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달인 호모 아르텍스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채운 (그린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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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째 강좌 예술의 달인 호모 아르텍스-삶의 기술로써의 예술 후기를 쓰기 위해 며칠을 끙끙 앓았다. 예술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에 여전히 짓눌려 있는 건가? 예술하는 백수 혹은 백수=예술가라는 낯선 배치 덕분인지 이 글은 초장부터 헤매고 있다. 백수가 예술한다는 말은 어딘가 밑도 끝도 없어 보이고, 더구나 백수도 예술가가 될 수 있다니!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리가 익히 들어온 예술인들도 이른바 뜨기 전에는 한량인 경우가 많다. 소설가 김훈은 자전거 여행을 집필하기 전, 시사저널 편집장을 그만둔 야인 신세였다. 하루는 자전거 여행을 앞두고 새 자전거를 사오자 부인이 타박한다. 이 양반이 돈은 안 벌고, 다 늙어 무슨 자전거냐? 김훈이 응수한다. 모르는 소리 마라, 이 자전거가 우릴 먹여살릴거다. 뜬다는 것은 속세의 시선으로 본 것이지, 예술가들은 그냥 계속 자기식대로 살았을 뿐이다. 그렇게 하다 보니 뜬 것이지, 뜨기 위해 한 것이 아니다. 김훈은 소싯적부터 문재(文才)를 날린 기자로 유명했다. 내공이 있는 자는 세상이 언젠가는 그를 찾는다. 안 찾아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왜? 매일 예술하니까! 김훈은 소문난 자전거 광으로 알려져 있다. 자전거에 수백만 원 투자하는 것은 기본이란다. 자전거를 좋아해 몰두했고, 몰두는 새로운 장(場)을 조성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죽이는 경험에 도달한다. 우리는 뭐 좋은 일 있으면 죽여준다고 말하곤 한다. 쾌락의 절정은 죽음 근저까지 가는 거라고 하는데, 이 말이 제대로 짚고 있다. 역시 언어의 의미를 파고들어가면 재미난 구석을 찾아볼 수 있다.

어쨌든 여기서 예술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써 기능한다. 예술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일상에서 춤춘다. 김훈의 속마음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죽이는 경험을 더구나 굉장히 몰입해서 하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결과적으로 자전거 여행은 대박을 쳤고, 김훈 개인에게는 소설가라는 새로운 영역과 접속한 사건이 되었다. 이 또한 그가 백수였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언론사에 계속 남아있었다면 그것대로 명성을 날렸겠으나, 우리가 만나고 있는 주옥 같은 작품 또한 없었으리라. 백수가 아니면 어찌 온전하게 몰입할 수 있으랴? 고로 예술은 백수의 지위를 획득(?)해야 비로소 꽃피운다. 그러니 백수들이여, 기죽을 것 하나 없다. 백수가 된 것은 예술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는 찬스이니 오히려 기뻐할 일이다. 예술해서 죽이는 경험도 할 수 있을 뿐더러, 시절을 잘 타면 돈도 벌 수 있으니 일석이조. 단, 돈을 바라고 하는 예술은 그 자체로 몰락할 테니 명심해야 할 것! 돈을 번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과 진배없다. 타인의 시선에 묶여서는 자신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스스로 재미도 없고 흥이 나지 않는다. 당연히 몰입할 수 없고 죽이는 경험 또한 할 수 없다. 그래 갖고 예술할 수 있을까? No! 자, 이제 앉을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예술을 현실로 불러내보자. 그 동안 예술가는 위대함, 신비주의, 광기, 괴팍함 등과 같은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 이런 근거 없는 짝짓기는 예술을 우리의 일상과 분절했다. 예술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걸로 여겨지고, 스스로를 극장 혹은 미술관에서 소비만 하는 수동적 존재로 묶어놓기에 이른다. 족쇄 찬 예술적 능력!

예술가는 명작이 아닌 문제작을 내놓는 사람이다. 익숙한 풍경에 낯선 것을 들이댄다. 낯섦은 불편함을 낳고 불편함은 의구심과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낯섦의 정체가 도대체 뭐야? 질문한다는 것은 다르게 생각해본다는 뜻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면 물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질문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기존 질서에 순응하게 되고 새로운 이치를 탐색할 수도 없다. 백수가 일상에서 예술하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 초식이 질문하기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매주 수요일 오전 강좌 시작 전, 백수 동무들이 맞닥뜨린 문제이기도 했다. 동무들은 아침 9시 20분 즈음까지 수유+너머에 도착해 동아리끼리 그날 벌어질 강좌 주제와 관련한 토론을 벌인다. 토론하며 여전히 궁금하고 풀리지 않는 것을 추려 질문을 만든다. 즉 그날 강좌가 알차기 위해선 순전히 질문의 수준에 달린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강좌는 이내 지리멸렬해진다. 실제로 어떤 때는 강의는 일찍 끝났는데, 질의응답 시간에 질문이 나오지 않아 서로 멀뚱히 바라만 보던 웃지 못할 기억도 있다. 그때는 정말 사람들 속에 묻혀있어도 진땀이 난다. 강의하는 선생님 보기가 민망할 지경이다. 서애 류성룡은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학문은 정밀히 사색하고 자세히 질문하는 것을 중요시하는데 너희들은 언제나 사색을 깊이 하지 않기 때문에 의문이 생기지 않으며, 궁금한 점이 없기 때문에 질문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다면 책을 많이 읽는다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이른바 예술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질문의 달인이라 할만하다. 아니, 질문의 달인이기에 예술을 하는 게 맞겠다. 권력자들에게 이들은 골칫덩이와 같은 존재다. 자꾸 딴지를 걸고 기성 질서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니 성가실 만도 하다. 예술과 불화한 권력은 예술을 제도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이고, 예술가란 표상에 특유의 이미지를 덧씌운다. 이 얘기는 앞서 극장과 미술관에서 소비되는 예술과, 광기와 질병으로 상징되는 예술가에서 말한바 있다. 한마디로 대중은 예술과는 담을 쌓은 존재로 만들어진다. 그와 함께 질문하는 능력 또한 상실한다. 예술은 아무나 하나? 그렇다, 아무나 한다! 단, 질문할 수 있는 감각만 되살린다면.

무작정 기존 질서를 거부하는 쪽으로 질문을 던진다면? 그것은 어쩌면 파괴적인 형태로 드러날 지도 모른다. 폭력과 마약 등은 반사회적인 모색임에 틀림없으나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억압하기에 기본적으로 닫힌 질문에 불과하다. 채운 샘은 진정한 예술하기란 새로운 삶의 출구를 여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져보면 우리들이 백수 케포이에 합류한 것도 무엇인가 삶의 출구를 여는 행위이다. 나는 회사생활을 하며 무언가 빠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막연한 상태에서 덜컥 취업을 했고, 당연히 끊임없는 결핍에 시달렸다.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을 찾기 전에 할 일은 나를 잘 아는 것이었다. 스스로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국 취업, 퇴사, 취업의 무한 반복에 빠져 하릴없이 늙을 뿐이다. 떨어져서 바라보면 다시 보인다고, 새로운 삶의 출구는 내가 처한 시공간을 근본적으로 재조직해야 뚫을 수 있다. 찾는 자에게 길은 열리니, 마침 나타난 백수들의 정원은 운명과도 같은 것일까. 그 운명 덕분에 이렇게 글도 쓰고 있으니 세상만사 참 모를 일이다. 물론 눈앞에 운명이 나타나도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소용없음은 물론이다. 사주명리학 상으로 봤을 때 자신을 생(生)해주는 것은 방법으로는 공부요, 육친(肉親)으로는 어머니이다. 공부가 자신을 도와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또한 어머니의 모성은 부성과는 또 다른 본능적인 것이다. 이런 점을 옛 선인들은 진작부터 깨닫고 계셨던 것 같다. 새로운 출구를 여는 일은 스스로를 돕는 것, 즉 공부로써 이뤄진다. 공부는 모르는 것에 대한 물음에서 비롯한다. 익숙지 않은 자리로 나아가는 것, 끊임없이 낯선 영역으로 접속하는 것이 제대로 된 배움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발전할 수 없다. 두려움은 낯설고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회피한다. 백척간두 진일보라고 했는가, 천길 낭떠러지에서 두려움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자만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법. 매번 강좌 때마다 질문 만드느라 혹독하게 느끼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 수준이 떨어진다고 타박 받는 형편이니 하다 보면 나아지겠지?

낯선 자리로 나아가기 위해선 역으로 익숙한 곳이 어디인지 살펴보면 된다. 누구나 자기 자신이 가장 익숙한 존재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고 잘 모르는 건 어리석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만큼 막연한 것도 없다. 답이 나올 수 없다. 왜? 질문 자체가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채운 샘은 나는 무엇인가라고 묻기보다, 뭘 욕망하는지 질문하고, 더 구체적으로 지금 뭘 할 수 있는지 따져보라고 한다. 말하자면 질문을 좁혀 들어가는 게다. 예술과 사주명리학(이하 예명) 동아리 첫 시간이 문득 떠오른다. 자기소개를 간단히(!) 하기로 했다. 약 15명 남짓의 인원이었기에, 짧은 인사말과 함께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천만에. 사주명리학 동아리를 선택한 것부터 시작해 구구절절 사연이 이어져 자기소개만 2시간이 걸렸다. 세상에, 사람들이 그 동안 고립된 백수 생활에 찌들어 할 말이 참 많았나 할 정도였다. 자기소개라기 보다 거의 인생역정 발표였으니 짐작이 가는가. 이들이 예명을 선택한 것은 거의 한 가지 이유로 모아진다. 나를 알고 싶다는 것. 나를 안다는 것은 내 욕망의 뿌리를 파헤치는 작업이다. 욕망은 명예욕, 식욕, 음욕, 재욕 등 원초적인 사항이다. 평소에는 점잔 빼고 있어 가려져 있지만 인간의 행동은 대개 이 욕망에 의해 결정된다. 참고로 나는 무지하게 명예욕이 강한 인간이라고 사주에 나와있다. 명예욕 때문에 남들 앞에 잘 보이려고 하고, 자의식도 세다. 과다한 명예욕을 내려놓는 방법은 공부다. 배움 없는 명예욕은 속 빈 강정과 같다. 한마디로 아는 것도 없는 자가 아는 척, 있는 척 하는 게다. 명예를 향한 욕망이 공부로 흐르면, 자연스레 명예욕은 가라앉고 내실은 충만해진다. 내실이 충만해지면 차츰 주위의 인정도 받으니 저절로 명예욕은 채워진다. 즉 비우는 것이 곧 채우는 것이다. 꽉 막혀있던 수도관 밸브를 열어야 물이 통하듯이, 욕망의 흐름 또한 원활히 소통할 수 있게 터놓아야 오행이 순환하고 우주가 생동할 수 있는 이치인 게다. 이런 것은 글을 쓰면서도 매번 느끼는데, 자꾸 독자를 의식하면 글이 써지지 않는다. 타인의 칭찬을 받고 싶은 인정욕망 때문에 스스로를 가두는 꼴이다.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초점을 맞추면 상황은 명료해진다. 사실 할 수도 없는 걸 욕망하면 뭐할까? 짝사랑의 비탄에 빠지는 일이 대개 이런 식이다. 상대의 마음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런데 그 마음까지 어떻게 해보려고 하니 답답하고 가슴이 턱 막힌다. 번뇌와 망상은 이처럼 자신의 신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할 때 자라난다. 초보자와 탁구를 칠 때 상대 대신 쳐줄 수는 없다. 그저 잘 받을 수 있게 넘겨주는 것까지 딱 내 몫이다. 몫을 인정하는 순간 자기의 현 위치가 드러난다. 어디에 서 있는지 깨닫는 순간, 어디로 갈지도 정할 수 있다. 방향성 상실에 기여하는 것이 과거의 아픔과 미래의 불안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은 시간여행의 달인이기도 하다. 오늘 살아가며 옛날의 상처와 몇 십 년 후 일까지 펼쳐놓고 고뇌한다. 이쯤 되면 시공간을 넘나드는 초월적 존재라 할만하다. 베르그송은 과거와 미래가 펼쳐지는 것은 언제나 현재라고 말한다. 과거에 얽매인다는 것은 지금 과거대로 산다는 뜻이다. 나이는 먹었으나 여전히 옛날 습관대로 산다면, 그는 여전히 과거의 존재인 것이다. 시간여행은 이처럼 별게 아니다. 채운 샘은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불러들여 그것을 떨쳐내야 한다고 말한다. 나를 옭아매고 있는 기억과 불안을 눈앞에 끄집어내야 철저히 깨부술 수 있는 것이다. 2시간에 걸친 자기소개는 과거와 미래에 들어앉은 망상이라는 귀신을, 현재로 소환해 벌이는 한바탕 질펀한 굿판이었다. 망상아 물러가라! 호통을 칠 수도 있고, 이제 편히 쉬시오 토닥거릴 수도 있으니, 그것은 각자의 스타일대로 하면 될 일. 이렇게 울고불고 난장을 치르고 나면 새로운 현실이 펼쳐진다. 그 토대에서 삶의 기술로써의 예술을 비로소 써먹을 수 있다. Here & Now! 과거와 미래의 귀신은 승천했고, 내 몸이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알기에 낯선 것에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초식도 깨쳤다. 또한 백수라는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사회환경도 마련되었으니 이제 죽이는 경험을 신나게 즐기면 된다. 백수가 예술하기 위해 필요한 준비운동 끝.

힐러리 스웽크가 주연한 영화 프리덤 라이터스 LA 최악의 우범지대 중 하나인 롱비치 윌슨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실화이다. 거리에는 갱들의 총격전이 난무하고, 인종갈등과 마약 등 이곳에 사는 아이들의 하루하루는 전쟁과도 같다. 살아남는 것이 목적인 그들에게 학교 수업 따위는 의미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부임한 에린 그루웰(힐러리 스웽크) 교사는 문학과 글쓰기로 소통을 시도한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읽으며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하는 인간의 모습을 배우고, 글쓰기로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마주하며 그들은 점차 성장한다. 인상적인 장면 하나. 한 반에도 흑인, 히스패닉, 아시안 등 인종갈등이 첨예하다.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그들에게 에린은 라인 게임을 제안한다. 라인 한 줄을 그어놓고 질문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라인 앞에 서는 게임이다. 폭력으로 친구를 잃어본 사람 선 가까이 와봐 두 명, 세 명 이상. 게임을 진행하며 원수 같던 그들 사이에선 묘한 공감대가 흐른다. 내가 경멸하는 저 녀석도 나와 비슷한 사연이 있구나 하는. 작은 에피소드이지만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굿판을 골방에서 혼자 하지 않고 동네 사람 다 불러놓고 하듯이, 상처의 치유와 극복은 사람들과 함께일 때 이뤄진다. 그리고 그 속에서 기적은 종종 일어난다. 기적이라고 했지만 여기선 예술이라고 해도 상관없겠다. 프리덤 라이터스의 학생들은 150명 전원이 졸업 후 대학에 진학했다고 한다. 백수 케포이필리아 졸업(?)을 앞두고 각 동아리끼리 발표준비에 분주하다. 영화 동아리는 촬영 막바지에 도달한 것 같고, 베이커리 동아리는 어떤 따끈한 빵을 내놓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지 기대된다. 예명은? 글쎄, 신문을 만든다고도 하고, 만화를 그린다고도 하고 지금으로썬 베일에 가려 있다. 어떻든 간에 프리덤 라이터스의 학생, 양산박 호걸, 청석골 두령들이 그랬듯이 유쾌하고 죽이는 일이 매일 벌어지고 있다. 그렇기에 이런 장황한 글을 쓸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나를 수다쟁이로 만드는 그들의 능력에 감탄할 뿐이다. 예술은 음악회, 미술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과 지지고 볶는 공동체 안에 이미 살아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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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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