로의 역할을 수행한다. 요컨대 사회의 정체성이 성립된다. 집단적, 사회적 정체성의 기억을 닦고 조이고 기름칠 하는 도구로써 역사는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학문으로써 역사학이 근대에 들어와 두각을 보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19세기 서구 민족국가가 본격적으로 성립하면서, 타국과의 차별성을 도모하며 자국민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이제 그들만의 역사적 서사가 요청된다. 국가의 기획자들은 역사야말로 근대국가를 빚어내고 주민들을 하나의 깃발에 모이게 하는 효과적 접착제임을 인식한다. 이제 사람들은 각각 민족 정체성이라는 만들어진 자아에 의해 재정의된다.

  니체가 반시대적 고찰에서 비판한 역사병은 이 지점에서 생겨난다. 독일 통일제국의 인민으로써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것을 당연시하는 여론을 니체는 일종의 거대한 기억생성 혹은 기억조작으로 진단하고 우려했으리라. 그것은 이른바 역사의 이름으로! 라는 미명하에 개인의 개체성을 무시하고, 개인을 과거-국가적 정체성에 얽매이게 만드는 사슬로 작동한다. 그래서 나는 니체의 역사과잉에 대한 비판의 칼날은 근본적으로 국가주의를 향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자유-주체성의 첫번째 장애물은 자연이었으며, 그것은 종교-신으로 대체되었다. 이제 신이 그 절대적 위치를 상실한 당대에 새롭게 왕위을 엿보는 이는 다름아닌 국가인 셈이다. 신처럼 숭배되지도 않으나, 일상 속에서 교묘하게 인간을 잠식해나가는 국가의 시스템을 니체는 그만의 예민한 감각으로 감지했으리라.

  그의 시선에 포착된 학문으로써의 역사는 인간을 왜소하게 만든다. 국가는 그만의 새로운 역사학을 창조했으니, 그것은 바로 통계학이다. 평균치를 산출함으로써 이른바 중산층의 환상을 생성하고, 평균에만 도달해도 그럭저럭 안심하는 소시민적 근성을 주입한다. 중간만 가자라는 인식은 인간의 위대함에 이를 수 있는 동기를 앗아간다. 스스로의 가능성을 자기 안에서 실험하고 평가하기 보다, 다른 이들과의 비교에서만 구할 수 있는 나약함, 그것이 이른바 속물적 행태일 것이다.

 

 

허무를 체험하는 예술의 장

  만약 역사 교육이 개인의 자유-주체성을 진정으로 북돋는다면 개인은 초국가, 초민족적 상상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는 국가나 민족같은 생성된 울타리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가고자 하는 길을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으리라. 정녕 그렇게 된다면 궁극적으로 국가는 소멸할 것이다.

  이것은 작은 상상력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가족, 사회, 민족, 국가라는 마치 천성처럼 여겨지는 토대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역사-교육은 이렇게 제1의 천성으로 굳어진 기억을 해체하고 조립할 수 있도록 하는데 의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파괴를 통해 기존의 가치가 무화됨으로써 의미의 공백, 허무함이 감지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정한 배움이란 허무함을 딛고 이뤄진다. 허무로써 의미를 재평가하고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허무한 순간은 수시로 찾아오지만은 않는다. 질병, 이별, 해고처럼 상실의 순간에 예고없이 엄습한다.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인간의 정신은 대체로 잠들어 있다. 그래서 이러한 고통의 순간을 언제든 체험할 수 있도록 인간은 예술을 발명했다.

니체가 그리스 비극과 바그너의 음악극에서 발견한 가능성이, 이러한 허무의 체험이다. 예술을 통한 일종의 역할 놀이를 통해, 인간은 스스로 고통에 한 가운데로 던져진다. 예술의 참여자가 되어, 하나의 역할-다른 존재를 연기함으로써 제2의 천성은 무대에서 현실화된다. 무대에서 다른 천성을 경험한 자는, 현실이라는 무대로 돌아와 기존의 천성을 가볍게 여길 수 있는 힌트를 얻는다.

  결론적으로 삶 혹은 예술에서 경험하는 허무의 순간은, 실제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삶을 붙들고 있던 낡은 가치는 허무로 인해 도태되고, 허무의 체험으로 인해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 허무의 체험은 이른바 시대의 산물인 자신의 모든 것을 의심하고 질문하는 것과 같다. 기억과 그로 인해 형성된 모든 것을 끝없이 회의하는 태도이다. 나는 니체로부터 허무를 체념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삶의 힘으로 승화하는, 인간의 의미화하는 능력에 대해 배운다. 인간은 의미로 인해 죽기도 하지만, 살기도 한다. 그 의미를 정하는 자는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우리는 의미의 입안자인 동시에 집행자인 스스로의 무한한 능력을 언제나 환기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언제든 우리를 의미로 포섭하기 위해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부터 맞서 싸울 수 있으리라_(끝)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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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그 자체에 내재한 충동에 의해 변증법적으로 지속된다니체의 역사구분법을 원용하면 현재는 아폴론-소크라테스적 원리가 한계에 이르고 디오니소스적 힘이 꿈틀거리고 있다그리스 인민들이 이룩한 신화세계의 기획으로그들은 살아갈 수 있는 가상적 안전지대를 확보했다이처럼 신()이란 현상은 그 최초 설정단계에선 집단적 인간의 욕망이 정교하게 설계된 건축물과 같았다신의 세계를 통해 그리스 인민들은 자연에서 접하는 공포와 전율에 의미를 부여하고스스로의 삶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되었다엄숙하고 절제된 그리스도교의 신적 형상이기보다지극히 인간적인 정념을 지닌 신들의 행태를 거울로 비추어 보며그리스 인민들은 자신의 인간적 삶에 안도한다그렇게 인간은 스스로 신적 존재를 자처하고이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속성을 지닌 이른바 영웅적 존재의 비극적 이야기로 자극된다.

 

하지만 신을 조립한 설계자들의 후예는 그것의 설계의도를 망각하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신은 불가해한 세계의 관념과 이상이 뭉쳐 빚어진 거대하고 단일한 관념으로 숭배된다신은 의미의 과잉이다신앙은 미지의 것을 해명해주는 유일한 창구로 기능하고인간의 유아적 의존성을 부추긴다이제 니체가 신은 죽었다’ 라는 사실 확인과 함께 비로소 인류는 유아기적 단계를 벗어나 청소년이 되었음을 실감한다그리스 신화에는 크로노스가 아버지 신인 우라노스를 살해하려는 거세 모티프가 있다거세는 곧 생식력창조능력을 박탈하는 것이다아버지-신으로써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행해진 거세 행위는창조 능력을 가진 자만이 신적 위업을 달성할 수 있다는 상징과 같다.

 

아버지를 거세하고 최고신이 된 크로노스와 달리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자신이 만든 세계를 스스로 파괴하고 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방황하는 청소년의 모습을 닮았다다윈으로 알려진 새로운 세계는 인간의 구세계를 난도질했고이에 인류는 경악한다도대체 왜인간은 여전히 아버지-신 앞에 엎드린 어린아이와 같으며자신이 이미 생식능력을 갖춘 자로 성장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이것이 근대의 위기이며염세주의 혹은 허무주의의 도래인 한편인류의 사춘기적 홍역이다.

 

인간이 스스로 창조설계자로서 자각했던 시절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제우스가 크로노스를 물리치고 스스로 최고신에 오른 것처럼제우스의 모사 혹은 현현(顯現)인 그리스 인들은 이미 인간 스스로 세계의 정점이 될 수 있음을 아폴론적 가상으로 예감했다이는 근대에 이르러서야 다윈의 탁월한 이론 덕분에 다시 증명되었고 니체의 정당한 선언으로 환기되었다인간은 자신의 창조능력을 인식하고 그것을 표출함으로써 당당한 삶을 구가할 수 있다다윈은 인간과 동물이 같은 기원에 있음을 알아냄으로써인간이 설계한 신에 의한 안락한 종속 혹은 자발적 노예상태에서 인간을 구출했다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러서 이뤄낸 구원인가인간이 설계자인 자신의 위치를 자각할 수 있을 무렵그럼에도 반신반의하는 인간들에게 니체는 사자후를 내뿜는다두려워하는 인류여그대는 의심하지 마라인간은 신을 만들고 또 부수는생성과 파괴의 이중적 충동을 융합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절대적 인간 긍정의 정신을 찬양하고이를 부정하고 의혹의 늪에 침잠하려는 교활한 욕망을 분쇄해야 한다.

 

소크라테스 이후 오늘날까지 인류 스스로 결박 당한 신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과정이었다면, 22세기 이후의 세계는 인류가 창조하고자 욕망하는 또다른 신인 인공지능과의 대립이 화두로 떠오를 것이다신이 그랬듯 인공지능 역시 인류에 의해인류를 위해인류의 인공지능에서 기원한다인류가 신을 창조하고 범한 맹목적 오류처럼또다른 신적 존재인 인공지능에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인가아니면 새로운 윤리를 창안할 것인가가 관건이다인류는 이처럼 생성과 파괴의 우주적 원리를 내재한 창조적 존재로써그 쾌감으로 삶을 지속시킨다신이든 인공지능이든 인간은 자신의 대용물을 섬기든지 혹은 부리든지 양자택일을 강요당한다.

 

인간은 그가 창조한 예술작품으로 파괴와 창조를 거듭할 뿐이다그러나 결코 예술작품은 인간 그 자체의 목적이 될 수 없다그는 그 스스로 예술작품이 되어야 한다피조물은 조물주 생()의 근원이 될 수 없으며피조물에 의존하는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그는 단지 자신이 만든 아름다운 모래성을 쌓고 다시 부술 권능이 있음을 영원히 자각하는 것으로 족하다조물주는 피조물에 개의치 않는다그는 피조물의 황홀함을 물리치고 그것에 안주하지 않고 홀연히 길을 떠난다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인민들은 정녕 이런 일들을 했던 것인가그렇게 자기 스스로를 예술 작품화한 것이 그리스 비극일까?

 

그리스 비극의 원천은 디오니소스적인 세계의 근원을 아폴론적 가상으로 펼쳐낸 것에서 비롯한다세계가 고통으로 이뤄져 있다는 근원적 진실이러한 고통은 개체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힘을 외부에 투사할 때그에 맞서는 강력한 반발력을 지각할 때 실감하게 된다그 고통의 끝에는 죽음이 자리한다이를 지켜보며 그리스 인민은 망연함에 전율한다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차이는 실로 명확하다양자 모두 세계의 실상이 고통임을 간파했지만쇼펜하우어는 이를 통해 의지의 소멸을 주장한 반면 니체는 정확히 그 반대인 강력한 의지의 배양을 주창했던 것이다그럼 그리스인들은 어떤 길을 선택했는가?

 

니체의 스승이 그리스인들인 만큼그들에게는 유별난 무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아폴론적 가상즉 의미화를 통한 창조의 능력이었다이것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고스스로 납득하게 만들어 삶을 살아갈 만한 세계로 재창조하게 한다이제 그들에게 전율로 다가오던 세계는 욕망의 영역으로 변모한다실레노스의 지혜는 무()를 향한 의지에서삶을 향한 열망으로 전도된다이것이 그리스인들이 창조한 올림푸스 신들의 세계이며아폴론적 정신이 지배한 서사시적 그리스 인민의 질서다그러나 이것은 디오니소스적 진실을 그저 잠시나마 가리고 있는 것일 뿐가상은 결코 진실을 외면할 수 없다디오니소스적 진실은 고통과 죽음이다그것은 곧 개체인 나 자신이 이 우주와 동떨어지지 않은 존재임을 상기시킨다죽음은 인간적 관점에서는 괴로운 일이나우주적 관점에서는 우주로 돌아가는 합일을 의미한다그래서 디오니소스적 속성은 개별성을 극복한 망아(忘我) 상태개체에서 벗어난 무아(無我)의 경지를 가리킨다디오니소스 제례에서 행해진 광란적 도취를 통한 경계의 철폐예컨대 주인과 노예를 구분하지 않는 위계의 무화인간적 질서를 무시한 집단 난교 등은 이러한 짐승과도 같은 원초적 욕망을 표출한다따라서 디오니소스적 속성만으로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뚜렷이 부각될 수 없다.

 

이렇게 아폴론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은 단독으로는 저마다 한계가 분명하며그들이 오랜 세월 투쟁을 거듭해 온 것 또한 도무지 함께 어울릴 수 없는 특징에 기인한다그런데 만약 이 두 속성이 결합을 한다면그들이 오랜 투쟁 끝에 마침내 장엄한 결혼식을 올리는 사건이 벌어진다면그것은 세계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의미화 함으로써근원에 직접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신기원의 창조리라나는 니체가 가리킨 이러한 창조의 순간을 그리스 인민이 도달한 비극의 탄생이라고 생각한다요컨대 그리스 인민은 그리스 비극 예술의 창조로써세계의 디오니소스적 본질에 접속하는 동시에 그것을 아폴론적 가상으로 구현한 것이다이제 그리스 인민은 더 이상 세계의 본질에 대해 외면하지 않고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고도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을 생산한다오히려 세계의 본질로부터 더욱 강한 삶의 추동을 느끼게 된다나는 그러한 절정에 도달한 인간상을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에서 강렬히 예감한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의 전성기에 등장한 두 가지 인간 유형을 비교하며 제시한다그들은 바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적 인간과 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이다이들을 통해 그리스인의 이른바 강건한 명랑성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오이디푸스는 지혜로운 자이다불가해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해결할 정도로 지혜의 오만함에 사로잡힌 그는자신의 운명에는 한없이 무지하고 무력했다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몸을 섞는 가혹한 운명에 절규하여도 그는 결코 운명에 의해 파괴당하지 않는다눈먼 오이디푸스는 광야를 떠돌며 테세우스의 나라에 정착하여 새로운 신탁을 부여 받는다이제 그는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에서안녕을 가져오는 존재로 변신한다고난을 겪고 그것을 극복하는 자그것이 반신반인 즉 영웅이다여기서 나는 문득 인간적 고뇌는 디오니소스적 속성이며그것을 극복하는 신적 힘은 아폴론적 속성이라 느껴진다그리고 그것이 합쳐진 존재가 반신반인의 영웅이며바로 비극으로 구현된다고 할 수 있다비극의 주인공이 일상적 존재가 아닌 영웅적 존재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이디푸스적 영웅은 능동성이 결여되어 있다그는 한없이 수동적인 영웅이다자신의 운명을 알아채지 못하고 고통받고 그것에 단지 파괴되지 않을 뿐이다.

 

운명에 결코 파괴되지 않는 인간도 굉장하지만고통을 직시하고 그것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인간형이 있으니 그가 바로 프로메테우스적 영웅이다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주인공인 프로메테우스는 신 앞의 단독자(單獨者)반항적 인간의 원형이다신에게 맞서는 위대함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한다위대함은 고통을 뜯어먹고 자란다반항적 인간은 곧 예술적 인간과 동일하다예술가는 대중을 의식하지 않는다그는 오직 자신의 디오니소스적 심연만을 응시할 뿐이다그리고 그 심연을 아폴론적 언어의 가상으로 표현해내는 스스로를 오롯이 관조한다여기서 아폴론적 속성과 소크라테스적 속성을 잠깐 비교하면둘은 닮은 듯 다르다아폴론적 속성이 타락하고 변질한 극단이 소크라테스적 이론형 인간의 모습이라 생각한다아폴론적 충동의 근본은 관조에 있으나소크라테스적 특징은 논리와 이성에 의한 해명이다소크라테스적 인간은 오직 아폴론적 가상-표상하는 능력을 논리-이성적 설명을 위한 도구로 부릴 뿐이다그래서 둘은 닮아 보이나 다르다.

 

프로메테우스의 파멸적 예언에 제우스 신은 전전긍긍한다신조차 불안에 떨게 만드는 저 반항적 인간이란그는 저항했고 그로인한 벼락을 맞아 천 길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이렇게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시선에서 봤을 때범죄를 저지른 자다그는 자발적으로 신적 질서를 범했으며가혹한 천벌도 그의 선택을 막을 수는 없다인간은 이런 비극적 영웅으로부터 전율하고 감화되며문득 자신이 이 거인을 닮은 존재임을 자각하게 된다그렇게 한 인간은 비극으로부터 자신에게 내재한 프로메테우스적 영웅의 모습을 생생히 감지한다.

 

 

오이디푸스와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인간형과 대조되는 유형으로 니체는 셈족의 신화를 거론한다이미 여기에 니체의 반()그리스도교적 사상이 배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아담과 이브라 하는 호기심 많은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을 표출한 자들그러나 넘지 말아야할 신적 질서를 침범한 그들은 신으로부터 죄를 받는다이른바 타죄(墮罪) 신화 혹은 원죄(原罪) 신화로 불리는 문제이다그들은 너무나도 온순하고 무저항적인 태도를 고수했다니체의 표현대로라면 마치 노예들처럼호기심은 세계의 본질즉 고통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다고통을 살짝 들여다본 그들은 이내 눈을 감아버린다그리고 감은 눈 속에 펼쳐지는 낙원으로 본질을 전도한다그들이 프로메테우스적 존재였다면니체는 스스로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을 자처하며 이러한 전도된 세상에서 단독자로써의 전투를 감행한다그는 소크라테스의 유혹에서 비롯해 셈족으로 이어져 내려와마침내 거대한 무리를 형성한 대중의 저열함에 선전포고를 한다그는 이 전쟁의 사령관이며선지자이고절벽의 프로메테우스이다._()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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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일주일이 지났지만 기억을 되새기고자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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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이드 프로젝트 8주 세미나를 뒤로 하고, 닥터 벤야민이 파리의 거리를 산책하며 수집한 무수한 인용 문구 가운데 나를 사로잡은 문장은 다름 아닌 '예술은 상품의 시녀가 되었다'였다. 흘끗 보면 그저 예술이 상품화 되었다는 일반 현상을 적시한 문장일지 모르나, 당대 유행한 탐정의 시선으로 빙의되어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기엔 그 이상의 뭔가 있는듯 하다. 이를테면 범죄 현장의 비린내 같은거 말이다, 흐음..

 

 

뭔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무섭.. ㄷㄷ

 

 

벤야민 식으로 풀어본다면, 예술의 상품화는 곧 아우라를 상실한 예술이다. 예술 그 자체에는 뭔가 오리지널 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분위기-'아우라'가 있는데, 근대의 인쇄 혹은 사진과 같은 복제 기술의 발명으로 그러한 면이 희석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단지 원본이 복제되어 유통되는 현상의 문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복제된 예술 작품을 즐기는 나를 포함한 관람자 그 자체가 논의의 핵심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복제 기술 덕분에 우리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간편하게 위대한 명화 혹은 건축, 음악 등을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시공간에서 감상할 수 있다. 이런 기술이 없던 시절을 잠시 상상해보자. 예컨대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석달간 시간들여 돈써가며 해당 작품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 그런 힘겨움을 이제는 굳이 거치지 않아도 된다. 원본 거의 99.9% 동일한 복제 이미지를 휴대전화 혹은 모니터로 3초면 검색하여 찾아볼 수 있다.

 

뭐가 문제인가? 이런 왓어원더풀한 세상, 기술복제 시대가 안겨준 판타스마고리아도 제법 쓸만하지 않은가? 영화 '클릭'에서는 이러한 욕망을 극한으로 보여준다. 인생의 리모콘으로 귀찮고 번거로운 순간은 전부 '빨리감기'해서 스킵해버리고, 달콤하고 환희의 순간만 하이라이트 포커싱하여 데려다준다. 그렇게 인생의 서사가 거세된 인간의 말로를 알고 싶으면 꼭 보시라!

 

 

빨리감기 하다 인생 자체를 스킵해버린 이의 웃지못할 우화

 

 

그런데 우리는 석달 걸릴 것을 3초 안에 해결했을지 모르지만, 석달의 여정을 통해 생성할 수 있는 경험의 아우라를 상실했다. 요컨대 아우라는 단지 원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 뿐만 아니라, 그것을 경험하는 자의 시선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 쉽게 얻은 것에는 오래 눈길이 머물지 않는다. 그러나 품을 들인 것은 유심히 들여다 보게 된다. 거기서 바로 아우라가 생성된다. 벤야민은 이것을 '시선을 돌려보낸다'라고 이야기한다. 즉, 주체가 깊은 시선을 보내면 대상은 그에 상응하는 시선을 돌려보내고 그 교차점에서 '아우라'를 '경험'할 수 있다.

 

말하자면 아우라는 관람하는 자, 좀 더 실감나게 표현하면 경험하는 존재 스스로 생성하는 특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당신이 아우라의 원천이다. 내가 세상을 깊고, 강렬하게 경험하면 할수록 아우라의 농도는 짙어진다. 그리고 그에 따라 예술 작품이든 풍경이든, 책이든 뭐가 되었든 간에, 외부 세계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자극에 도취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예술적인 삶의 향연일듯.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런 예술적인 삶은 현대인(이라 쓰고 나라고 읽는다)에게 요원한 형국이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했듯 이미 예술이 상업의 시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구는 말하자면, 경험의 아우라를 생성하는 인간이 살해당한 범죄 현장을 가리킨다. 그런데 단지 타살로 치부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인간 스스로 자초한 자살에 가까워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를 나 역시 일상에서 매순간 반복하고 있다. 따라서 삶에서 얻어지는 여러 경험들은 진정한 아우라.. 뭐랄까 숙성하여 완성되어가는 예술작품이 되기 보다, 일회용 상품처럼 쓰고 버려지는 그 무엇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런지.

 

스스로의 경험을 일회용으로 취급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인격 살해라고 말해도 무리 없다. 나 자신은 상품을 소비하듯 내 인생을 소비하고, 일회용품처럼 폐기될 운명을 예감한다. 그것을 멈추기 위해선 어떤 경험이라도 아우라의 향기가 스며들게 기억하는 작업이 요청된다. 이런 후기가 그런 기억의 단초가 될지도. 마치 프루스트의 마들렌 처럼 말이다._(끝)

 

P.S) 이렇게 보니 닥터 벤야민은 파리의 밤거리를 산책하기 보다 탐사했고, 수집이 아닌 탐문을 했다. 자본주의의 적나라한 범죄현장을 추적한 수사반장 벤야민..! 커헉..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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