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사님.. 아프지가 않아요!!" 영화 ‘GP 506’에서 괴질에 걸린 군인이 팔에 총을 맞는다. 모두가 놀랐지만, 정말 놀란 것은 총상을 입은 당사자였다. 그런데 아파서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쇼크를 먹은 것이었다. 당연히 아파야 하는데 아무렇지 않다. 삼국지의 관운장이 팔에 박힌 독화살을 발라내는 것을 참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통증은 신호이다. 횡단보도 신호등이 빨간 불인데 건너가면 사고가 난다. 마찬가지로 통증이란 시그널이 작동하지 않으면 당신 몸과 마음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이다. 고통은 흔히 피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고통을 줄이고 쾌락을 좇는다. 문명은 고통, 즉 달리 표현하면 불편함이라는 고통을 줄이는 과정에서 발전했다. 오래 걷는 고통을 줄이고자 마차, 자동차 등 운송수단이 개발되었고, 소통의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전화, 인터넷과 같은 통신기술이 진보하였다. 또한 질병에 맞서 수많은 치료법이 개발되어 많은 생명을 구했다. 영화 ‘월E’에서 인간은 모든 것을 기계에 의존하는 군상으로 그려진다. 기계의 도움 없이는 한 걸음도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일 수 없다. 사용하지 않는 신체부위는 퇴화하고 비만으로 얼룩진다. 몸의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이처럼 육체의 문제를 초래한다면, 마음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의 문제이다. 사이코패스라 불리는 이들은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의 기제가 없다고 한다. 유영철, 강호순 사건과 같은 ‘묻지마 살인’은 이처럼 마음의 시그널을 읽을 수 없는데서 비롯한다. 타인의 고통을 지각하면 측은함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은 충격적인 사건의 연이은 발생으로 점차 의심받고 있다. 고통은 선과 악이라는 가치로 판단할 수 없다.

바둑두는 관우와 그를 치료하는 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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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통은 그 자체로 중립적이다. 오직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의해 그것은 긍정적인 메시지 혹은 부정적인 경고로 느껴진다. 긍정적으로 고통을 수용하는 사람은 성숙할 수 있다. 우선 고통은 엄연히 지금 피부로 다가오는 현실이다. 눈앞의 고통에 눈을 감는다고 그것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실 외면과 도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무서운 상황에 처했을 때, 이불을 뒤집어써버리는 아이의 충동적 행동과 유사하다. 즉, 고통을 마주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여전히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한다.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피터 팬 콤플렉스’ 혹은 ‘어른 아이’ 같은 것이다. 껍질을 깨고 나오는 동물처럼, 성장하는데 고통은 필연적인 과정이다. 예전에는 사회에 진출하는 연령대가 낮았다. 조선시대만 해도 ·10대 후반이면 가정을 꾸렸다. 아주 과거로 갈 것도 없이 최근 10년의 추이만 지켜봐도, 사회에 진출하는 젊은이들의 나이는 계속 높아져갔다. 덩달아 초혼 평균연령도 증가했고 그만큼 사회에서 활약하는 출발이 점차 늦어질 수밖에 없다. 사회가 고학력의 인재를 원한다는 것은 고학력 고실업이 넘치는 상황에서 설득력이 약하다. 우리의 교육제도는 오히려 고학력을 키운다는 명분으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젊은이들이 사회에서 직면해야할 고통을 계속 유예하는 것은 아닐까. '88만원 세대'의 탄생은 이처럼 젊음을 저당잡힌 사회제도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고통의 유예라고 했지만 실은 고통의 '영구화'에 다름 아니다. 고통을 줄이고자 하면 더욱 고통 받을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유효하다.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이룩한 물질문명은 자연환경의 역습으로 돌아오고, 오늘날 그 어느 시대보다 사람과의 소통수단은 다양해졌으나 소통의 질은 저하되어 ‘이상 심리’가 창궐한 때는 없었다. 고통을 악으로 치부하는 사회의 풍조는 왜곡된 인식을 낳는다. 상업광고는 그것을 부추기며, 교육제도는 학생을 스스로 성찰하는 존재로 키우기보다 어떻게 하면 고통스럽지 않게 성적을 올릴 수 있는지 비법을 알려주는 기능으로 전락한다.

  대한민국 성년의 날에는 장미와 키스를 선물하는 것이 하나의 풍습화되고 있다. 아프리카 어느 부족은 성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로 줄을 묶고 절벽에서 뛰어내린다고 한다. 낭떠러지에 섰을 때의 두근거림과 추락의 고통, 그 팽팽한 긴장을 이겨냈을 때의 뿌듯함. 그것을 느낄 수 없다면 총을 맞고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한 군인과 다름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죽은 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아프리카의 통과의례는 레저문화로 변신했다. 장미와 키스 역시 두근거림과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성년의 날에 성인은 없고 꽃 파는 이들로 북적이는 모습은 낯설게 느껴질 뿐이다. 고통은 겪을수록 더욱 그것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어차피 맞을 매, 일찍 맞는 게 편하다.’

관우 '아프면 아프다고 하셈. 나 따라하면 다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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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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