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얼음장 같은 물


나는 1980년 1월 11일 오전 11시경 서울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즈음의 절기는 소한(小寒)이다. 대한(大寒)이가 소한 집에 놀러 왔다가 얼어 죽었다는 옛말은 소한이 얼마나 추운지 알려준다. 나는 24절기 중 소한의 싸늘한 한기(寒氣)를 머금었다고 할 수 있다. 추운 겨울과 무더운 여름에 태어난 사람의 기질은 각각 다르다. 스칸디나비아 지방 북유럽 사람들이 투박하고 거친 반면, 따뜻한 지중해 근방 종족은 쾌활하고 명랑하다. 혹독한 추위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자연환경 탓에, 웅크리고 앉아 열을 보존해야 한다. 자연스레 말수가 적고 무뚝뚝해진다. 햇볕의 축복을 받는 이탈리아, 남프랑스 지방의 사람들은 아주 경쾌하고 수다스럽다. 천지에 널린 게 따뜻하고 놀기 좋은 산천인데, 집안에 틀어박혀 있을 까닭이 없다.


명리학상 나는 계수(癸水), 즉 물의 기운을 타고 났으며 사주팔자의 8자 중 7자가 음(陰)의 기운이다. 한겨울의 물은 꽁꽁 얼어붙어 있다. 물은 흐르는 것이 본래 성정인데, 이 물은 흐를 수 없다. 게다가 아주 음습하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럴 생각도 별로 없는 음기(陰氣) 충만한 얼음물의 기운은, 사람으로 치면 고집 세고 융통성 없고 무척 내향적인 성격으로 해석된다.


나는 유치원을 중퇴했다. 남들 있는 학사모 사진 따위는 없다. 그리 된 까닭을 지금 생각해보면 지독한 대인기피증 때문인 것 같다. 유치원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몹시 두려웠다. 야외로 소풍 가는 날이면 공포는 더욱 커졌다. 소풍 가기 며칠 전부터 배앓이는 시작된다. 꾀병이 아니었나 의심도 할 만하나, 점점 다가오는 소풍날에 대한 스트레스는 실제로 탈이 없는데도 배가 아파오는 증상을 일으켰던 것 같다. 정신적 스트레스의 신체 전이(轉移)라 할까? 아무튼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외할머니께서 무척 걱정하셨다는 말씀을 뒷날 전해 들었다. ‘얘가 사회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진심 어린 우려. 그만큼 내 상태는 남달랐던 것 같다. 한번은 유치원에 등교했다가 바로 집에 돌아온 것을 보고 어머니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유치원 문이 안 열려서요.’ 유치원에 갔다가 문을 슬쩍 밀고는 잘 안 열리자 그냥 내뺐던 게 아닐까 싶다. 그만큼 확 트인 공간,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에 근원적 두려움이 있었나 보다.


계수, 큰물을 만나다


대학에 갔다. 중고등학교 때 거의 존재감이 없던 나는 대학 입학 후 ‘미친 존재감’ 으로 거듭난다. 유치원을 중퇴할 정도로 숫기 없고 겁 많은 아이가 ‘오버 액션’ 의 화신으로 변신한 것이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설악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노래 신고식이 열렸다. 이윽고 내 차례가 점점 가까워지며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차피 할 거면, 확실히 튀어보자.’ 다른 동기생들은 발라드, 최신 유행곡을 불러 젖히며 흥을 돋운다. 내가 선택한 곡은 이동원·박인수의 ‘향수’ 였다. 최신 유행곡이 아닌, 좀 고전적이고 분위기 깨는 곡이었다. 그런데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결론은 대박. 버스 앞뒤를 종횡무진하며 벌이는 퍼포먼스에 선배들과 동기들은 경악했다. 오리엔테이션 후, 내 롤링페이퍼에 적힌 ‘너의 향수.. 평생 잊지 못할 거야’ 한 문장은 향후 대학생활의 상징 키워드가 되었다.


향수 퍼포먼스는 우연히 일어나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때는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보살핌 받기에 부모의 영향력이 자신의 사주원국을 능가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할 때, 사주는 점차 힘을 발휘한다. 그때 사주팔자의 여러 관계들 (충·합·과다·고립 등)이 비로소 인생의 전면에 드러나는 것이다. 내 소극적인 성격이 대학에 가서 확 변한 것으로 보이나, 그런 경향은 이미 잠재해 있었다. 가정의 품에서 벗어나자 내 사주원국에 잠들어 있는 기운이 스멀스멀 출현한 거라 할까? 한편 내가 급격히 변신한 데는 지리적 영향도 있는 것 같다. 대학은 춘천(春川)에 자리하고 있었다. 춘천은 보통 ‘호반의 도시’ 라 하는데, 실제로 안개와 물이 그득하다.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자욱하면 제 발끝도 안 보인다. 그게 일상다반사다.


내가 춘천에 간 것은, 마치 계수(癸水)가 큰물을 만난 격이다. 실개천이 산속에서 졸졸 흐르다 강물을 만나고, 대양(大洋)으로 흘러들어 넓은 세계와 조우한다. 물이 풍부한 춘천에서 나 자신의 기운을 듬뿍 받아, 자신감이 강해지지 않았을까. 혹시 다른 고장, 즉 물 없고 건조한 지역으로 대학을 갔다면 어땠을지는 또 모를 일이다. 또한 춘천은 내가 있던 서울에서 정동(正東) 방향이다. 동쪽은 나무 목(木)이며 계수에게는 표현력을 상징하는 식상(食傷)이다. 식상은 말하고 싶은 욕망, 대중 앞에서 드러내고 싶은 기운을 뜻한다. 이처럼 물이 많은 지역에 와서 자신감이 강해지고, 말발이 느니 뭘 하고 싶겠는가? ‘튀고 싶은 것.’ 사람들 앞에 나서기 좋아하고 대중을 이끌고 싶어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대학 시절, 향수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과 학생회장과 헤아릴 수 없는 서클 활동, 인간관계에서 좌충우돌, 오버액션 행각은 다 까닭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이 더 큰 물을 만나니 거침없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첫 번째로 한 일은, 모든 동아리를 방문해 그들과 대화를 해보는 것이었다. 그냥 무작정 아무 동아리 문을 열고 들어간다. 머리를 꾸벅 숙이고 어리둥절해 하는 선배들에게 인사한다. ‘저 **학과 98학번 아무개입니다!’ 동아리 방에 일순간 흐르는 적막. ‘도대체 이놈은 뭐야?’ 하는 분위기가 3초간 흐르고, 어색하게나마 반기는 시늉을 한다. 어쩐 일이냐고 물으면 아무~ 이유 없다. ‘신입생인데, 그냥 인사드리려 구요.’ 이런 행동은 자신감이 넘친 나머지,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뽐내려는 욕망에서 비롯한다. 인정욕망은 명예를 중시하는 관성(官星)과 이어진다.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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