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순환도덕면체(無限循環道德面體)

 

 

니체 세미나 시즌3을 마치고 마무리 에세이를 구상하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동력은 무엇인가? 책에 밑줄 친 부분과 메모를 취합하며 천천히 윤곽이 드러났다. 그것은 일종의 쾌감으로, 나를 구성하고 있는 가치를 인식함으로써 가해지는 해방 혹은 균열의 쾌감이었다. 본 에세이에서 그러한 해방감과 쾌감에 대해 규명해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앞으로 이어갈 니체 세미나에서 나만의 자체 동력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기묘한 2인3각

올해 초 니체 공부와 함께 연애를 시작했다. 연인도 연구실에서 오랜 시간 공부를 했고, 그래서 니체 세미나에서 얻은 깨달음은 연인과 대화 소재로 자연스레 공유할 수 있었다. 거의 동시기에 출발한 나와 니체, 그리고 나와 연인과의 만남은 마치 2인3각의 걸음을 걷는 것처럼 서로 밀착했다. 이러한 미묘한 삼각관계의 효과는 시즌3이 되어서야 서서히 느껴졌다. 나 자신이 이전과는 어느 정도 달라짐을 체감함은 연인과의 관계에서였다. 말하자면 니체의 이론은 연애라는 현장에서 은연 중에 실험되었던 것이다.

가장 현저한 체감은 도덕으로 대표되는 기존 인식론을 붕괴시킨 니체의 주장에서 비롯한다. 국경 하나만 넘어가도 잣대가 변하는 도덕의 용법, 유용성을 위해 수립된 도덕의 기원을 검토하며 내가 으레 옳다고 여기는 도덕의 제반 가치가 발견되었다. 그 도덕의 일부에는 나 자신의 연애관, 달리 말해 연애도덕도 포함되어 있었다. 연애의 현장에서, 나는 기존 연애도덕의 공식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의도해서라기 보다는, 니체를 공부하며 자연스럽게 그런 의식이 싹튼 것 같다. 일단 남자는 이래야 해, 여자는 이래야 해, 라는 명제에 대해 무척이나 망각하고 싶었다. 망각해야 할 정도로, 내가 지니고 있던 연애라는 현장에 요청되는 도덕질서는 강고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인간이 인식함에 있어, 선악의 논리로 무장한 도덕은 감옥으로 작동한다. 선악의 쇠창살 안에 갇힌 인식은 제한된 부분만 받아들이고 판단하게 된다. 나를 구성하는 연애도덕의 선과 악, 즉 ‘이래야 해’, 혹은‘이러지 말아야 해’라는 당위는 스스로를 속박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속박이기보다, 자연스런 공기와 같았다. 니체를 통해 그것을 인식하기 전까지 말이다.

 별안간 그전에는 별 생각 없던 나 자신의 이른바 ‘스펙’에 대해 스스로 평가하게 되고, 내가 사회적 기준에 적합한 연애할 만한 클라스(?)인지 판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 못 미치는 것에 우울함이 느껴지는 뭔가 굉장히 거시기한 기분을 체험하며 ‘그래, 이것이 니체가 경멸한 속물의 모습인가?’ 되묻는다. 연애를 하기 전만 해도 이런저런 세미나를 통해 굉장히 ‘깨어있다’고 자부했다. 연애를 하면서 여전히 ‘기존 도덕’으로 이뤄진 스스로를 지켜보며, 견고한 도덕의 감옥을 실감했다. 소득은 있었다. 감옥을 감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감옥 안에 있는 것이 불편했고 답답하기 짝이 없으며, 나가고 싶은 갈망이 생겼다. 정신을 차리고 가만히 들여다보니, 감옥처럼 보이던 쇠창살이 있는 방은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철컥!’ 내가 그냥 열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이렇게 그는 도덕의 방을 나서게 되었다.

 

나 이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저 아래로 내려가려 하거니와, 나 또한 그들이 하는 말대로 너처럼 몰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노라 [즐거운 학문] p316

 

나 자신을 따르며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부딪히는 지점에서 한탄하듯 말한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요?’ 정답을 구하려는 수험생의 도덕으로 단련되었기에, 정답이 없는 세계에 던져진 심정은 길 잃은 자의 그것과 같다. 도덕의 방을 나서며, 어떤 길이 놓여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가야 할 길을 콕 집어 알려주는 것이야말로 도덕과 종교에서 많이 해온 고전적 방식이 아니던가. 니체에게 들은 좋은 말이 참으로 많지만, 그것을 참기름 짜듯 압축하면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나(니체)를 따르지 말고, 너 자신을 따르라!’ 여기에 한마디 더 얹히면 ‘모든 것에 회의하라, 너 자신 조차도’ 정도로 정리할 것 같다.

 

나를 따르는 것-너 자신을 따르는 것

나의 방식과 말에 유혹되어

나를 따르고 추종하려 하는가?

오직 너 자신만을 충실히 추종하라

그것이 나를 따르는 것이다-여유롭게! 여유롭게! [즐거운 학문] p39

 

그래서 나도 나 자신의 방식을 이리저리 궁리해봤다. 내가 만든 것도 아닌 기존 연애도덕을 충족시키려 스트레스 받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연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몇 가지 실천하는 것을 언급하자면 첫째, 상호 존대. 둘째, 알아봐주기를 기대하지 않음. 셋째, 수입 공개(?).

먼저 상호 존대를 하고 싶었다. 기존 연애도덕에서 치명적으로 다가왔던 점은 불 같은 ‘소유욕’이었다. 나에게 있어 소유욕은 상대를 통제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며, 동시에 상대로부터 소유 당하고 싶은 이중적 갈망이었다. 이런 갈망은 의존성을 심화했으며 상대 없이는 일상을 지속할 수 없는 장애를 가져왔다. 그래서 연령과 친소를 떠나 상호 존대의 언어생활을 기초로 나와 당신이 서로 분리된 저마다의 욕구와 자신만의 길을 가는 존재임을 기억하고 싶었다. 다음으로 알아봐주기를 기대하지 않음은, 피 말리는 독심술을 겨루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도 잘 모르는데,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바를 언어화하여 표현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싶었다. 세 번째는 좀 웃기긴 한데, 어찌 보면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연애 초창기에 나의 수입을 깠는데(?) 진짜 너무나도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혼났다. 그런걸 말하는 것도 없어 보이고, 또한 상대방의 기준에 턱없이 미치지 못할까 싶은 걱정, 자존심이 입을 상처에 대한 불안 등 이래저래 강렬한 경험이었다.

내가 세운 도덕 혹은 연애윤리는 기존의 나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마련했다. 자기 가치의 설정은 일종의 무게 추를 다는 것과 같다. 기존 사회질서의 도덕과 습속의 중력은 마치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끌어당긴다. 나는 우주를 질주하는 한줄기 유성(流星)이고, 항해를 계속하려면 외부의 중력에 맞설 수 있는 나만의 무게가 필요하다. 여전히 한없는 가벼움에 팔랑거리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어느 정도 무게감이 생긴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거기에서 오는 모종의 해방감 혹은 쾌감이 있다. 이 느낌은 뭐라고 해야 할까, ‘설마 될까 싶었는데 쫌 되네?’라는 기분이라고 할까. 마치 월급을 깔 때 부들부들 떨다, 까고 나서 굉장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때의 쾌감과 비슷했다. 아, 이것은 어떤 종류의 쾌감일까!

 

삶, 쾌-불쾌의 향연에서

혹시 이처럼 자기 가치를 만드는 행위는 어쩌면 쾌감을 가져오는 게 아닐까? 쾌와 불쾌를 상반되는 것으로 인식하면 결코 알 수 없는, 최대한의 쾌는 최대한의 불쾌를 동반하는 인식의 순간으로써 말이다.

 

고도의 인간성에까지 성장한 사람에게 세계는 점점 더 풍부한 것이 된다. 점점 더 많은 관심의 낚시 바늘들이 그에게 던져져, 자극의 양이 끊임없이 커지고, 쾌와 불쾌의 양도 그만큼 늘어난다. 이에 따라 고급의 인간은 더 행복해지는 동시에 더 불행해진다. [즐거운 학문] p277

 

불쾌함과 고통을 회피할수록 삶이 미적지근한 이유가, 고통과 희열이 실은 같은 뿌리를 공유하기 때문이라면? 지루한 삶이 최소한의 불쾌를 원하기에 역시 최소한의 쾌감만 동반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희열과 쾌감을 원한다면 고통이 있는 곳에 스스로를 자리해야 하리라. 니체가 베수비오 화산 옆에 너의 근거지를 마련하라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월급을 깔 때 몸을 배배 꼬고, 식은땀을 흘리던 광경이 떠오른다. 나에게 수입 공개는 화산으로의 등정이었고, 나를 구성하던 연애도덕, 자의식과 콤플렉스의 일부가 화산의 열기에 의해 녹아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오르기까지 고통스러웠으나, 막상 오르고 나니 녹아 내린 빈자리에서 무언가 짜릿한 생성의 쾌감이 느껴졌다.

이는 단지 고통을 감수하라는 종교적 고행과는 결이 다르다. 니체의 시선은 고통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그의 눈빛은 ‘너의 길을 가라’에 놓여 있다. 자신의 길,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나가면 쾌감과 불쾌는 함께 손을 잡고 너 자신을 찾아온다. 나는 여기에서 니체의 고통스런 탄성, 환희의 고함을 상상한다. 인식의 열망! 인식함으로써 기존의 세계로부터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을 겪으나 그가 도달하는 새로운 지평! 여기서 니체는 무한한 감동을 했던 것이다. 이제 고통과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처럼 보였던 역풍은, 장애물 그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다. 고통과 역풍 모두 인식의 대상이며, 삶 그 자체가 사유의 실험 장으로 다가온다. 그가 영원회귀를 열망하고 긍정하지 않을 수 없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삶이 의무나 저주받은 숙명이나 기만이 아니라 인식하는 자의 실험이 될 수 있다는 저 사상이 나를 찾아온 그날 이후로! 내게 그것은 영웅적 감정이 춤추고 뛰어 노는 위험과 승리의 세계이다. “삶은 인식의 수단”이다. 이 원칙을 마음속에 품고 있으면, 인간은 용감해질 뿐만 아니라, 심지어 즐겁게 살고 즐겁게 웃게 된다. [즐거운 학문] p294

 

영웅, 즐거운 가치 창조자로

나는 자기 가치의 창조로 나만의 중력을 획득하며 작은 쾌감을 맛보았다. 쾌감의 본질은 스스로의 힘에 대한 자각에 있다. 타자의 가치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자신의 것(물론 이것도 궁극적으로 회의의 대상이다)으로 설정된 작은 세계를 직접 시뮬레이션 하는 행위에서 스스로의 힘을 실감한다. 그렇게 사회의 질서, 고전적으로 말하면 신의 질서에 의탁하지 않은 자들을 그리스 식으로는 프로메테우스적 영웅, 니체의 표현대로면 위버멘쉬일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힘을 자각한 드문 인간 유형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누가 영웅이고 위버멘쉬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영웅과 위버멘쉬의 덕목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그런 것이 설령 있다면 종교와 도덕에서 정해놓은 미덕과 무엇이 다르랴. 다시 말해 영웅 혹은 위버멘쉬는 스스로가 끊임없이 자기 가치를 생성하고 거기에서 쾌/불쾌를 동시에 경험하며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는 행위자이며, 자신이 스스로를 판단하는 행동 기준이다.

 

저 선한 것들을 부정하고, 그것들로부터 우중(愚衆)들의 갈채와 손쉬운 유행을 박탈하여, 그것들을 다시 고독한 영혼의 감춰진 수치로 만들어보라! 아마도 그대들은 이것들에 다가가는 유일한 인간 종족들, 즉 영웅적인 인간들을 얻게 될 것이다. [즐거운 학문] p269

 

이들이 드문 까닭은 인간은 자기 자신을 너무나도 과소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가치를 만들다 주저 앉고, 상처 받고, 좌절하여 이제는 안전하게 시도 조차 하지 않는 상태에 머물고 있다. 실패와 상처에 대해 니체는 말한다. 그로 인해 너는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고! 어쩌면 나 역시 그랬던 거 같다. 내가 니체 세미나에 왜 들어왔는지 이제야 조금씩 알 것만 같다. 그러한 영광스런 실패와 상처 덕분에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기 위해 여기 나 서 있다고. [즐거운 학문]에서 그 유명한 ‘신은 죽었다’라는 구절을 접하며 세미나 구성원 모두가 찬탄했다. 이 문장이 우리를 여기로 이끌었구나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다시 보면 ‘신은 죽었다’가 아니라 ‘(우리가) 신을 죽였다’이다. 그것을 해낸 스스로에 대해 재평가를 함으로써 긍지를 가져도 충분하다.

 

인간에게 의미를 지니는 세계를 창조한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바로 이에 대한 앎이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으며, 어느 한순간에 그것을 포착할지라도, 바로 다음 순간에 그것을 잊어버린다. … 우리는 우리가 지닌 능력만큼의 자부심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즐거운 학문] p278

 

도덕의 방을 나서고 마침내 깨달은 것은, 그곳이 바깥이 아니라 연결된 또 다른 방으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무한하게 순환하는 영겁의 도덕. 그래도 괜찮다. 새로운 도덕의 방에서 즐거운 인식의 탐구를 할 것이니. 이런 마음이라면 다음 시즌 세미나의 동력으로 삼아도 좋다_(끝)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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