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의 사다리 위에서

 

제발, 그 질문만은!

  이 글은 왜 쓰셨어요? 비수처럼 질문이 옆구리에 박힌다. 가장 듣고 싶지 않고, 답하기 어려운 질문. 그러면서도 ‘글을 그렇게 주절주절 많이 썼는데, 그 질문이 나오다니 이 사람은 독해력이 부족한가 아니면 내가 그렇게 글을 못썼나?’ 싶은 불만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니체 세미나 시즌1 독후감 토론 때도 그렇고, 시즌2에도 어김없이 왜 썼냐는 질문이 나왔다. 하지만 한 두 명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관념적이다, 글쓴이가 안 보인다 라는 얘기에 백기를 들 수밖에 없다. 사실 일부러 사적 에피소드는 배제했다. 왜냐하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TMI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니체 글을 읽고 나의 느낀 점만 쓰면 되는 것 아닌가? 굳이 어떤 개인적 이야기가 필요한가 싶었다.

  이런 저항감은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적 에피소드가 왜 필요한지 이해해보려 했다. 에피소드가 없는 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되는 접점이 적다. 삶에서 겪는 일은 아주 특이한 사건이 아니고서는 대체로 비슷하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런 상이한 타인의 경험에서 우리는 자신을 확장할 수 있다. 하지만 에피소드가 없으면, 그 사람이 딛고 있는 현실이 와 닿지 않으며, 고로 그에 따른 의견도 그저 관념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대충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니체의 책을 다시 들여다봤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그렇게 관념적인 책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어렵긴 하지만, 일단 문단이 짧고,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인간 심리를 나름대로 파헤쳐서 흥미로운 구석도 있었다. 개인적인 에피소드에 대한 나름의 고민을 하며, 이 책을 죽 읽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니체라는 사람의 맨 얼굴이 책에서 느껴졌다. 가령 병자가 타인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힘을 행사하는 대목에서는, 침대 위에 드러누워 꼬장을 부리며 다음과 같은 통찰을 서둘러 메모하는 니체의 모습이 떠올랐다.

 

병자나 우울증에 걸린 사람과 교제하며 살면서 스스로 물어보라. 능란하게 호소하고 흐느끼며 불행함을 과시하는 것이 결국 함께 있는 사람을 괴롭히기 위한 것은 아닌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이하 생략] p78

 

  이런, 이거 아닌 척하지만 자기 얘기구먼! 그의 충직한 조수인 페터 가스트가 회상한 바에 의하면, 환자 니체는 정말 간호하기 어려운 지독한 인간이라고 불평했다. 걸핏하면 호출하고, 요구하는 바는 많고, 이랬다 저랬다 변덕도 심한 인간 니체! 아픈 니체는 침대에 누워 가스트를 오라 가라 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실감했을 것 같다. 아니 확실하다. 이렇게 상세히 약자의 심리를 꿰뚫어보고 분석함은 단지 관념적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그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뭔가 지루해 보였던 니체의 글이 한 순간에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래, 이 사람이 그저 처박혀 공상과 관념으로만 글을 휘갈겨 쓴 게 아니구나. 그런 생각에 이르자 니체의 주장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그럴 듯’하게 공감이 되었다. 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하고. 어라, 이것이 관념적이지 않고 생생한 글쓰기 혹은 글읽기일까?

 

니체, 변기 뚜껑을 열다

  그럼 혹시 니체도 그전에는 나처럼 어떤 관념적 사유에 빠져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내가 비극의 탄생이나 반시대적 고찰에서 접한 니체는 뭐랄까, 굉장히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려웠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관점에서 책을 다시 살펴보았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의 1장부터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다. 형이상학이란 뭐 간단히 말해, 현실 너머에 어떤 근본, 본질 등이 있을 거라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은 계속 변하지만, 그 배후에는 불변의 무엇이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니체는 그딴 것은 없다고 말한다. 전부 인간의 바람과 희망과 욕구가 녹여낸 오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른 장을 살펴봐도 대략 이런 이야기의 변주다. 종교, 예술, 형이상학적 그림자가 드리워진 철학에 스며든 기적이나 구원 같은 것은 오류라고 잘라 말한다. 니체는 목사의 아들로 독실한 종교적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가 전작인 ‘비극의 탄생’에서 언급한 예술은‘미적 현상으로서만 실존과 세계는 영원히 정당화’된다며 거의 ‘예술이 삶을 구원한다’에 가까웠는데 그런 입장을 뒤집은 것이다.

 

시인들은 행동으로 헤쳐나가려는 불만에 찬 차들의 열정을 해체하고 일시적으로 해소시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으로 자신들의 상태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저지한다. p169

 

 그리고는 자신의 이러한 주장이 인간을 불편하게 할거란다. 사실 불편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자신을 이루던 종교, 예술에 대한 견해를 뒤집음으로써 고독해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입장을 바꾼 것은 바그너에 대한 실망 등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그러한 관념적 형이상학에 내재한 오류를 눈뜨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단지 관념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미친다고 니체는 진단했던 것이다.

 

가장 위대한 철학자의 오류도 대체로 특정한 인간 행위와 감각을 잘못 설명하는 데서 시작되었다는 것, 잘못된 분석, 예를 들면 소위 비이기적인 행위를 기초로 잘못된 윤리학이 수립되었으며 그 윤리학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시 종교와 신화적 비본질을 인정하게 된 것, 그리고 끝으로 이런 음산한 유령의 그림자들이 물리학이나 세계관 전체에도 드리워졌다는 것이다. p66

 

  이제 니체는 사유의 출발점을 인간의 구체적 일상에서 시작한다. 인간 심리를 일일이 관찰함으로써 거기에 부여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오류’에 대한 분석에 돌입한다. 니체는 이렇게 접근하는 것이 학문이라고 한다. 관념의 안개를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일 말이다. 그렇게 하면 여러 가지로 불유쾌한 일에 마주할 수도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변기 뚜껑을 여는 것처럼,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마주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심리학적 오류와 이 분야에 대한 둔감함은 인간성을 향상시킨다. p65

 

  그렇다. 그냥 적당히 덮고 넘어가면 모두가 위안을 받으며 행복해질지도 모른다. 분명 그럴 것이다. 다만 그것은 잠정적 행복일 것이다. 닫혀진 변기 뚜껑 안에서 그 무엇이 숙성되면 어떤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까! 그래서 스스로 TMI를 싫어하기에 사적인 에피소드를 언급하는걸 원치 않는다고 했던 나의 심리를 관찰했다. 일단 내 사적 얘기가 재미없을 것 같다고 느낀다. 상대방이 나의 이야기를 TMI로 느낄 것 같아서 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어떤 관념 혹은 개념적 지식을 장광설로 떠들어 대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에세이를 쓸 때, 내가 알고 있는 혹은 흥미롭게 느낀 부분을 의식의 흐름대로 줄줄 많이도 썼다. 그리고 돌아오는 ‘이거 왜 썼슈?’ 커헉..! 결국 관념만으로는 사람과 소통은 어렵다. 관념은 나 자신의 머릿속에만 있기 때문이다.

 

속박, 다른 말로 자유정신

  에세이를 처음에 전혀 다른 주제로 썼다가 바꿨다. 왜 이걸 썼나요? 라는 질문이 도무지 짜증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최소한 관념적이라는 느낌에서만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짜증 섞인 마음에서 문득 눈에 띈 부분이, 니체가 그렇게 비판했던 종교와 예술을 마냥 나쁘게만 본 것이 아니라는 대목이다.

 

종교적이었던 시대를 경멸하지 말라. 어떻게 네가 아직도 예술에 진정하게 접근하고 있었는지를 철저하게 규명하라. 너는 바로 이러한 경험들의 도움으로 앞서 간 인류의 엄청난 길의 여정을 더욱 잘 이해하며 뒤따라 갈 수 있지 않을까? … 사람들은 종교와 예술을 어머니와 유모처럼 사랑해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명해질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서 바라보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p283

 

  종교와 예술을 비판하지만, 그러한 오류와 속박으로 인해 니체의 사유는 잉태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누구보다 종교와 예술의 분위기에서 성장했던 니체는, 그것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사유를 일구어냈다. 속박을 속박이라 여기고 순응-맹목적인 사람은 영원히 속박될 뿐이나, 속박을 감지하고 그것을 떨쳐내려고 하는 자-근거를 찾는 이는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나아갈 수 있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짜증나던 마음은 어느 정도 내려가고, 그 덕분에 이런 글이라도 쓸 수 있게 되어 고맙게 느껴졌다.

 

네가 어떤 존재이든 스스로 경험의 샘이 되어 너 자신을 도우라! 너의 본질에 대한 불만을 던져버리고 네 자신의 자아를 용서하라. 왜냐하면 어쨌든 너는 인식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백 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사다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행복 때문에, 깊은 유감을 가지고 네가 던져진 것으로 느끼던 시대는 너를 복되다고 찬양하고 있다. p283

 

  위의 인용문은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다. 나 자신의 실수, 오류는 배움으로 나아가는 도정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것은 인식의 사다리를 이루며, 나는 그것을 하나하나 밟으며 오르락 내리락 나아가고 있다. 필시 니체가 말한 동반자로써의 자유정신은, 인식의 사다리가 되어 주는 나 자신의 과오, 불안, 약점 등등이다. 니체여! 그대는 얼마나 고독했을까 라고 말하면 실례겠지. 인식의 슬픔과 고통에 머물러 있는 나 같은 사람은, 여전히 사다리를 오르며 현기증에 시달린다.

 

인식은 슬픔, 가장 많이 아는 자들은

가장 깊이 숙명적 진리를 탓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식의 나무는 생명의 나무가 아닌 것이다. -바이런 p126

 

하지만 그대는 말했지.

 

너는 이러한 목표를 지닌 그러한 삶이 너무나 힘들고 모든 유쾌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러하다면, 너는 아직 그 어떤 꿀도 인식의 꿀보다 달지 않다는 것, 드리워진 고난의 구름도 하나의 유선(乳腺)으로 너에게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으며 너는 기운을 회복하기 위해 그것에서 우유를 짜내게 되리라는 것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p284

 

  인식의 꿀! 단 한 뼘이라도 삶을 다르게 해석하여 달콤함을 맛봤다면 그것은 사유의 힘이다. 세계가 다수의 의미로 이뤄져 있음을 느낄수록, 그 힘은 증대되고 자유로워 질 것이다. 사유의 종착지는 없다. 인식하고 회의하는 행위 그 자체를 위해 영원히 방랑할 뿐. 니체여, 그대는 너무 멀리 있구나._(끝)

Posted by 지장보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