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로써의 허무

 

 

 

 

사물을 흔드는 허무주의

  니체 평전과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을 연이어 읽으며, 허무주의라는 명제가 와닿았다. 나 역시 삶의 어느 순간, 허무의 느낌을 마주했었고 그 텅빈 느낌에 망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가장 강렬했던 허무감은 사람의 상실에서 비롯했다. 이별로 인연이 종결됨으로써, 나의 삶도 갈 곳을 잃은 채 마무리된 기분이었다. 문제는 삶의 의미였다. 삶의 이유라 생각했던 것을 상실함으로써 삶은 방황한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돈-여자-자식-직업 등등 다양할 것이다. 니체를 읽으며, 그 역시 맞서고 있는 것이 허무주의라고 여겨졌다. 신은 죽었다 라는 니체의 말은, 19세기 진화론의 탄생과 더불어 급속히 그 빛을 잃고 있는 신의 위상을 대변한다. 니체가 신을 죽인게 아니라, 주검이 된 신을 이미 죽었다고 확인해준 것이다. 그 이유는 의미를 상실한 신을 껴안고 인간이 함께 몰락하기 보다, 새로운 의미를 생성해서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무주의는 더이상 부정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극복의 대상이기 보다, 일종의 무기로써 작동한다. 왜냐하면 허무주의를 통해 기존의 가치체계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의미의 구조물을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허무는 방아쇠와 같다.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자신을 부여잡고 있는 낡은 가치를 파괴한다. 니체는 이러한 허무주의의 정신을 쇼펜하우어에게서 배운 것 같다. 삶의 실상은 고통이라는 것에 그들은 일치된 견해를 보이지만, 그에 대한 해법은 달랐다. 쇼펜하우어에게는 염세주의, 즉 실레노스의 지혜처럼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으나 일단 태어났으면 하루 빨리 세상을 등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었다. 그러나 니체는 이른바 강함의 염세주의를 추구한다. 그것은 고통을 인정하되, 거기에서도 삶의 의미를 구성하는 철학이다. 고통 속에서 삶을 이어가기 위해선, 기존 가치에 안주해서는 곤란하다. 고통을 삶의 의미로 승화할 수 있는 가치의 전도 혹은 의미의 재구성이 요청된다. 그리고 그렇게 의미화 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간만의 고유한 힘이다.

삶을 구성했던 의미들은 그것이 한번 허무의 순간을 마주함으로써 기존의 의미를 잃게 된다. 상실에서 비롯하는 일종의 의미의 공백기이다. ‘아무 의미없다’고 냉소적으로 바라보거나, 오히려 더욱 집착하거나 극단의 태도를 보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허무는 탈의미화의 작업을 수행한다. 허무로써 기존의 가치가 무력해지며, 비로소 새로운 의미를 구축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다. 허무는 망치다. 끈끈한 의미의 연결망을 박살내는 무기이다. 그래서 허무의 칼바람이 일상에서 불쑥 찾아올 때, 의미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기회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허무에 일방적으로 공격당하기 보다, 오히려 허무를 무기로써 사용할 수 있는지 탐색한다. 허무를 통해 나는 나 자신을 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 허무주의는 사물 혹은 관계 나아가 자아상을 흔들며, 고정된 자아의 신화에 도전한다.

 

 

역사적 기억으로써 자아

  나를 나라고 여기는 자아상은 천부적인 것일까? 개체는 기억으로 자기 정체성을 인식한다. 자아는 곧 기억의 총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현재의 나임을 증명해주는 것은 자신의 기억과 주변의 나에 대한 기억이다. 이 중 한 가지라도 사라지면 나는 내가 될 수 있을까? 본인의 기억상실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나를 알아보지 못해도 나는 이전의 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지 않고, 나로써 대하지 않으면 나는 이전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이러한 가정은 자아라는 것이 생각보다 굉장히 취약한 기반에 놓여 있음을 의심하게 한다. 자아가 취약할 수 있음은 그것이 기억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보면, 기억에 의해 자아는 얼마든지 그 모습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마치 프로그래밍을 하듯, 새로운 기억을 입력하면 새로운 자아가 출력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상태가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초인간적인 낯선 지평이 되지 않을까? 기억에 얽매이지 않고, 필요하면 기억을 스스로 망각함으로써 삶을 살아가게 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여기서 망각이라 함은 엄밀히 보면, 의미의 무게를 덜어냄을 뜻한다. 가벼워지면 그 기억은 자신을 짓누르지 않는다. 허무의 순간에 기존의 기억은 재평가되며 그에 따른 무게 역시 재조정된다. 가벼워진 기억은 소멸되고, 무게를 부여받은 신선한 기억이 삽입되어 새로운 자아 혹은 제2의 천성이 가동된다.

  제2의 천성은, 제1의 천성의 견고함에 맞서게 된다. 그것은 나를 형성하고 있는 기존의 강력한 기억망이다. 기존의 기억이 끈끈한 이유는, 자아 정체성의 유지를 위해 사회적으로 권장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과 가장 상이한 점은 기억을 보존하고 전승할 수 있는 능력에 있으며, 나아가 문명의 토대는 기억술에서 비롯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억은 긍정적인 반면, 망각은 부정적이며 질병에 가깝게 취급된다. 망각의 상태는 욕구만으로 충전된 동물에 가까우며,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없는 이로 여겨진다.

  이것은 일종의 기억 숭배의 경향이다. 기억은 개체별로 자아의 연속성을 유지하게 함으로써, 사회의 안정에 기여한다. 각자가 자신의 위치를 기억해서 이탈하지 않고, 사회 구성원으로의 역할을 수행한다. 요컨대 사회의 정체성이 성립된다. 집단적, 사회적 정체성의 기억을 닦고 조이고 기름칠 하는 도구로써 역사는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학문으로써 역사학이 근대에 들어와 두각을 보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19세기 서구 민족국가가 본격적으로 성립하면서, 타국과의 차별성을 도모하며 자국민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이제 그들만의 역사적 서사가 요청된다. 국가의 기획자들은 역사야말로 근대국가를 빚어내고 주민들을 하나의 깃발에 모이게 하는 효과적 접착제임을 인식한다. 이제 사람들은 각각 민족 정체성이라는 만들어진 자아에 의해 재정의된다.

  니체가 반시대적 고찰에서 비판한 역사병은 이 지점에서 생겨난다. 독일 통일제국의 인민으로써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것을 당연시하는 여론을 니체는 일종의 거대한 기억생성 혹은 기억조작으로 진단하고 우려했으리라. 그것은 이른바 역사의 이름으로! 라는 미명하에 개인의 개체성을 무시하고, 개인을 과거-국가적 정체성에 얽매이게 만드는 사슬로 작동한다. 그래서 나는 니체의 역사과잉에 대한 비판의 칼날은 근본적으로 국가주의를 향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자유-주체성의 첫번째 장애물은 자연이었으며, 그것은 종교-신으로 대체되었다. 이제 신이 그 절대적 위치를 상실한 당대에 새롭게 왕위을 엿보는 이는 다름아닌 국가인 셈이다. 신처럼 숭배되지도 않으나, 일상 속에서 교묘하게 인간을 잠식해나가는 국가의 시스템을 니체는 그만의 예민한 감각으로 감지했으리라.

  그의 시선에 포착된 학문으로써의 역사는 인간을 왜소하게 만든다. 국가는 그만의 새로운 역사학을 창조했으니, 그것은 바로 통계학이다. 평균치를 산출함으로써 이른바 중산층의 환상을 생성하고, 평균에만 도달해도 그럭저럭 안심하는 소시민적 근성을 주입한다. 중간만 가자라는 인식은 인간의 위대함에 이를 수 있는 동기를 앗아간다. 스스로의 가능성을 자기 안에서 실험하고 평가하기 보다, 다른 이들과의 비교에서만 구할 수 있는 나약함, 그것이 이른바 속물적 행태일 것이다.

 

 

허무를 체험하는 예술의 장

  만약 역사 교육이 개인의 자유-주체성을 진정으로 북돋는다면 개인은 초국가, 초민족적 상상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는 국가나 민족같은 생성된 울타리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가고자 하는 길을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으리라. 정녕 그렇게 된다면 궁극적으로 국가는 소멸할 것이다.

  이것은 작은 상상력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가족, 사회, 민족, 국가라는 마치 천성처럼 여겨지는 토대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역사-교육은 이렇게 제1의 천성으로 굳어진 기억을 해체하고 조립할 수 있도록 하는데 의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파괴를 통해 기존의 가치가 무화됨으로써 의미의 공백, 허무함이 감지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정한 배움이란 허무함을 딛고 이뤄진다. 허무로써 의미를 재평가하고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허무한 순간은 수시로 찾아오지만은 않는다. 질병, 이별, 해고처럼 상실의 순간에 예고없이 엄습한다.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인간의 정신은 대체로 잠들어 있다. 그래서 이러한 고통의 순간을 언제든 체험할 수 있도록 인간은 예술을 발명했다.

니체가 그리스 비극과 바그너의 음악극에서 발견한 가능성이, 이러한 허무의 체험이다. 예술을 통한 일종의 역할 놀이를 통해, 인간은 스스로 고통에 한 가운데로 던져진다. 예술의 참여자가 되어, 하나의 역할-다른 존재를 연기함으로써 제2의 천성은 무대에서 현실화된다. 무대에서 다른 천성을 경험한 자는, 현실이라는 무대로 돌아와 기존의 천성을 가볍게 여길 수 있는 힌트를 얻는다.

  결론적으로 삶 혹은 예술에서 경험하는 허무의 순간은, 실제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삶을 붙들고 있던 낡은 가치는 허무로 인해 도태되고, 허무의 체험으로 인해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 허무의 체험은 이른바 시대의 산물인 자신의 모든 것을 의심하고 질문하는 것과 같다. 기억과 그로 인해 형성된 모든 것을 끝없이 회의하는 태도이다. 나는 니체로부터 허무를 체념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삶의 힘으로 승화하는, 인간의 의미화하는 능력에 대해 배운다. 인간은 의미로 인해 죽기도 하지만, 살기도 한다. 그 의미를 정하는 자는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우리는 의미의 입안자인 동시에 집행자인 스스로의 무한한 능력을 언제나 환기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언제든 우리를 의미로 포섭하기 위해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부터 맞서 싸울 수 있으리라_(끝)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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