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는 물인데 물은 겉모습이 차갑고 일정한 형태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물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저는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가 먼저 생각납니다. 물은 담기는 그릇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고, 길이 막히면 돌아갈 줄 압니다. 물의 ‘임기응변에 능한’ 특징은 지혜, 즉 지(智)를 상징합니다. 이처럼 물의 특징을 많이 품고 있는 사람은 대체로 모험심과 호기심이 많으며 기발한 재치가 엿보입니다.

수를 상징하는 고전은 시경(詩經) 입니다. 오행대의는 ‘시경은 그 뜻을 풍자해서 말하고, 은미한 말로 인정을 화합하고 흡족하게 하며, 귀신을 감동시키고 천지를 감동시킨다’고 말합니다. 신(자연)과 인간을 두루 즐겁게 화합시키는 책이라 할까요. 그래서 옛 선인들은 시경을 읽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천지신명의 오묘함을 노래했습니다. 두루 즐겁게 화합한다는 측면에서 놀이가 빠질 수 없습니다. 노는데 풍류가 따르니 오늘날로 치면 시문학, 음악, 미술 등 인간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문학예술과 문학 창작이 이에 속합니다. 이런 문학예술 서적은 수(水) 기운이 많다고 할 수 있겠지요.
 

물은 겨울을 상징하기도 하는데요, 겨울철 만물의 생명활동이 줄어들고 겨울잠에 들어가는 모습이 물의 고요한 형상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고요하다가도 일순간 폭풍우가 몰아쳐 거칠게 변하는 것 또한 물입니다. 한마디로 종잡을 수 없지요. 인간의 감정은 물의 성질과 비슷합니다. 희로애락이 파도처럼 번갈아 찾아오듯, 기쁘다가도 이내 슬픔에 잠기는 것이 사람입니다. 이런 감수성이 문학과 예술을 꽃피웠습니다. 자신의 감수성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이는 마치 파도타기의 명인과 같으니, 그 누구 앞에서도 재주를 뽐낼 수 있습니다. 예술가들이 대중의 주목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때로는 폭풍처럼 장엄하고, 때로는 호수처럼 우아하니 그 극단에 사람들은 매료됩니다. 그러나 제대로 파도를 타지 못할 경우 빠져 죽을 수 있습니다. 예술가들이 편협한 광기에 사로잡히는 까닭입니다. 현명한 자는 치우치지 않으니, 물이 지혜를 상징함은 우연이 아닌 것이지요.

목이 종교·자연과학인데 수는 문학·예술이라 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문학과 예술은 천지창조에 얽힌 신화라 할 수 있습니다. 신화는 자연에 대한 경외에서 비롯합니다. 거친 자연과 맹수의 위협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류의 조상은 악전고투를 거듭했을 겁니다. 신화의 기원은 여러 학설이 있으나 저는 자연현상을 의인화했다는 이론이 가장 합당해 보입니다. 자연의 힘을 전지적 절대자의 형상으로 만든 것이지요. 여기에는 인간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많이 개입했을 겁니다. 그래서 동굴 벽화를 그리거나 별자리에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것은 반복적이고 세심한 관찰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관찰은 음적(陰的)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사물을 면밀히 파악하기 위해선 발산하기 보다 수렴하고 꼼꼼하게 저장·기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관찰이 축적되면 하나의 체계를 이룹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이며 자연과학을 성립하게 됩니다. 즉 원시적 유희 문화가 숙성하여 법칙을 발견합니다. 바로 수생목(水生木)의 원리입니다. 이전에는 하늘에 천둥번개가 치면 하늘이 노하셨다고 두려움에 벌벌 떨기만 했지만, 목 기운에 들어와서는 그것을 보다 이치적으로 탐구하는 수준에까지 오른 것이지요. 즉, 천둥번개가 우르릉거리면 비가 올 것이고, 그것이 언제 또 내릴 것이다라는 자연현상의 우주적 법칙을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매스컴과 법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국민들은 철저히 눈과 귀를 봉쇄당합니다. 독재정권 시절 ‘보도지침’처럼 비판의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되고, 독선으로 타락한 화 기운은 미쳐 날뜁니다. 이때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힘은 문학·예술에서 틈새를 발견합니다. 저항세력은 이른바 불온서적을 지하 써클에서 돌려 읽고 독재정권에 투쟁하는 힘을 기릅니다. 바로 수극화(水克火)입니다. 합법적인 비판 기능이 차단되었기 때문에, 지하에서 활동하며 사상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수(水)는 하강하는 에너지이기에 지하로 숨어듦은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그러나 마냥 하강만 하는 것은 아니지요. 독재정권에 투쟁한 이들은 지하에서 사상 교육을 통해 전의를 다집니다. 지하에 숨어 그냥 벌벌 떨고만 있던 게 아니란 말이지요. 수 기운은 지(智)와 두려움을 주관합니다. 두려운 상황에 직면해 타락하면 교만해집니다. 교만의 말뜻은 겸손함이 없고 반성하지 못하는 마음 씀씀이입니다. 배움은 알아갈수록 그 깊이의 무한함을 깨닫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을 갖게 합니다.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다’는 게 이런 상태입니다.

화의 상승하는 기운이 미쳐 날뛰면 이를 제어하는 것이 수입니다. 이때는 마르크스 같은 사상서 뿐만 아니라, 민중노래패의 등장 시기이기도 합니다. 수는 문학·예술이라고 했듯이 수 기운은 이렇게 시·소설·철학·노래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문예를 발달하게 합니다. 이것은 망동(妄動)하는 화 기운을 붙잡으며 수극화하고, 마침내 새로운 질서를 낳습니다. 수생목(水生木)이지요.

우리 국민들의 세대를 아우르는 ‘국민가요’, 아니 ‘민중가요’는 무엇일까요? 회식 자리의 단골 레퍼토리인 ‘아파트’요? ‘소양강 처녀’요? 아.. ‘남행열차’? 그럴 듯 합니다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가사를 다 알고 있고 늙은이부터 어린이까지 광장에서 함께 목청껏 부르는 노래는 예전에는 ‘아리랑’이었고, 요즘엔 ‘아침이슬’입니다. 이 노래들이야말로 진정한 범국민적 가요이지요. 노래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아리랑이나 아침이슬은 정말 누구나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촛불집회 같은 거리에 모여든 이질적인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힘. 바로 곡조입니다. 어떤 명연설, 수사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모두가 공유하고 공감하는 음률을 타고 슈퍼 파워를 일궈내지요. 노래는 바깥으로 내지르는 것이기에 수 기운의 하강하고 저장하는 성질과 어울리지 않는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농촌에서 부르는 노동요는 고된 농사일을 위로합니다. 운동경기에서 외치는 응원가는 선수들에게 힘을 불어넣습니다.

   수(水)는 남성으로 치면 정액(精液)이요, 여성에게는 혈분(血分)입니다. 인체를 유지하는 핵심 에너지입니다. 이것을 낭비하지 않고 몸에 저장해두면, 튼튼한 아기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들 수 있는 정(精)과 혈(血)은 자동차를 움직이는 연료와 같습니다. 이런 에너지원처럼 노동요를 통해 농부는 다시 기운을 차려 일할 수 있고, 응원가로 사기충천해 선수들의 경기력은 향상됩니다. 따라서 노래는 그냥 흩어버리는 화 기운이 아니라 수 기운인 것입니다. 노동요나 응원가로 인해 인체가 활력을 띠는 것은 전형적인 수생목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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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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