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노신선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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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루쉰 (선학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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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정신의 왜소함

나는 90년대 후반에 대학에 입학했다. 80년대 사회변혁을 주도했던 학생운동은 퇴조했고, 취업과 자기계발 등 개인적 생존이 학생들의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는 시기였다. 때마침 IMF가 터져 경제적 여건은 악화됐고,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심화됐다. 80년대 학생들이 사회참여적이고, 90년대 학생들은 이기적이라는 단순 도식은 곤란하다. 다만 시대적 배경에 의해 자신의 삶을 어떤 스케일에서 바라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궁금했다. 채운 선생님도 요즘과 예전 젊은이들의 고민의 규모는 무척 다르다고 했다. 자기 먹고 사는 일에 집중하는 것만도 버거운 요즘, 사회적 이슈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 고민이 내 개인적 고민과 분리될 수 있을까? 예를 들면 개인의 생존문제는 나만 겪는 문제가 아니다. 모두가 어떻게 먹고 살까에 대한 실존적 고민이 있고, 각자의 영역에서 분투하고 있다. 개인적 고민이 모두의 고민, 즉 사회적 문제인 셈이다. 그러나 이를 자신만의 문제라고만 생각하면 시야는 현격히 좁아진다. 개인의 한정된 역량에서 문제를 바라볼 때, 도출되는 해결방안도 국소적이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 고민(혹은 욕망)을 개인 안에서만 충족하려고 할 때, 인간 정신은 왜소해진다고 생각한다.

 

개인적 비전은 사회적 비전과 합치되어야 한다

나는 공부를 잘하고 싶고 글도 잘 쓰고 싶다. 아마 나와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도 대개 그런 바람이 있을 것이다. 이 고민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대중지성 학인들이 공유하는 고민이다. 여기까지 인식이 진전될 때, 타자는 소외되지 않고 소통할 수 있는 존재로 변한다. 주의할 점은 타자를 개인의 고민을 해소하는 도구로 이용하는 행태다. 이런 방식은 결국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한다. 나의 고민이 모두의 고민, 즉 사회적 문제임을 깨닫는 것은, 내 문제 해결 못지않게 타자의 문제 해결도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럼 어디까지 타자의 범위를 설정할 것인가? 내 문제의식을 한국사회 전반, 나아가 우주적으로 확장할 수도 있다. 타자의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갖는다는 건 그렇게 멀리까지 갈 것 없다. 바로 내 주변,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타자들의 문제에 귀를 기울이면 족하다. 대중지성 공부를 예로 들면, 글을 잘 쓰고 싶은 개인적 비전은 대중지성이라는 집단 구성원의 비전과 만난다. 개인적 비전이 사회적 비전과 합치되는 순간이다. 더 이상 개인과 사회는 분리되지 않는다. 내 문제가 네 문제고, 우리는 함께 고민할 수 있으며 더 고양된 정신을 추구할 수 있다. 그것이 글쓰기의 문제라면, 이전보다 숙성된 글을 써낼 수 있는 것이다. 개인과 집단은 동시에 성장하며, 그것은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스스로 고귀한 자

나의 고민을 사회적 맥락에서 생각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어쨌든 우리는 눈앞의 생존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대중지성 1년 공부를 하며 가장 끌린 텍스트는 루쉰의 [마라시력설]이다. 악마파 시인들의 힘으로 번역되며, 영국의 시인 바이런과 셸리 등이 주요 인물이다. 이들은 종교권력이 지배하던 당시, 종교의 허위를 공격하고 그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했다. 왕따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득권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들이 추구한 정신은 뭘까? 나는 이제부터 그것을 정신적 귀족주의라고 부를 것이다. 그리고 이는 개인적 비전을 사회적 비전과 합치하는 삶의 태도임을 주장하겠다.

정신적 귀족주의는 사치스럽고 방탕한 귀족의 삶을 뜻하지 않는다. 고귀함은 돈과 신분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우리가 경제력에 비례하여 그 사람의 인격이 고매하다고 하지 않듯이 말이다. 전통적인 개념의 귀족은 자신의 신분을 공고히 하고, 평민을 착취해 부를 축적하는 등 지극히 개인의 비전만을 추구한다. 이들은 존경 받기보다 타도된다. 고귀함은 바로 의지의 문제이고, 개인의 비전과 사회적 비전을 합치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누구나 고귀한 인간이다. 모두가 사회운동에 투신하라는 게 아니다. 내 고민이 내 것만이 아님을 자각하고, 주변의 타자와 소통하며 공동의 문제로 논의하려는 의지가 중요한 것이다. 루쉰이 짚어낸 바이런의 개인적 고민은 형식적인 도덕과 비루한 습속이 그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다른 사람들도 함께 겪는 보편적 문제임을 깨닫고, 개인적 고민을 끊임없는 사회적 소통과 실천으로 해결을 모색했다. 그가 남다른 점은 소통의 스케일이 대륙을 넘나들고, 실천의 강도가 아주 높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의 삶에서 개인적 비전을 사회적 비전으로 합치하는 하나의 역할 모델을 발견했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에 대해 다음 단락에서 논의할 것이다.

 

고귀한 자의 덕목, 반항

나는 바이런의 작품을 미처 읽지 못했다. 여기서 말하는 바이런의 얘기는 모두 루쉰의 입을 빌려서 하는 것이다. 즉 루쉰의 사상이라 해도 무방할 듯싶다. 루쉰은 [마라시력설]에서 바이런을 이렇게 평한다. 자존심이 대단한 사람은 항상 끊이지 않고 세상과 세속에 대해 분개하고 싫어하며 거대한 진동을 일으켜 대척되는 무리와 한바탕 싸움을 일으킨다. (중략) 그리하여 이로 인해 점차 사회와 충돌하고, 이로 인해 점차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한다. 바이런 같은 자가 바로 그 중의 하나이다. 개인적 비전을 사회적 비전으로 합치하려면, 먼저 개인적 비전에 대해 치열해져야 한다. 나 자신의 실존적 문제에 관심이 없으면 사회적 비전까지 애당초 갈 수조차 없는 것이다. 생각보다 생각 없이 주어진 대로 사는 경우가 많다. 남들 다 학교 가니까 나도 가고, 남들 다 취업하니까 나도 하는 등, 환경과 주변 배치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이건 루쉰이 말한 철방에 갇혀 잠든 사람들이기도 하다. 거기서 일단 일어나야 옆에 깨어난 다른 사람과 이것이 내 문제 일뿐만 아니라, 너와 나 공동의 문제임을 논의할 수 있다. 바이런의 무기는 바로 반항이다. 반항이야말로 잠든 나를 깨어나게 할 수 있는 삶의 태도다.

바이런은 모든 사물은 다 습속이라는 지극히 잘못된 저울에 의해 가늠된다. 이른바 여론이라는 것은 실로 큰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론이라는 것은 암흑으로 전지구를 덮어 버린다고 말했다. 전통과 습속은 다 나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바람직한 전통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 또한 옛 사람이 이룩한 것인데 어찌 완벽하겠는가? 이 점에 대해 오늘을 사는 사람은 더 나은 삶을 위해 그것을 고쳐 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 반항의 정신은 전통을 뜯어 고치는데 가장 효과적이다. 반항하는 자는 만사에 의문을 품고, 왜 그래야 하는지 분노하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제서야 세상에 숨어있던 다른 분노하는 자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들과 만나 철방을 부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비로소 개인적 분노는 사회적 분노와 만나 연대를 형성할 수 있다. 출발점은 반항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고귀한 자의 덕목, 독립

반항하는 자는 전통을 공격하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소외된다. 바이런은 당대에 사탄으로 매도되었고, 개인적 비전을 사회적 비전으로 합치하려는 의지는 평가절하되었다. 루쉰은 [마라시력설]에서 바이런과 입장이 유사한, 입센을 인용하며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가장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대중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자기 확신이 있어야 가능하다. 보들레르는 진정한 영웅은 홀로 즐긴다, 예술가를 지배하는 자는 그 자신일 뿐이다. 그는 다가올 세기들에게 자신의 고유한 작품으로만 약속을 한다. 그는 자신만을 보증한다고 말했다. 나는 독립 의식이 있는 자야말로 자기만의 길을 뚫고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인식은 루쉰의 길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이 걸어가면 길이 생기는 것이다라는 말에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독립적이기 때문에 타자와 함께하면 즐겁고, 혼자 있어도 불행하지 않다. 그에게 타자는 대등하게 만나 소통하는 존재이지, 자신의 결여를 채우기 위한 대용물이 아니다. 독립적인 존재는 그 자체로 완전하다. 여기서 성 빅토르 휴그의 말을 인용해보자.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이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나는 이 말을 ~없으면 나는 어떨까? 라는 물음으로 전환한다. 돈이 없으면, 연인이 없으면, 집이 없으면 나는 어떨까라고 물으면 내가 의존하고 있던 삶의 지반이 드러날 것이다. 이렇게 여러 항목들을 하나하나 소거해 나가면 절대 없어서는 안될 최소한의 경계가 있으리라.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딱 그만큼 독립적인 존재다. 한 달에 생활비로 몇 백만 원이 없으면 나는 안될 것 같아, 라고 판단하면 나는 몇 백만 원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자이다. 그에게 월급 몇 백만 원은 고향과 같다. 그러나 그것을 다 버리고 타향으로 여길 수 있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에 논의할 문제이기도 하다.

 

고귀한 자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한다

바이런은 철저히 반항과 독립의 덕목을 실천하며 살았다. 습속을 거부하고 대중에 영합하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새로운 삶의 양식을 구축했다. 그는 개인의 비전을 옹골차게 추구했으나 이기적 욕망 충족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타자와 공명했다. 루쉰이 바이런의 영향을 받아 그를 중국에 소개한 것도 이런 까닭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개인적 비전을 사회적 비전으로 합치한 위대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음을 삶으로 몸소 보여주는 자는 참으로 귀한 존재다. 이것은 출구(出口)이며 변신이기도 하다. 우리는 항상 막다른 통로에서 낙담하나, 도처에 뚫려있는 골목을 발견할 때 안도한다. 그래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 출구를 뚫을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행위다. 이는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 예술가적 태도이기도 하다. 나는 보들레르가 주창한 댄디즘 즉, 정신적 귀족주의가 이를 잘 말해준다고 본다. 보들레르의 예술가는 예술작품을 돈 때문에 아닌, 예술가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창조한다. 그러한 자존심은 반항과 독립이라는 덕목에 기반하고, 끊임없이 고민한 실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들의 작품은 탈전통, 탈규범화 되었으며 대중의 요구를 배반하고, 항상 새로운 스타일(양식)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삶을 조형하는 예술가가 많을수록, 우리의 인생은 한 가지 척도에 수렴되지 않을 것이다. 다양한 척도와 삶의 양식을 만드는 일, 그게 내가 살고 타인도 함께 사는 길이다.

 

정신적 귀족주의는 일상에서 이뤄진다

내가 바이런에 끌린 것은 개인적 욕망과 관련 있다. 무엇보다 인간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싸운 그의 영웅적 삶이 멋졌다. 명예욕이 많아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내가 좋아할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영웅이 되기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투쟁했다고 보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그가 분노한 세상의 습속과 허식은 정말 그 자신이 천성적으로 견딜 수 없는 문제였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투쟁은 그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려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자기 문제에 눈감지 않고 끊임없이 천착해 뚫고 나가다 보니, 어느새 개인의 비전이 사회적 비전과 합치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회와 인류를 위해 애써 사명의식을 갖지 않아도, 내 문제가 곧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를 인식하기 위해선 먼저 내 문제부터 깊이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상을 버려두고 사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처하는 문제가, 바로 자기 삶과 사회비판의 불일치이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 고민을 줄기차게 물고 늘어져야 한다. 글공부를 하고 글쓰기로 세상에 영향을 주겠다는 야망은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자신의 문턱을 넘는 것에서 출발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글을 쓴 이유는 항상 거대 담론에 관심이 가있고, 지금 내 문제를 살피지 못하는 나의 문턱을 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 조금이나마 시선이 내 주변으로 향하니 새로운 문턱이 보일 것 같다. 이 문턱도 정신적 귀족주의자의 덕목인 반항과 독립의 정신으로 뛰어넘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개인적 비전과 사회적 비전은 함께 나아가며 생명력을 얻을 것이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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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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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지 2011.01.04 19: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음을 울리는 글 잘 읽었습니다. 돈이 부처님 하느님 예수님이 되어 버린 이 엄혹한 시대에 글로 나를 넘고,
    새로운 삶과 사유의 방식과 지평을 열어젖힌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아요. 사유와 삶을 일치시키는 문제도
    마찬가지고요. 더 깊이 사유하고 더 잘 쓰고 싶다는 열망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쓰면 쓸수록
    막막하게 밀려오는 가슴속의 이 먹먹함은 도대체 무엇인지. 세상 쓴맛 덜본 순둥이의 불행한 로망인지.
    아니면 세상이 두쪽 나도 붙들고 있어야 할 진실한 낭만인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하지만 어쩌면 제일 나은 건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아닌지.

    • Favicon of http://mindseeker.tistory.com BlogIcon 지장보리 2011.01.05 2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배부른 소크라테스는 형용 모순이 아닐런지요? ^^
      그가 배고프다는 건 질문과 사유를 멈추지 않는다는 얘기인데, 이를 멈추면 더이상 소크라테스가 아니겠지요.

      도지님께서 말씀하신 바.. 암요, 쉽지 않지요. 저도 항상 글 쓸때면 모니터만 하염없이 바라본답니다. -_-;
      새로운 삶.. 사유의 지평.. 뭐 다 좋지요. 중요한 건 지금 쓰는 글 한 꼭지라도 곰곰이 생각을 기울이는게 참 중요한 듯 싶습니다. 많이 읽고 쓰는 일도 좋으나, 한 줄을 쓰더라도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는 거지요. 밥을 꼭꼭 씹어 먹듯이 말이죠.

      물론 저도 못하는 것입니다만.. --;
      글을 쓰고 거기에 시간과 공력을 투입하기에는 다른 재미난 것들이 꽤 많단 말이지요. 집중이 안되는 이유는 이런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새해에 과감히(!) 제가 좋아하는 NBA 시청을 끊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그거 보는 시간을 책 읽는 걸로 메꾸려 합니다.

      애니웨이.
      도지님의 그 '먹먹함'이 참으로 궁금하군요.
      그것이 무언지 한 번 생각을 오랜 시간 기울여 보십시오. 뭐 진단하신대로 순둥이의 불행한 로망일수도, 진실한 낭만.. 무엇일수도 있겠죠. 그럼 로망은 무엇이고 낭만은 뭔지 스스로 그리고 남들도 공감할 수 있게 풀어낸다면 그것이 한 편의 훌륭한 글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도지님의 물음도 해결할 수 있을 뿐더러, 같은 고민을 품고 있는 이들도 덩달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니 큰 보시를 베푸는 거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

      자주 들러주시고 놀러와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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