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선생 지식경영법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정민 (김영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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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크랩, 자료 분류 정리에 대한 항목

초서권형법 鈔書權衡法 (읽은 것을 초록하여 가늠하고 따져보라) – 초록방법, 스크랩 방법

휘분류취법 彙分類聚法 – 모아서 나누고 분류하여 모아라 – 자료 항목별 분류 정리방법

취선논단법 取善論斷法 (좋은 것을 가려뽑아 남김없이 검토하라) – 핵심 엑기스 정리방법

어망득홍법 魚網得鴻法 (동시에 몇 작업을 병행하여 진행하라) – 잡다한 메모자료 정리

 블로그 글쓰기의 가장 흔한 방법이 Review이다. 순수 창작이 아닌 영화감상, 독후감, 방문소감, 사용후기 같이 어떤 경험을 하고 나서 그것을 되새김질하는 형태이다. 특별한 글 재주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오직 수첩 혹은 디카로 그때그때 기록하기만 해도 한 편의 글 묶음이 탄생한다. 옛 사람들은 어땠을까.

 예전의 저작들은 이런 비망록 방식 독서의 산물인 경우가 많았다. 지봉유설은 지봉 이수광이 책을 읽으면서 그때그때 초서해둔 비망기를 모아 주제별로 분류해서 자신의 설명을 덧붙인 것이다. 유설이 바로 이 뜻이다. 성호사설도 마찬가지다. 사설은 자질구레해서 별볼일없는 설명이라는 뜻의 겸양을 담은 표현이다.


 유명한 학자들의 저작들도 알고보면, 책에서 밑줄 쫙~ 치거나 틈틈히 메모해 놓은 생각을 잘 모아 놓은 것이다. 전혀 새로운 생각이라기 보다, 기존의 지식을 자신의 스타일대로 재조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옛사람들은 책을 읽다가 요긴한 대목과 만나면 곁에 쌓아둔 종이를 꺼내 옮겨적었다. 이렇게 적은 쪽지들이 상자에 잔뜩 쌓인다. 그러면 어느 날 계기를 마련하여 상자를 열고 그 안의 내용들을 하나하나 검토한다. 초록을 할 당시에 이미 주견이 서 있었으므로, 갈래별로 분류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벼슬길에 얽매여 있던 조선시대의 관인들에게 이런 정리의 계기란 흔히 귀양일 경우가 많았다. 비록 타의에 의해서이긴 하지만 재충전의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나는 책을 읽을 때, 마음에 와닿는 부분이 있으면 그 페이지를 접는다. 어떨 땐 하도 많이 접어서 책이 두툼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검토하며, 접은 부분의 문장을 컴퓨터로 옮겨 타이핑한다. 옛 사람들은 일일이 손으로 옮겨 적고, 수많은 종이를 양산했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 조상들의 예에서 보듯이, 스크랩할 때 이렇게 베껴 옮겨적는 것은 유용한 수단이다. 눈으로만 슬쩍 보지 않고, 손이든 타이핑이든 옮겨 적으며 해당 책의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책을 많이 읽고 중요한 내용을 베껴쓰라고 한 것은, 이를 통해 경전에서 배운 내용을 실제에 적용할 수 있는 생생한 예시를 풍부하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목민심서만 해도 모두 12개 문목 아래 각 편이 6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져, 모두 72조로 분장되어 있다. 기계적인 배치가 전체 구성을 더 일사불란하게 보여준다는 점도 고려했다. 카드작업이 계속되면서 항목들은 더 잘게 세분되었고, 생각도 점점 구체적인 형상을 갖게 되었다. 카드작업의 경우, 예전에는 실제 카드에 하나하나 베껴적었지만 항목이동이 자유로운 컴퓨터상에서는 그런 번거로운 과정이 전혀 필요없다. 그냥 눈에 들어오는 대로 입력해놓고 나중에 휘분류취하면 된다.


 스크랩을 하는 것은 풍부한 사례를 얻기 위함이다. 사례만큼 좋은 자료는 없다. 어떤 주장이나 의견을 펼칠 때, '옛날에 이랬거나 누가 이랬더라' 라고 예를 들면 이해하기 쉽다. 설명하기 보다 보여줘라. 보여주는 것의 핵심은 '예시'이다.
 스크랩 작업을 하다보면, 처음에는 자료가 적어 분류 작업이 더디다. 그러나 점차 자료가 쌓이다 보면, 새로운 항목이 추가된다. 이 글도 그런 스크랩 작업으로 작성할 수 있었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책 내용에서 마음에 와닿는 부분을 접고, 컴퓨터에 옮겨 적으며 나름 분류했다. 옮겨 적을 때 내용을 좀더 이해하게 되고, 적당한 항목에 집어넣을 수 있다.

 다산에게 초록은 체질화되고 생활화된 습관이었다. 초록없이 기억력만으로 그 방대한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기란 불가능하다. 지금은 컴퓨터에 자료를 입력해 파일 이름만 달리해 저장하면 되지만, 당시에는 머릿속에 든 구상과 그 구상을 뒷받침해준 엄청난 양의 카드만으로 이 작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스크랩은 600페이지를 다시 읽는 수고를 덜어준다. 알짜배기 키워드만 모아두면, 해당 부분에 궁금증이 생겨도 관련 페이지만 들춰보면 해결된다. 즉 나만의 내비게이터를 완성한 것이다. 초서권형법이 베껴적는 작업의 중요성을 말했다면, 휘분류취법은 모아진 자료를 어떻게 재분류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

 스크랩 자료가 어느정도 모이면, 쓰임새에 맞게 분류해야 한다. 스크랩 작업을 하며 누구나 겪는 일반적인 문제는 자료는 쌓이는데, 도무지 어떻게 정리할지 엄두가 안나는 것이다. 이런 자료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다산 편집장님은 어떻게 했는지 살펴보자.
 

 다산은 휘분류취의 귀재였다. 그는 우리 역사를 통틀어서 전무후무한 편집의 도사였다. 어떤 복잡한 정보도 그의 손을 한번 거치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나왔다.
 ‘임금께서 식목부를 주면서 말씀하셨다. 7년간 여덟 고을에서 현륭원에 나무를 심은 문서가 거의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릴 정도로 많다. 하지만 누가 더 공로가 많은지, 심은 나무의 수는 얼마인지조차 여태 명백하지가 않다. 네가 애를 써서 번거로운 것을 걷어내고 간략함을 취하여 명백하게 하여라. 한 권을 넘기면 안 된다. 신이 물러나 연표를 만들었다. 가로로 열두 칸을 만들고(7년을 12차로 배열했다), 세로로 여덟 칸(여덟 고을을 배열했다)을 만들어 칸마다 그 수를 적었다. 총수를 헤아려보니 소나무와 노송나무, 상수리나무 등 여러 나무가 모두 12,009,772그루였다. 표 아래에 기록하여 이를 올렸다. 임금께서 말씀하셨다. 한 권이 아니고서는 능히 자세하게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너는 한 장에다 소 한 마리가 땀을 흘릴만한 분량을 정리했으니, 참으로 훌륭하다. 한참을 칭찬하며 감탄하셨다.


 척 보기에 쉬워 보이나 결코 그렇지 않다. 복잡하고 방대한 정보량에 우리는 일단 기가 죽는다. 어떻게 실마리를 잡을까 고민하다 실타래를 헝클어버리기 일쑤이다. 작업초반에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신중하게 분류, 정리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무작정 덤비지 마라. 실타래 헝클어놓으면 골치 아프다.
 

 기왕 닭을 기른다면 모름지기 백가의 책 속에서 닭에 관한 글들을 베껴모아 차례를 매겨 계경(鷄經)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육우의 다경(茶經)이나 유득공의 연경(烟經)처럼 말이다. 속된 일을 하더라도 맑은 운치를 얻는 것은 모름지기 언제나 이것을 예로 삼도록 해라.
 다
산은 자식에게 닭은 치는 것을 계기 삼아 계경을 엮어보라고 권했다. 그 내용은 어떤 것인가? 역대의 문헌에서 우선 닭에 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한다. 닭의 성질과 덕목, 닭의 사육(알품기와 병아리까기, 둥우리와 횃대, 질병과 치료법 등), 그리고 역대 문헌에 보이는 닭에 얽힌 고사와 한시, 직접 관찰한 내용과 닭에 대해 지은 시, 대략 이런 내용을 토대로 각각의 장을 구상한다.


 항목을 만드는 것의 어려움을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 자료는 도무지 어떤 항목에 넣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기타'라는 항목에 집어넣는다. 시간이 흘러 방치해두면 '기타' 항목이 제일 많아지는 일이 발생한다. 아무리 세세하더라도 자신만의 항목을 만드는게 중요하다. '기타'라는 말 자체는 '아무 생각없음'이란 말과 같다. 다산 편집장님은 닭에 관한 항목만 해도, 여러 개를 만들었다.

 다치바나 다카시 氏는 잡지를 모아둔 '오야 문고'를 언급하며 독특한 분류법을 소개했다.

 오야 문고에는 현재 약 6,000종류, 20만 권의 잡지가 있는데, 그 잡지의 기사들은 인명색인과 건명색인 두 가지로 찾아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중략) 대항목은 비교적 건실한 것들이지만 그중에는 '기인(奇人) 연인', '여자', '도박', '정사(情死) 및 자살'같은 이채로운 항목도 있다. '범죄 및 사건'이라는 대항목에는 25가지의 중항목이 있는데 그중 다섯 가지가 살인 사건 관계로 '살인 일반', '존속 살인', '보험금 살인', '이유 없이 지나가는 사람을 해치는 살인, 무차별 살인', '유명한 살인 사건'등으로 되어 있다.
 소항목을 보면 개개의 살인 사건 외에도 '인체 절단 살인 사건', 푸대, 자루, 콘크리트에 묻어서 살해한 사건', '치정 살인'등의 항목도 있다.


 대단하지 않은가? 도서관의 십진분류만이 분류의 전부가 아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자신만의 독특하고 기발한 항목을 수없이 만들어 낼 수 있고, 그것 자체가 기획력이다. 다산 편집장님과 다치바나 氏는 한일 양국의 편집의 대가라 할 수 있다. 대박을 친 도서들도 이런 항목 분류에서 탄생하기도 한다. 잭 캔필드의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처럼 제목부터 이런 뉘앙스를 띤 것이 좋은 사례이다.

 말하자면 다산은 계경의 정리를 통해 양계의 경험을 누적하고, 지식경영을 학습하는 장으로 활용하려 했던 거시다. 이런 방식의 교육법은 생생하면서도 그 효과가 직접적이다. 18세기에는 이런 방식의 지식경영이 크게 성행했다. 담배에 관한 모든 정보를 한자리에 모은 이옥의 연경, 관상용 비둘기 사육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유득공의 발합경, 애완용 앵무새의 사육과 앵무새에 얽힌 문헌고사 및 한시를 취합한 이서구의 녹앵무경 같은 책들도 대부분 같은 방식으로 정리된 지식경영서들이다.

 옛 사람들은 진작부터 이런 방식을 애용해왔다. 종핵파즐법을 언급하며 말했듯이, 한 가지 사소한 자료라도 그 뿌리까지 캐내면 의미가 있다.

 다산은 말한다. 복잡한 문제 앞에 기죽을 것 없다. 정보를 정돈해서 정보가 제 스스로 말하게 하라. 효율적으로 정보를 장악할 수 있는 아킬레스건을 잡아라. 먼저 모으고, 그 다음에 나눠라. 그런 뒤에 그룹별로 엮어 다시 하나로 묶어라. 공부는 복잡한 것을 갈래지어 단순하게 만드는 일이다. 갈팡질팡하지 말고 갈피를 잡아야 한다. 교통정리를 잘하는 사람이 공부 잘하는 사람이다. 서랍정리를 잘하는 사람이 공부 잘하는 사람이다.

 정보가 제 스스로 말하게 하라. 이 글도 내 코멘트를 중간중간 넣었지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은 내가 아닌, 텍스트 (자료)이다. 나는 자료의 흐름에 따라 추임새를 넣을 뿐이다. 영화로 치면 영화감독이요 (연기는 배우가 한다), 야구로 치면 야구감독이다. (야구는 선수가 한다)

다음 편에는 취선논단법과 어망득홍법을 소개하기로 한다.

2009/04/01 - [내가 읽고 싶은 글 쓰기] - 다산 정약용 편집장님의 특별강좌 (글감찾기)
2009/03/31 - [내가 읽고 싶은 글 쓰기] - 다산 정약용 편집장님에게 배우는 자료 분류 정리법 (인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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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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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penylane.tistory.com BlogIcon penylane 2012.05.25 10: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훌륭하신 글 잘 읽고 갑니다. 링크걸어두고 계속 읽고 싶네요!
    요새 너무나 자료 정리법에 목말라하고 있었는데, 책도 읽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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