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언제 썼는가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내가 언제 글을 썼는지 더듬어본다. 과제물 같은 글 말고, 자발적으로 쓴 글에 한해서 말이다. 초등6년 때 아버지 친구 딸에 반해 처음 일기를 쓴다. 그때는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부모님께 털어놓을 수도, 소주를 털어 마실 수도 없었다. 어린이의 존재기반을 뒤흔든 첫사랑의 충격은 일기장 속에서 그런대로 아물어갔다. 그 후 내가 쓴 글을 다시 읽고 러브스토리를 보는 것마냥 세밀한 감정 묘사에 푹 빠졌다. 묘하게 중독성 있는 그 맛(?)에 일기를 꾸준히 쓰게 된다. 나는 그것을 감정의 치유라 여겼다. 그래, 나는 힘들고 고독하고 아플 때 글을 썼구나, 그걸 위로하고 달래기 위해 썼구나. 정말 글쓰기는 내 삶의 치료제다! 라고 말하고 싶으나 착각이었다. 그게 내 병을 더 깊게 만드는지 몰랐다. 나는 현실이 무서워 안락한 일기장 속으로 도망쳤다. 현장이 없는 일기장은 내 맘대로 연출하고 각색할 수 있는 판타지와 다름없다. 이런 글은 쓰면 쓸수록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고, 타인과 맞닿을 수 있는 면이 엷어진다. 일기장에나 쓸 글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지점이다. 그 결과는 자의식 과잉과 사회적 고립이다.

처음 일기를 쓴 것은 아픈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만큼은 효력이 있었으나, 이내 재발했다. 근본적인 체력단련이 아닌 일시적인 항생제 남용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약 먹으면 쉽게 감기를 잠재울 수 있으나, 평소 몸 관리하는 것은 귀찮다. 글쓰기로 삶을 반성하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나, 일상 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은 어렵다. 기만에 가까운 자기만족보다 성장을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반복되는 상처와 치유의 고리를 끊어야 하고, 글쓰기는 일상의 흐름을 주시해 지금 여기의 현장을 구성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신체 일기가 그런 글쓰기의 한 방법이다. 그러면 어제보다 조금은 가벼워진 오늘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자기기만에 빠진 글은 삶을 피곤하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도 지지부진하고 눈치도 많이 보는 어제와 똑 같은 일상,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고 가벼워지기 위해 글을 쓰고, 그것은 자기를 속이지 않고 온전히 드러내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글을 일단 쓰자

나는 Break만 있는 자동차와 비슷하다. 매사 시작을 잘 못한다. 사람과 관계를 맺거나 글을 쓸 때도 그런 버릇은 드러난다. 사람을 지나치게 경계하고, 글도 자꾸 미적거린다. 주변 시선을 많이 의식해서 나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몹시 서툴다. 사주 명리학 글에서도 썼듯, 일상적인 대화나 수다에 극도로 취약하다. 겉으로 보기엔 과묵하나 속으로는 수다 떨고 싶어 죽겠다. 이런 습성이 나를 한없이 무겁게 만들고, 삶을 피곤하게 한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겉으로 포장한다고 불안함과 인정욕망이 없어지지 않는다. 그럴수록 나 자신을 드러내는 작업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 남들에게 감출수록 자신의 성장을 하루 이틀 미루는 꼴 밖에 되지 않고 결국 내 손해다.
 

그래서 쓰고 본다. 보통 내 글은 연애(여자)로 시작해서 연애(여자)로 끝난다. 인생 최대의 화두는 연애(여자). 나는 이 말의 파장을 항상 우려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하는 불안에 떨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인걸 어쩌나. 그 동안 써온 글도 따지고 보면 성장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외로움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에 초점이 모아져 있었다. 그런 글에 민감히 반응하는 여자라면 내가 쳐놓은 덫에 걸리는 셈이었다.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든 타고 넘어가야 성장이든 뭐든 할 수 있다. 연애를 위해 공부를 하니 공부가 안 되기 때문이다. 왜 여자를 그리도 욕망하는가? 인정 받고 사랑 받고 싶고 한마디로 따뜻한 품에서 쉬고 싶기 때문이다. 눈치를 보는 게 많다 보니 눈치 안 봐도 될 사람, 그럼 만만한 사람이겠구나. 이 회로를 끊어야 불편한 모든 것을 마주할 수 있다. 만만하고 쉬운 것을 찾지 않고, 불편하고 어려운 것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게 필요하다. 세상은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순서는 일단 까 보이는 것이다. 자꾸 숨기려 하니 아닌 척하고, 어처구니없는 과묵한 인상도 떠안게 되고, 글도 에둘러 가고 핵심을 짚지 못한다. 처음에는 이런걸 말해도 될까? 전전긍긍했으나, 막상 드러내면 별게 아닌 게 많다. 누구나 비슷하고, 또 파장을 우려할 만큼 사람들이 신경 쓰지도 않는다. 결국 내 마음속의 망상인 경우가 많고, 그냥 눈치 보지 않고 수다 떠는 연습하면 된다. 어렵고 못하는 게 아니라 다만 익숙지 않은 것이다. 익숙지 않은 건 많이 해보면 나아진다. 글쓰기는 그것을 해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동네방네 보여주면 스스로 갖고 있던 무거움이 덜어진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써야 한다.

 

생산하는 글쓰기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두렵지 않게 되면 절반의 성공이다. 나를 짓누르고 있던 것에서 가벼워져, 이제는 하고 싶은 말을 자연스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감추고 싶은 걸 깠는데 못할 말이 뭐가 있을까? 부끄럽지만 위에서 연애 얘기 하기까지 쓸까 말까 오늘 새벽 내내 고심했다. 맨 꼴찌로 글을 쓰며 대작을 기대했으나, 실상은 저런 작은 것에 끄달려 진행을 못한 것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찬다. 도대체 무슨 말을 쓰려고 했기에, 당일 아침 7 2페이지째를 쓰고 있단 말인가!
 

나를 누르고 있는 욕망, 그것은 애써 누르려 해도 기침처럼 튀어 나오게 마련이다. 그렇게 억지로 틀어막다간 변태 된다. ?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듯, 억지로 댐으로 막아뒀다가 어느 순간에 한 방에 뻥 뚫려 더 큰 피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변태들이 그렇게 꼭꼭 눌러뒀다가 한 방에 훅 가는 것 아닌가. 그래서 욕망은 흐르게 둬야 한다. 우 임금이 치수에 성공한 것처럼, 가두지 않고 적절히 흐를 수 있게 물길을 만드는 지혜가 필요하다. 물길이 논밭으로 적절히 흘러야 농사짓듯, 글쓰기로 물길을 내다보면 서서히 무엇인가를 생산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나는 연애(여자)에 목말랐으나 오히려 30년간 연애 제대로 못한 달인으로, 오늘도 같은 욕망에 시달리고 있는 이들에게 등불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 이렇게 살면 나처럼 된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런 시행착오를 겪지 말고 정도(正道)를 가도록 도울 수도 있다. 이것이 삶을 나누고 생산하는 글쓰기가 아닐까?
 

생산하려면 순환해야 하고, 순환하려면 자신이 열려 있어야 한다. 자신을 열려면 스스로의 몸과 마음이 뚫려 있어야 한다. 신체로는 어디가 불편하고 소통이 안 되는지 점검하고, 마음으로는 어떤 욕망에 집착하는지 정면으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몸과 마음은 이어져 있듯, 몸만 그냥 아픈 법이 없다. 몸이 아픈 까닭은 그와 연관되는 칠정(七情)의 손상이 반드시 있고, 그 부분을 관찰해야 비로소 치유할 수 있다. 내가 매달리는 연애(여자)의 욕망은 신체상으로는 정()의 소모를 가져온다. 좌측 광배근 부위 통증은 신장 이상으로 진단되고, 최근 악화된 안구건조증 증상은 진액이 부족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눈에 불을 켜고 여자를 좇고, 게다가 똑바로 보는 것도 아니고 비겁하게 흘끗 곁눈질을 하니, 눈알이 아플 수 밖에! , 변태로다.

 

글쓰기로 삶의 주도권을 콱! 움켜줘라

신체 일기를 쓰면서 일상사를 촘촘히 들여다보고 있다. 말투, 걸음걸이, 무엇을 먹고 마시고, 어떻게 마음을 쓰는지 관찰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 조금씩 엿보인다. 예컨대 날숨보다 들숨이 약한 것을 그저 숨이 차서 그런 거라 여겼으나, 들이마시는 숨이 달리는 것은 너그럽게 수용하는 마음이 부족한 게 아닌가라고 한번 더 생각을 진전시킨다. 신체 상태를 내 일상과 연결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는 것, 그것이 조금씩 이뤄지고 있다. 이건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 생각 없이 살던 하루를, 내가 주도하는 삶으로 바꿔나가는 과정이다. 타인과 외부 상황에 그저 끌려가는 삶에서, 내가 움직이고 변화해나가는 것, 그것이 팔자를 고치는 게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애정을 갈구하는 패턴은 내가 주는 것 없이 받기만 하는 욕망에만 시선이 쏠려 있다고 느껴진다. 밥도 잘 안 사고, 베푸는 것에 인색하고, 또 사는 것에 무척 어색해하는 그런 패턴 말이다. 한번은 난 절대 쪼잔하지 않아! 그냥 베푸는 게 어색할 뿐이야 라고 합리화했다. 그래서 도담 형님께 여쭤봤다. 형님, 왜 밥 사줄 때 이렇게 어색할까요? 많이 안 사봐서 그렇다! 줘본 적이 없으니 그럴 수 밖에. 받기만 하는 사람은 무한정 받으려 하니, 외로움이 채워질 턱이 없다. 사회적 관계에서는 나름 사는 편이다. 하지만 가족은 만만한 건지 편안한 건지, 집에 갈 때 먹을 거 사간 적이 별로 없는데 요즘 사 들고 가고 있다. 돈이 빠져 나간 만큼 마음이 가벼운 것은 어쩐 일인지..
 

내 인생의 운전대를 남에게 맡기지 않고, 나 스스로 움켜잡고 나아간다. 그것은 글쓰기로 이뤄지고 있다. 가끔은 급발진과 급정거로 다칠 수도 있겠으나, 운전이라는 것이 그러면서 익숙해지는 것 아닌가? 그렇게 연습하다 보면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함께 광활한 평원을 자유롭게 달리며, 삶을 풍성하고 즐겁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_()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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