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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배병철 (성보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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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요

비장脾臟은 오행 목화토금수 중 토土에 속하며 비토脾土라 약칭한다. 토는 방위상으로 중앙을 상징하고 이에 비장은 인체의 가운데, 중조中焦에 자리한다. 흔히 비위가 좋다 나쁘다라는 말을 쓰듯, 비장은 위장과 한 쌍이며 표리 관계이다. 인간은 음식물을 먹고 마셔야 살 수 있다. 영양분 섭취로 생성된 기, , 진액은 우리의 기운을 차리게 하고, 팔다리 사지를 움직일 수 있게 돕는다.

 

비위는 창름지관이고 오미가 나오는 곳이다 <소문·영란비전론>

비는 운화를 주관하고 위는 수납을 관장하여 음식물을 소통시키므로

 창름지관이다 <유경·십이관_장개빈>

 

그러나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소화되지 않으면 몸 속에 머물러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된다. 심지어 보약 조차 소화시켜 몸 속 구석구석으로 약 기운을 보내지 못하면 오히려 독이 될 뿐이다. 문제는 바로 소화가 잘 되느냐 여부이다. 비토는 음식물을 섭취, 소화하고 그에 담긴 정미精微로운 기운을 흡수해 전신으로 보낸다. 비토가 건강하면 소화도 잘 되기에 기, , 진액의 생성도 순조롭다. 그러나 오늘날은 영양과잉과 운동부족의 콤보효과로 비만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시대이다. 넘치는 영양분이 제대로 소화되지 못해 체내의 육肉, 즉 살로 차곡차곡 쌓이고 있음을 뜻한다. 이는 후천지본後天之本으로써의 비토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어머니의 태중에서 공급받은 영양소가 선천지기先天之氣라면, 태어난 이후 제공받는 모든 것은 후천지기이다. 그 중 인간 생존의 근원인 음식물을 받아들이는 비토야말로 후천의 근본, 즉 후천지본 혹은 기혈생화지원氣血生化之이라 일컫는 것이다. 각설하고 비토의 생리기능을 중심으로, 후천지본으로써 비토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한 방책을 모색해보자.

 

비는 운화를 주관한다

운은 옮기고 나르며, 화는 변화를 말한다. 섭취한 음식물을 정미물질로 만드는 것은 화化, 이를 전신으로 운반하는 것이 운運이다. 비가 운화를 주관함은 이 두 가지 역할을 함께 한다는 뜻이다.

 

운은 이동하는 것移徒也이다 <설문해자>

운화수곡運化水穀의 과정 : 음식물 섭취 위의 부숙작용腐熟作用 → 소장의 비별청탁泌別淸濁 → 소화된 액체는 비에 흡수되어 영양물질로 변화 → 비의 전수轉輸작용으로 폐로 운반 → 폐의 산포散布작용으로 전신에 관개

 

비기脾氣가 왕성해야 음식물에서 정기를 추출할 수 있다. 만약 비기가 허약해 운화기능이 저하되면, 소화와 흡수하는 기능에 장애가 생긴다. 예컨대 물류창고 노동자가 파업하면 새로운 주문을 더 이상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고(식욕부진), 이미 주문 받은 물량은 창고에 쌓이게 되며(식후복창食後腹脹), 운 좋게 주문배송이 이뤄져도 배달사고(변당便溏, 설사泄瀉)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 , 진액을 제대로 생성하지 못하고 전신에 영양물질을 수송하지 못하면 신체는 무기력해진다. 물류체계가 멈추면 그 사회의 기반 시스템이 무너지듯이 인체 또한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비토를 창름지관倉廩之官이라 이름 붙인 것도 인체와 사회를 취상取象하여 비교한 까닭이다.

 

비는 습을 싫어한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비위는 음식물을 몸 속으로 받아들이고(胃主納), 끊임없이 소화시킨다. 이 과정에서 음식물은 부숙腐熟되어 걸쭉한 죽처럼 변한다. 습濕이 비토에 배속됨은, 인체의 소화과정에서 죽처럼 눅눅한 습기와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토는 근본적으로 습을 싫어하고 건조한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항상 습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습사濕邪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습으로 인한 부종창만은 모두 비에 원인이 있다 <소문·지진요대론>

습사가 내부에 들어가면 비가 허약해져서 습을 제약할 수 없게 되므로

 내부에 습이 생긴다” <의방고·비위문>

비는 굳세고 건조한 것을 좋아한다” <임증지남의안·비위_섭천사>

 

잠시라도 비토가 긴장을 늦추면 수습水濕은 습사라는 괴물로 변신해 담痰, 음飮, 수종水腫, 종창腫脹을 야기한다. 그렇기에 비토는 운화작용을 통해 물이 고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소화기능이 약해지면 수액이 체내에 머물러 앞서 언급한 부작용을 낳고, 정미물질을 전신으로 운반하지 못해 사지의 무기력증을 초래한다.

 

비의 수액대사 과정 : 수액 섭취 → 수액의 정기는 흘러 비에 수송 → 정기를 흩트려 폐로 전송 → 폐는 수정水精을 사방으로 산포하여 오장 경맥, 기육肌肉, 주리腠理, 피모皮毛 등으로 유입(肺主宣發·肅降), 폐기肺氣의 통조수도通調水道 작용으로 땀·방광으로 배출

 

비는 후천지본

인체는 기혈에 의존하고, 기혈의 생성은 음식물의 정미에서 비롯하고, 음식물의 정미는 비토의 운화기능에 의해 만들어진다. 즉 비토의 운화기능은 기혈 생성의 근본이요, 인체의 생명에 무척 중요하다. 비토를 후천지본이라 함은 인간이 태어난 이후를 후천이라 하고, 후천지기를 이루는 것이 음식물의 정미로 생성된 기혈이니, 그 기혈을 만드는 근본이 바로 비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음식물은 구석구석으로 베풀어져야 제 기능을 다한다.
 

사시사철 비가 왕성하면 사기가 침입하지 못한다 <금궤요략_장중경>

모든 병은 비위의 쇠약으로부터 발생한다 <비위론·비위승쇠론_이동원>

 

사회상으로 보면 곳간에 쟁여두고 백성에게 나누어주지 않는 탐관오리나, 보급이 끊긴 군대는 그 말로가 비참할 따름이다. 베풀고 나누지 않으면 몸도, 사회도 멸망하는 게 하나의 이치인 셈이다. 아마 비를 후천지본이라 한 것은, 그러한 우주의 법도를 망각하지 말라는 선인의 경계가 은연중 있지 않을까 싶다. 역대 의가들은 비위를 돌보아 후천지본을 튼튼히 해야 신체를 보존할 수 있다고 여겼다. 소화되지 않은 백약百藥은 무효인 것이다. 폭음과 폭식, 매우 달고 맵고 짠 극단의 미감으로 후천지본이 망가진 상태에서 옛 사람들의 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음식물의 섭취량이 증가하면 비위가 곧 손상된다 <소문·비론>

음식은 지나치게 뜨겁거나 지나치게 차갑지 않아야 한다” <영추·사전>

 

비는 승청을 주관한다

승청升淸은 맑고 정미로운 물질을 흡수, 운반, 산포하는 기능이며, 위胃의 강탁降濁과 상대되는 말이다. 승升은 전신으로 운반한다는 뜻이며, 강降은 불필요한 찌꺼기를 체외로 배출한다는 의미이다. 승청은 달리 말해 비기산정脾氣散精이며, 비의 기운이 정미로운 물질을 몸 구석구석 산포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머리로 올라간 정기는 귀와 눈을 밝게 한다. 반면 비기가 허약해 승청하지 못하면, 귀와 눈은 흐리멍텅해진다. (두훈목현頭暈目 혹은 신피핍력神疲乏力) 비기가 하함下陷하면 내장의 하수 및 자궁하수 등의 병증이 발생한다. 비기하함은 비기가 급격히 약해져 승청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래로 기운이 꺼지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 청기는 위를 향하고, 탁기는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것이 반대로 되면, 제자리를 찾지 못한 청기는 설사로 배출되고, 탁기는 복부에 남아 적체된다. 이는 음양이 비정상적인 종역從逆 변화라 이른다.

 

비는 혈액의 운행을 통괄한다

통統은 통솔 혹은 제약한다라는 의미이다. 비는 혈액이 맥중脈中에서 정상적으로 운행해 맥 밖으로 넘치지 않도록 제약한다. 당용천은 <혈증론>에서 비통혈이란 즉 혈액이 상하로 운행하는 것은 전적으로 비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라고 했다. 비는 맥이라는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혈을 운전하는 조종사와 같다. 비가 맛이 가면, 혈이라는 고속버스는 제멋대로 도로를 이탈할 것이다. 핸들을 제대로 잡을 수 있는 통섭統攝 능력이 상실된 운전사가 모는 버스는 가드레일을 들이받거나 중앙선 침범 등, 맥 밖으로 튕겨져 나오며 뉵혈衄血 같은 각종 출혈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비기를 충만하게 해야 혈도 제자리를 찾아 순행할 수 있게 된다.

 

비의 지는 사려이다

비의 정지情志는 사思이다. 사는 사물을 인식하는 사유활동기능이다. 앞서 수습이 습사로 변하는 것을 말했는데, 수습이나 사는 그 자체로 좋고 나쁨이 없다. 과하거나 부족하거나 뭉치거나 막히는 등의 작용으로 비로소 인체에 악영향을 미친다. 수습이 한데 뭉치면 습사가 되듯이, 사思 역시 뭉치고 쌓이면 병이 된다. 생각을 깊이 하는 것은 좋으나, 지나치면 이걸 할까!? 아니면 말까!? 할까 말까 왔다갔다하며 판단하지 못하게 된다.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치만 보는 구보 씨가 좋은 사례이다. <황제내경 소문·거통론>에서는 생각이 과도하면 (생각하는 일이) 심에 존재하고 정신이 (생각하는 일에) 쏠려서 정기가 머물러 흐르지 않게 되므로 기가 울결된다고 했다. 사고가 과도하면 비기가 울결되어 상승하지 못하므로, 운화에도 영향을 미쳐 기혈을 화생化生하지 못하게 된다. 그럼 앞서 언급한 모든 증상이 발생해 식욕부진, 복부창만, 현기증, 건망증, 심계心悸, 기단氣短 등의 심비양허心脾兩虛 증상이 나타나고 얼굴이 누렇게 뜨고 핏기가 사라진다. 이는 아무리 잘 먹고 소화를 잘 시켜도 마음 씀씀이에 따라 도로아미타불이 되니, 결국 마음 살피는 것이 몸 돌보는 것 못지않게 중요함을 새삼 알 수 있다.

 

비의 액은 연이다

연涎은 구강에서 분비되는 액체로서, 타액 중에서 비교적 맑은 부분을 가리킨다. 연은 구강을 윤택하게 하고, 음식물을 부드럽게 하여 목구멍으로 넘기고 소화되기 쉽게 한다. 연은 구액口液이라 하며 입 밖으로 넘치지 않는다. 그러나 비위가 조화롭지 못하면 구각口角으로 흘러나온다.
 

 연은 비의 액으로서, 신사腎邪가 비로 침입하면 연이 많아진다 <도서편·비장설_장황>
 

 임상에서는 비열脾熱로 인해 연이 넘치거나, 기가 허하여 고섭固攝할 수 없거나, 심병心病에 의한 구안와사로 연이 저절로 흐르는 경우가 보인다.

 

비는 기육과 상합하고 사지를 주관한다

비주사지기육脾主四肢肌肉은 인체의 풍만함과 건장함, 사지의 정상활동이 모두 비의 운화기능과 관계가 있음을 뜻한다. 운화기능은 정기를 팔다리 말단까지 보냄으로써 사지를 절도 있게 움직일 수 있게 돕는다. 기육은 살덩이를 의미하고, 운화기능이 잘된 살덩이는 충실하고 이른바 탱탱하며 탄력이 있다. 운화기능이 고장 나면 비기가 약해 입맛을 잃으니 잘 안 먹게 된다. 먹더라도 소화가 되지 않아 살덩이는 야위고, 심하면 사지를 제대로 놀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중증근무력증과 주기성마비에 시달리게 된다. <소문·태음양명론>에서는 그 이유를 사지는 비기에 의존해야만 영양을 받을 수 있다. 비가 병들면 위의 수곡정미를 수포할 수 없으므로 사지는 수곡정미를 받을 수 없게 되며..”라고 언급한다. 만성비위병 환자는 팔다리에 힘이 없어 그저 몸져눕기 일쑤이다. 이때는 가만히 있기 보다 적절한 운동으로 소화를 돕는 등 비기를 기르는 방향으로 치료해야 할 것이다.

 

비의 규는 입이고 그 정화는 입술에 나타난다

비경脾經 은 혀와 연결되어 있다. 혀는 미각을 주관하기 때문에, 비기의 척도는 혀의 입맛과 식욕으로 알 수 있다. 비기가 튼튼하면 식욕과 구미口味가 정상인 반면, 비기가 허하면 식욕이 부진하고 입맛이 없다. 즉 비를 직접 들여다보는 대신, 혀와 입을 살피면 비의 증상을 알 수 있다. 입맛이 없음은 위중胃中에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이 남아 있음을 뜻한다. 경일진은 입에 나는 부스럼은 모두 비에 원인이 있으니 이는 비에 화열火熱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입술은 <내경>에서 비문飛門이라 했다. 입술의 색택色澤은 비의 기혈 성쇠를 반영한다. 사백四白이란 인중을 중심으로 상하의 입술은 각각 둘로 나뉨을 의미한다. 비의 정기가 이곳에 나타나므로, 대체로 비기가 왕성하면 입술이 불그스레하고 윤택하며, 부족하면 입술이 담백하고 윤택함이 없다.

 

비토의 토는 계절로는 환절기이며 조화의 기운이다. 환절기가 없으면 우리는 휙휙 바뀌는 계절변화에 숱하게 감기를 앓을 것이다. 중간에서 포용하는 토기土氣 덕분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토기가 넘치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결국 자신의 의견은 없는 우유부단한 구보 씨가 될 수도 있고, 좋은 것은 다 흡수하기만 할 뿐 내보내지 않아 적체되어 썩어버릴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비위가 좋으면 비굴하고 염치가 없고, 지나치게 비위가 약하면 결벽증이 심한 것이다. 비토의 주된 기능이 운화라는 점은, 양극단 사이에서 적절히 융통성 있게 소화시키며 살라는 것을 암시한다. 현대문명은 비기가 과잉된 비실實의 시대! 그래서 비만과 운동부족, 자의식() 과잉으로 비실비실거리는 걸까? 보약도 비토가 왕성해야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다. 비토를 자양함으로써, 세상에 태어난 우리 인생 즉 후천을 양생할 수 있으리라. 그것이 곧 후천지본을 세우는 일이다._()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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