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일주일이 지났지만 기억을 되새기고자 적어봅니다.

 

...

 

아케이드 프로젝트 8주 세미나를 뒤로 하고, 닥터 벤야민이 파리의 거리를 산책하며 수집한 무수한 인용 문구 가운데 나를 사로잡은 문장은 다름 아닌 '예술은 상품의 시녀가 되었다'였다. 흘끗 보면 그저 예술이 상품화 되었다는 일반 현상을 적시한 문장일지 모르나, 당대 유행한 탐정의 시선으로 빙의되어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기엔 그 이상의 뭔가 있는듯 하다. 이를테면 범죄 현장의 비린내 같은거 말이다, 흐음..

 

 

뭔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무섭.. ㄷㄷ

 

 

벤야민 식으로 풀어본다면, 예술의 상품화는 곧 아우라를 상실한 예술이다. 예술 그 자체에는 뭔가 오리지널 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분위기-'아우라'가 있는데, 근대의 인쇄 혹은 사진과 같은 복제 기술의 발명으로 그러한 면이 희석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단지 원본이 복제되어 유통되는 현상의 문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복제된 예술 작품을 즐기는 나를 포함한 관람자 그 자체가 논의의 핵심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복제 기술 덕분에 우리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간편하게 위대한 명화 혹은 건축, 음악 등을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시공간에서 감상할 수 있다. 이런 기술이 없던 시절을 잠시 상상해보자. 예컨대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석달간 시간들여 돈써가며 해당 작품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 그런 힘겨움을 이제는 굳이 거치지 않아도 된다. 원본 거의 99.9% 동일한 복제 이미지를 휴대전화 혹은 모니터로 3초면 검색하여 찾아볼 수 있다.

 

뭐가 문제인가? 이런 왓어원더풀한 세상, 기술복제 시대가 안겨준 판타스마고리아도 제법 쓸만하지 않은가? 영화 '클릭'에서는 이러한 욕망을 극한으로 보여준다. 인생의 리모콘으로 귀찮고 번거로운 순간은 전부 '빨리감기'해서 스킵해버리고, 달콤하고 환희의 순간만 하이라이트 포커싱하여 데려다준다. 그렇게 인생의 서사가 거세된 인간의 말로를 알고 싶으면 꼭 보시라!

 

 

빨리감기 하다 인생 자체를 스킵해버린 이의 웃지못할 우화

 

 

그런데 우리는 석달 걸릴 것을 3초 안에 해결했을지 모르지만, 석달의 여정을 통해 생성할 수 있는 경험의 아우라를 상실했다. 요컨대 아우라는 단지 원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 뿐만 아니라, 그것을 경험하는 자의 시선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 쉽게 얻은 것에는 오래 눈길이 머물지 않는다. 그러나 품을 들인 것은 유심히 들여다 보게 된다. 거기서 바로 아우라가 생성된다. 벤야민은 이것을 '시선을 돌려보낸다'라고 이야기한다. 즉, 주체가 깊은 시선을 보내면 대상은 그에 상응하는 시선을 돌려보내고 그 교차점에서 '아우라'를 '경험'할 수 있다.

 

말하자면 아우라는 관람하는 자, 좀 더 실감나게 표현하면 경험하는 존재 스스로 생성하는 특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당신이 아우라의 원천이다. 내가 세상을 깊고, 강렬하게 경험하면 할수록 아우라의 농도는 짙어진다. 그리고 그에 따라 예술 작품이든 풍경이든, 책이든 뭐가 되었든 간에, 외부 세계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자극에 도취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예술적인 삶의 향연일듯.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런 예술적인 삶은 현대인(이라 쓰고 나라고 읽는다)에게 요원한 형국이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했듯 이미 예술이 상업의 시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구는 말하자면, 경험의 아우라를 생성하는 인간이 살해당한 범죄 현장을 가리킨다. 그런데 단지 타살로 치부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인간 스스로 자초한 자살에 가까워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를 나 역시 일상에서 매순간 반복하고 있다. 따라서 삶에서 얻어지는 여러 경험들은 진정한 아우라.. 뭐랄까 숙성하여 완성되어가는 예술작품이 되기 보다, 일회용 상품처럼 쓰고 버려지는 그 무엇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런지.

 

스스로의 경험을 일회용으로 취급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인격 살해라고 말해도 무리 없다. 나 자신은 상품을 소비하듯 내 인생을 소비하고, 일회용품처럼 폐기될 운명을 예감한다. 그것을 멈추기 위해선 어떤 경험이라도 아우라의 향기가 스며들게 기억하는 작업이 요청된다. 이런 후기가 그런 기억의 단초가 될지도. 마치 프루스트의 마들렌 처럼 말이다._(끝)

 

P.S) 이렇게 보니 닥터 벤야민은 파리의 밤거리를 산책하기 보다 탐사했고, 수집이 아닌 탐문을 했다. 자본주의의 적나라한 범죄현장을 추적한 수사반장 벤야민..! 커헉..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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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이 겪은 20세기 당대의 군중은, 그 자신에게 피부로 와닿는 공포였던 것 같다. 그러한 감정은 19세기 초, 대도시라는 낯선 공간에 던져진 이방인들이 서로를 의심스레 바라보던 시선과 닮아있다.

나 지금이나 군중에 대한 공포는 결코 해소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군중에 대한 공포감은 '몰이해'로 설명될 수 있다. 아무런 공통분모가 없는 이들은 조용필 형님의 불후의 명곡 '꿈'의 노랫말마냥,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로 표현되는 무한 고독의 정서에 지배된다.

 

하지만 대도시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는 이들은 저마다 그러한 심리적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모색한다. 19세기에는 인간 군상에 대한 해석과 논평을 담은 '생리학'이 그 역할을 담당했고, 최근에는 갑자기 다시 유행(?)하고 있는 MBTI가 어느 정도 임무를 수행하는 것 같다. 이러한 체계들은, 대도시라는 황무지에 아무 연고도 없이 모여든 이들이 서로 공통점을 확인하고 안심하며 그제야 겨우 눈을 맞출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백 년의 간격을 두고, 군중이라는 현상은 각 시간대에서 해소되지 않은 살아있는 의혹덩어리 이며, 의혹은 곧 공포로 확대된다. 히틀러로 구현된 대중 파시즘의 공포는 벤야민을 강타했고,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그 반격의 흔적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담겨 있는 것 같다.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자본주의의 연원을 추적하는데, 자본주의의 형성은 산업 발전에 따른 대도시의 형성, 즉 군중이라는 토대로부터 비롯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파리의 아케이드를 거니는 군중의 모습을 낱낱히 추적하여, 그것의 전모을 펼쳐냄으로써 자신을 위협하는 괴물을 쳐부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공포를 쫓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현대인(이라 쓰고 나라고 읽는다)은 상품소비를 통해 그것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 싶다. 또한 케이드 프로젝트가 어렵게 읽히는 것은, 벤야민이 느꼈던 공포의 감수성이 나에게 온전히 전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공포는 주변에 안개처럼 부유하지만, 나의 오감은 잠들어 있다. 벤야민이 보들레르에 주목한 것은, 그에게서 자기와 닮은 점을 발견해서가 아닐까 싶다. 자본주의라는 낯선 현상의 여명을 최초로 맞이한 보들레르는 그 기이한 경험을 본능적인 시어로 토해냈고, 백 년 후 벤야민은 그 보들레르를 연구대상으로 삼아 자본주의를 역추적한다. 다시 백 년이 지나 벤야민을 읽는 자는 오히려 자본주의의 정점에 살고 있지만, 그 익숙함으로 말미암아 벤야민이 그저 낯설 뿐이다.

 

세미나를 진행하며 미궁과도 같은 아케이드 한복판에서 한참을 헤매다, 겨우 책을 벗어나 현생으로 돌아오면 나를 맞이하는 것은 일상의 판타스마고리아니 어디든 도망갈 곳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도망갈 곳이 없음을 발견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변곡점을 만드는 순간이리라. 이렇게 무한한 변곡점을 생성하다보면,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느껴도 그곳에는 최초의 인간과는 다른 어떤 이가 우뚝 서 있음을. 믿어라. 믿을 것이다. 믿어야 한다._(끝)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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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를 읽는 와중, 내 귓가에 관현악과 교향곡 따위가 어른거리는 환각에 도취된다.

그 운율에서 오는 리듬, 들썩거리게 만드는 리드미컬함.. 오오. 쿵짝쿵짝 북소리가 들리는 듯 하구나.

구름을 타고 날아다니며 천상과 하계, 지옥을 내집처럼 드나들고

북방의 브로켄에서 남방 그리스까지 세계의 모든 마녀와 괴수, 정령들을 만나도다.

 

이 환상적인 파우스트&메피스토펠레스의 모험은 '참으로 아름답구나, 순간이여 멈추어라!' 할 정도로.. ^^

 

요괴들의 축제인 발푸르기스의 밤. 아주 그냥 귓가에 종소리가 뎅그렁뗑그렁 울린다. ㅎㅎ

 

 

  파우스트 2부를 덮으며 당혹감에 휩싸였다. 천하의 악당인 파우스트가 구원받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이런 마음을 잠시 달래며 생각해보다, 새삼 흥분하고 있는 나 자신이 희한하게 느껴졌다. 나는 왜 구원받은 파우스트를 보며 흥분하는 것일까? 이것은 착한 자는 복되고, 악인은 벌 받아야 한다는 모종의 당위가 나의 내면에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실제 세상이 어찌 그렇게 돌아가는가? 오히려 정반대로 돌아가는 것이 현실임에도, 인간의 내면 속에는 선악의 절대 원리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원천적으로 내재해 있는지 모른다. 그것이 제도와 사회적 계몽, 종교권력 등의 외부적 세례에서 왔든 아니면 인간의 양심에서 비롯하든 간에 말이다. 하지만 현실세계 혹은 대자연에는 그런 인간적인 도덕률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맹수가 초식동물을 잡아먹는데 도덕개념이 없듯, 우리가 살고 있는 대자연에는 도덕적 선악 따위는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도덕이란 것이 그저 인간의 자기기만적 가치일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스스로를 차갑게 바라보면, 인간존재의 위상이 그저 짐승 수준으로 격하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어차피 도덕과 선악, 구원 따위는 인간이 제조해낸 발명품에 불과하기에, 그것 따위는 지킬 필요가 없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런데 말이다. 설령 도덕과 양심 따위가 인간의 발명품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것은 좀 이상하다. 인간이 정말 짐승과 같은 혹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라 하더라도, 그 짐승이 스스로 도덕과 선악 등을 창조해내고, 또 그 덕분에 어느 정도 짐승에서 벗어나는 존재로 거듭난다면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특이성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보면 인간은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신(神)을 창조했다. 신 혹은 신으로 표상되는 천국에 대한 희구는 인간이 속해있는 짐승적 요소를 탈피하기 위한 이정표와 같다. 수험생이 더 나은 성적을 받기 위해 공부계획을 세우듯, 인간은 신이란 존재를 스스로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매진하는 존재다.

 

선량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에 쫓기더라도 올바른 길을 잊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네 입으로 인정하게 되리라. [하느님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p.19

 

  여기서 하느님의 말은 인간 자신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인간 스스로에 의해 심하게 뒤틀려버린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기에, 그 신의 말씀을 대리하는 권력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구원이라는 표상에 벌벌 떠는 수동적 존재로 전락했다. 여기서 맨 처음 파우스트의 뜬금없는 구원에 분노했던 나 자신으로 돌아가게 된다. 희대의 악당이 구원받을 수 있는가? 더구나 파우스트는 애당초 하느님에 대한 믿음 따위도 없는 인물이다. 파우스트는 능동적 행동의 표상이다. 인간은 무언가 행동함으로써 자신을 깨달아가는 존재다. 그 행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희로애락과 죄악은 필연적 결과이다. 초반부에 파우스트는 성경의 구절을 번역함에 있어, 첫 구절부터 막힌다. [태초에 ~가 있었느니라]를 어떻게 번역할까 고민하다 내린 그의 결론은 파우스트의 인간상과, 인간의 구원에 대한 괴테의 생각을 결정적으로 함축한다. [태초에 <행위>가 있었느니라]. 인간은 행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고, 그 행위로 인한 결과 또한 인간 자신이 온전히 짊어질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숙명과도 같다. 파우스트는 끝없이 악행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는데, 어쩌면 이는 인류의 역사적 행로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죽고 죽이는 참혹함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무지몽매함 속에서도 멸망하지 않고 기어코 살아남는 까닭은, 신적인 존재를 지향하는 속성이 인간에게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파우스트는 악마와의 계약을 스스로 용인함으로써 고통을 피하지 않고 나아가는 인간 행위의 전형을 보였는데, 어쩌면 지극히 근대적인 인간 유형으로 평가할 수 있다. 어쨌든 인간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모색하고 실천함으로써 비롯한 결과를 감내하고, 그러한 참혹한 결과물을 딛고 또 다시 나아갈 수 있다.

 

  사실 난 파우스트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미워하기엔 너무나도 나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기에 마냥 비난할 수 없을뿐더러 그저 불편할 뿐이다. 지고의 존재를 갈망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애욕과 정념의 늪에 허우적대는 것이 꼭 닮았다. 파우스트와 나의 차이는, 파우스트는 갈 데까지 가본다는 것이다. 고통 받아도 좋다, 어차피 받을 고통이라면 스스로 체험하고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겠다! 라는 태도, 그로 인해 발생하는 숱한 비난 역시 안고 가겠다는 뻔뻔할 정도의 의지. 나를 비롯한 독자들은 그의 행위를 비난할 수 있고, 구원이라는 결론에 어안이 벙벙할 수 있다. 하지만 파우스트를 나 자신으로 치환한다면, 그때도 스스로를 쉽게 심판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파우스트적 인간은 너무나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결국 파우스트 이야기는 일상사에 치여 오도가도 못하고 가만히 엎드려 있는 인간에게 가하는 경종이라 생각한다. 마치 너도 악마를 소환해 길을 떠나라고 부추기는 것처럼. 하지만 이 책을 어렵사리 읽고 있는 우리들 역시 이미 메피스토의 유혹에 빠진 파우스트렷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그레트헨으로 상징되는 여성성은 구원의 핵심요소로 등장한다. 나는 이것을 앞서 언급한 인간이 지니고 있고 한편으로 지향하는 신적인 요소라 생각한다. 지고의 신이 마리아로 등장하듯, 여성성은 짐승의 어두운 속성에 머물러 있는 인간에게 빛이 되는 요인이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포기하지 않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 그레트헨은 파우스트에 의해 짓밟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가르치기를 소망한다. 여기서 그레트헨과 파우스트는 인간이 지닌 양면으로 해석된다. 인간은 스스로를 파괴하려는 충동에 내맡기기도 하지만, 또한 자신을 구원하려는 의지 또한 갖고 있다. 이것을 인간 내면의 남성성과 여성성의 화해하지 못한 양 측면으로 읽을 수도 있는데, 수 천 년간 인류문명이 파우스트로 상징되는 남성성으로의 여정에 자신을 내맡겼다고 보면, 괴테는 이후 세계의 행로를 여성성에 걸었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어머니들]을 만나러 가기 직전에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대화에 은밀히 암시되어 있다.

 

 

고매한 비밀을 밝히고 싶진 않지만 할 수 없소이다. 여신들은 숭고하게 고독 속에 군림하고 있소. 그들 주변에 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공간도 없소이다. 그들에 대해 말한다는 것 자체가 당혹스러운 일이오. 그들은 [어머니들]이오! (파우스트 깜짝 놀란다) 어머니들! p.246

 

 

  사탄도 입에 올리기를 꺼려하고, 은밀하게 감춰진 [어머니들]의 존재는 실로 인간에게는 수수께끼이다. 우리는 생성의 원천인 어머니로부터 비롯했건만, 세상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려 근원으로부터 멀어진다. 마치 파우스트와 헬레네의 자식인 오이포리온의 최후처럼 말이다. 그 근원으로 향하는 길을 제시하기 위해 파우스트의 여정은 비롯했고, 그 끝에는 성모 마리아와 그레트헨으로 상징되는 여성성이 자리한다. 여성성의 희구는 곧 신적인 행위를 실천하는 것이다.

 

 

행동으로 그분을 찬미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형제처럼 음식을 함께 나누고 주님의 말씀 두루두루 널리 알리며 기쁨을 약속하는 너희들 가까이에 주님은 계시도다. 너희 곁에 계시도다! [천사들의 합창 中] p.39

 

 

  천사들의 합창에서 보듯, 신은 곧 위에서 언급된 행위로 구현된다. 그 순간 인간은 신이 된다. 그때 파우스트의 [순간아 멈추어라. 정말 아름답구나! 이 지상에서 보낸 내 삶의 흔적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걸세. 그런 드높은 행복을 미리 맛보며, 나는 지금 최고의 순간을 즐기노라]라는 외침은 유효할 것이다. 이러한 신적인 행위로 인한 아름다움 속에서 인간은 죽음 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로 거듭날 것이리라.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인간은 서로 상반된 의지를 지닌 분열된 존재이다. 그것은 화합할 수 없어 보이나, <행위>를 통해 선악의 에너지는 통합되어 고차원으로 이동한다. 마치 나선형 회전처럼, 위에서 보면 평면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옆에서 보면 사실 더 큰 회전축을 그리며 나아가고 있다. <행위>엔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결과가 항상 교차해서 발생한다. 그러나 부정은 곧 긍정으로 가기 위한 동력이고, 긍정은 부정으로 가는 과정이다. 살아있는 이상 행함으로써 세상에 기여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일이 아닐까._(끝)

 

 

우리도 알 수 없는 일 올림포스에 물어보라.

그 누구도 아직 생각하지 못한

여덟 번째 신이 혹시 거기에 있을지 누가 알랴!

우리에겐 자비롭지만,

아직 완성되지 못한 신들.

이 비할 데 없는 신들은

이룰 수 없는 것을 애타게 갈망하며

굶주림에 허덕이노라. [네레이스와 트리톤들] p.322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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