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이 겪은 20세기 당대의 군중은, 그 자신에게 피부로 와닿는 공포였던 것 같다. 그러한 감정은 19세기 초, 대도시라는 낯선 공간에 던져진 이방인들이 서로를 의심스레 바라보던 시선과 닮아있다.

나 지금이나 군중에 대한 공포는 결코 해소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군중에 대한 공포감은 '몰이해'로 설명될 수 있다. 아무런 공통분모가 없는 이들은 조용필 형님의 불후의 명곡 '꿈'의 노랫말마냥,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로 표현되는 무한 고독의 정서에 지배된다.

 

하지만 대도시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는 이들은 저마다 그러한 심리적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모색한다. 19세기에는 인간 군상에 대한 해석과 논평을 담은 '생리학'이 그 역할을 담당했고, 최근에는 갑자기 다시 유행(?)하고 있는 MBTI가 어느 정도 임무를 수행하는 것 같다. 이러한 체계들은, 대도시라는 황무지에 아무 연고도 없이 모여든 이들이 서로 공통점을 확인하고 안심하며 그제야 겨우 눈을 맞출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백 년의 간격을 두고, 군중이라는 현상은 각 시간대에서 해소되지 않은 살아있는 의혹덩어리 이며, 의혹은 곧 공포로 확대된다. 히틀러로 구현된 대중 파시즘의 공포는 벤야민을 강타했고,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그 반격의 흔적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담겨 있는 것 같다.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자본주의의 연원을 추적하는데, 자본주의의 형성은 산업 발전에 따른 대도시의 형성, 즉 군중이라는 토대로부터 비롯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파리의 아케이드를 거니는 군중의 모습을 낱낱히 추적하여, 그것의 전모을 펼쳐냄으로써 자신을 위협하는 괴물을 쳐부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공포를 쫓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현대인(이라 쓰고 나라고 읽는다)은 상품소비를 통해 그것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 싶다. 또한 케이드 프로젝트가 어렵게 읽히는 것은, 벤야민이 느꼈던 공포의 감수성이 나에게 온전히 전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공포는 주변에 안개처럼 부유하지만, 나의 오감은 잠들어 있다. 벤야민이 보들레르에 주목한 것은, 그에게서 자기와 닮은 점을 발견해서가 아닐까 싶다. 자본주의라는 낯선 현상의 여명을 최초로 맞이한 보들레르는 그 기이한 경험을 본능적인 시어로 토해냈고, 백 년 후 벤야민은 그 보들레르를 연구대상으로 삼아 자본주의를 역추적한다. 다시 백 년이 지나 벤야민을 읽는 자는 오히려 자본주의의 정점에 살고 있지만, 그 익숙함으로 말미암아 벤야민이 그저 낯설 뿐이다.

 

세미나를 진행하며 미궁과도 같은 아케이드 한복판에서 한참을 헤매다, 겨우 책을 벗어나 현생으로 돌아오면 나를 맞이하는 것은 일상의 판타스마고리아니 어디든 도망갈 곳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도망갈 곳이 없음을 발견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변곡점을 만드는 순간이리라. 이렇게 무한한 변곡점을 생성하다보면,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느껴도 그곳에는 최초의 인간과는 다른 어떤 이가 우뚝 서 있음을. 믿어라. 믿을 것이다. 믿어야 한다._(끝)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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