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그 자체에 내재한 충동에 의해 변증법적으로 지속된다니체의 역사구분법을 원용하면 현재는 아폴론-소크라테스적 원리가 한계에 이르고 디오니소스적 힘이 꿈틀거리고 있다그리스 인민들이 이룩한 신화세계의 기획으로그들은 살아갈 수 있는 가상적 안전지대를 확보했다이처럼 신()이란 현상은 그 최초 설정단계에선 집단적 인간의 욕망이 정교하게 설계된 건축물과 같았다신의 세계를 통해 그리스 인민들은 자연에서 접하는 공포와 전율에 의미를 부여하고스스로의 삶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되었다엄숙하고 절제된 그리스도교의 신적 형상이기보다지극히 인간적인 정념을 지닌 신들의 행태를 거울로 비추어 보며그리스 인민들은 자신의 인간적 삶에 안도한다그렇게 인간은 스스로 신적 존재를 자처하고이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속성을 지닌 이른바 영웅적 존재의 비극적 이야기로 자극된다.

 

하지만 신을 조립한 설계자들의 후예는 그것의 설계의도를 망각하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신은 불가해한 세계의 관념과 이상이 뭉쳐 빚어진 거대하고 단일한 관념으로 숭배된다신은 의미의 과잉이다신앙은 미지의 것을 해명해주는 유일한 창구로 기능하고인간의 유아적 의존성을 부추긴다이제 니체가 신은 죽었다’ 라는 사실 확인과 함께 비로소 인류는 유아기적 단계를 벗어나 청소년이 되었음을 실감한다그리스 신화에는 크로노스가 아버지 신인 우라노스를 살해하려는 거세 모티프가 있다거세는 곧 생식력창조능력을 박탈하는 것이다아버지-신으로써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행해진 거세 행위는창조 능력을 가진 자만이 신적 위업을 달성할 수 있다는 상징과 같다.

 

아버지를 거세하고 최고신이 된 크로노스와 달리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자신이 만든 세계를 스스로 파괴하고 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방황하는 청소년의 모습을 닮았다다윈으로 알려진 새로운 세계는 인간의 구세계를 난도질했고이에 인류는 경악한다도대체 왜인간은 여전히 아버지-신 앞에 엎드린 어린아이와 같으며자신이 이미 생식능력을 갖춘 자로 성장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이것이 근대의 위기이며염세주의 혹은 허무주의의 도래인 한편인류의 사춘기적 홍역이다.

 

인간이 스스로 창조설계자로서 자각했던 시절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제우스가 크로노스를 물리치고 스스로 최고신에 오른 것처럼제우스의 모사 혹은 현현(顯現)인 그리스 인들은 이미 인간 스스로 세계의 정점이 될 수 있음을 아폴론적 가상으로 예감했다이는 근대에 이르러서야 다윈의 탁월한 이론 덕분에 다시 증명되었고 니체의 정당한 선언으로 환기되었다인간은 자신의 창조능력을 인식하고 그것을 표출함으로써 당당한 삶을 구가할 수 있다다윈은 인간과 동물이 같은 기원에 있음을 알아냄으로써인간이 설계한 신에 의한 안락한 종속 혹은 자발적 노예상태에서 인간을 구출했다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러서 이뤄낸 구원인가인간이 설계자인 자신의 위치를 자각할 수 있을 무렵그럼에도 반신반의하는 인간들에게 니체는 사자후를 내뿜는다두려워하는 인류여그대는 의심하지 마라인간은 신을 만들고 또 부수는생성과 파괴의 이중적 충동을 융합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절대적 인간 긍정의 정신을 찬양하고이를 부정하고 의혹의 늪에 침잠하려는 교활한 욕망을 분쇄해야 한다.

 

소크라테스 이후 오늘날까지 인류 스스로 결박 당한 신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과정이었다면, 22세기 이후의 세계는 인류가 창조하고자 욕망하는 또다른 신인 인공지능과의 대립이 화두로 떠오를 것이다신이 그랬듯 인공지능 역시 인류에 의해인류를 위해인류의 인공지능에서 기원한다인류가 신을 창조하고 범한 맹목적 오류처럼또다른 신적 존재인 인공지능에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인가아니면 새로운 윤리를 창안할 것인가가 관건이다인류는 이처럼 생성과 파괴의 우주적 원리를 내재한 창조적 존재로써그 쾌감으로 삶을 지속시킨다신이든 인공지능이든 인간은 자신의 대용물을 섬기든지 혹은 부리든지 양자택일을 강요당한다.

 

인간은 그가 창조한 예술작품으로 파괴와 창조를 거듭할 뿐이다그러나 결코 예술작품은 인간 그 자체의 목적이 될 수 없다그는 그 스스로 예술작품이 되어야 한다피조물은 조물주 생()의 근원이 될 수 없으며피조물에 의존하는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그는 단지 자신이 만든 아름다운 모래성을 쌓고 다시 부술 권능이 있음을 영원히 자각하는 것으로 족하다조물주는 피조물에 개의치 않는다그는 피조물의 황홀함을 물리치고 그것에 안주하지 않고 홀연히 길을 떠난다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인민들은 정녕 이런 일들을 했던 것인가그렇게 자기 스스로를 예술 작품화한 것이 그리스 비극일까?

 

그리스 비극의 원천은 디오니소스적인 세계의 근원을 아폴론적 가상으로 펼쳐낸 것에서 비롯한다세계가 고통으로 이뤄져 있다는 근원적 진실이러한 고통은 개체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힘을 외부에 투사할 때그에 맞서는 강력한 반발력을 지각할 때 실감하게 된다그 고통의 끝에는 죽음이 자리한다이를 지켜보며 그리스 인민은 망연함에 전율한다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차이는 실로 명확하다양자 모두 세계의 실상이 고통임을 간파했지만쇼펜하우어는 이를 통해 의지의 소멸을 주장한 반면 니체는 정확히 그 반대인 강력한 의지의 배양을 주창했던 것이다그럼 그리스인들은 어떤 길을 선택했는가?

 

니체의 스승이 그리스인들인 만큼그들에게는 유별난 무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아폴론적 가상즉 의미화를 통한 창조의 능력이었다이것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고스스로 납득하게 만들어 삶을 살아갈 만한 세계로 재창조하게 한다이제 그들에게 전율로 다가오던 세계는 욕망의 영역으로 변모한다실레노스의 지혜는 무()를 향한 의지에서삶을 향한 열망으로 전도된다이것이 그리스인들이 창조한 올림푸스 신들의 세계이며아폴론적 정신이 지배한 서사시적 그리스 인민의 질서다그러나 이것은 디오니소스적 진실을 그저 잠시나마 가리고 있는 것일 뿐가상은 결코 진실을 외면할 수 없다디오니소스적 진실은 고통과 죽음이다그것은 곧 개체인 나 자신이 이 우주와 동떨어지지 않은 존재임을 상기시킨다죽음은 인간적 관점에서는 괴로운 일이나우주적 관점에서는 우주로 돌아가는 합일을 의미한다그래서 디오니소스적 속성은 개별성을 극복한 망아(忘我) 상태개체에서 벗어난 무아(無我)의 경지를 가리킨다디오니소스 제례에서 행해진 광란적 도취를 통한 경계의 철폐예컨대 주인과 노예를 구분하지 않는 위계의 무화인간적 질서를 무시한 집단 난교 등은 이러한 짐승과도 같은 원초적 욕망을 표출한다따라서 디오니소스적 속성만으로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뚜렷이 부각될 수 없다.

 

이렇게 아폴론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은 단독으로는 저마다 한계가 분명하며그들이 오랜 세월 투쟁을 거듭해 온 것 또한 도무지 함께 어울릴 수 없는 특징에 기인한다그런데 만약 이 두 속성이 결합을 한다면그들이 오랜 투쟁 끝에 마침내 장엄한 결혼식을 올리는 사건이 벌어진다면그것은 세계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의미화 함으로써근원에 직접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신기원의 창조리라나는 니체가 가리킨 이러한 창조의 순간을 그리스 인민이 도달한 비극의 탄생이라고 생각한다요컨대 그리스 인민은 그리스 비극 예술의 창조로써세계의 디오니소스적 본질에 접속하는 동시에 그것을 아폴론적 가상으로 구현한 것이다이제 그리스 인민은 더 이상 세계의 본질에 대해 외면하지 않고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고도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을 생산한다오히려 세계의 본질로부터 더욱 강한 삶의 추동을 느끼게 된다나는 그러한 절정에 도달한 인간상을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에서 강렬히 예감한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의 전성기에 등장한 두 가지 인간 유형을 비교하며 제시한다그들은 바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적 인간과 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이다이들을 통해 그리스인의 이른바 강건한 명랑성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오이디푸스는 지혜로운 자이다불가해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해결할 정도로 지혜의 오만함에 사로잡힌 그는자신의 운명에는 한없이 무지하고 무력했다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몸을 섞는 가혹한 운명에 절규하여도 그는 결코 운명에 의해 파괴당하지 않는다눈먼 오이디푸스는 광야를 떠돌며 테세우스의 나라에 정착하여 새로운 신탁을 부여 받는다이제 그는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에서안녕을 가져오는 존재로 변신한다고난을 겪고 그것을 극복하는 자그것이 반신반인 즉 영웅이다여기서 나는 문득 인간적 고뇌는 디오니소스적 속성이며그것을 극복하는 신적 힘은 아폴론적 속성이라 느껴진다그리고 그것이 합쳐진 존재가 반신반인의 영웅이며바로 비극으로 구현된다고 할 수 있다비극의 주인공이 일상적 존재가 아닌 영웅적 존재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이디푸스적 영웅은 능동성이 결여되어 있다그는 한없이 수동적인 영웅이다자신의 운명을 알아채지 못하고 고통받고 그것에 단지 파괴되지 않을 뿐이다.

 

운명에 결코 파괴되지 않는 인간도 굉장하지만고통을 직시하고 그것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인간형이 있으니 그가 바로 프로메테우스적 영웅이다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주인공인 프로메테우스는 신 앞의 단독자(單獨者)반항적 인간의 원형이다신에게 맞서는 위대함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한다위대함은 고통을 뜯어먹고 자란다반항적 인간은 곧 예술적 인간과 동일하다예술가는 대중을 의식하지 않는다그는 오직 자신의 디오니소스적 심연만을 응시할 뿐이다그리고 그 심연을 아폴론적 언어의 가상으로 표현해내는 스스로를 오롯이 관조한다여기서 아폴론적 속성과 소크라테스적 속성을 잠깐 비교하면둘은 닮은 듯 다르다아폴론적 속성이 타락하고 변질한 극단이 소크라테스적 이론형 인간의 모습이라 생각한다아폴론적 충동의 근본은 관조에 있으나소크라테스적 특징은 논리와 이성에 의한 해명이다소크라테스적 인간은 오직 아폴론적 가상-표상하는 능력을 논리-이성적 설명을 위한 도구로 부릴 뿐이다그래서 둘은 닮아 보이나 다르다.

 

프로메테우스의 파멸적 예언에 제우스 신은 전전긍긍한다신조차 불안에 떨게 만드는 저 반항적 인간이란그는 저항했고 그로인한 벼락을 맞아 천 길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이렇게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시선에서 봤을 때범죄를 저지른 자다그는 자발적으로 신적 질서를 범했으며가혹한 천벌도 그의 선택을 막을 수는 없다인간은 이런 비극적 영웅으로부터 전율하고 감화되며문득 자신이 이 거인을 닮은 존재임을 자각하게 된다그렇게 한 인간은 비극으로부터 자신에게 내재한 프로메테우스적 영웅의 모습을 생생히 감지한다.

 

 

오이디푸스와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인간형과 대조되는 유형으로 니체는 셈족의 신화를 거론한다이미 여기에 니체의 반()그리스도교적 사상이 배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아담과 이브라 하는 호기심 많은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을 표출한 자들그러나 넘지 말아야할 신적 질서를 침범한 그들은 신으로부터 죄를 받는다이른바 타죄(墮罪) 신화 혹은 원죄(原罪) 신화로 불리는 문제이다그들은 너무나도 온순하고 무저항적인 태도를 고수했다니체의 표현대로라면 마치 노예들처럼호기심은 세계의 본질즉 고통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다고통을 살짝 들여다본 그들은 이내 눈을 감아버린다그리고 감은 눈 속에 펼쳐지는 낙원으로 본질을 전도한다그들이 프로메테우스적 존재였다면니체는 스스로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을 자처하며 이러한 전도된 세상에서 단독자로써의 전투를 감행한다그는 소크라테스의 유혹에서 비롯해 셈족으로 이어져 내려와마침내 거대한 무리를 형성한 대중의 저열함에 선전포고를 한다그는 이 전쟁의 사령관이며선지자이고절벽의 프로메테우스이다._()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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