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와처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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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미셸 푸코 (나남,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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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감시와 처벌 1부를 중심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왜 지금 푸코인가?

미셸 푸코의 작업은 새로운 인간주체를 탐색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새로움은 현재의 모습을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새로운 인간상의 모색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속성을 파악해야 가능하다. 21세기의 현대인은 어떤 존재인가? 그들은 어떤 기제에 의해 움직이고, 어떤 욕망에 반응하는가? 그런데 현대인의 속성이라는 것은 많은 부분이 이른바 근대라는 지점에서 유래한다. 역사를 직선으로 펼쳐놓았을 때, 근대라 불리는 특정 시기에 이루어진 변화가 오늘날 사람들의 정신과 신체를 형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변화는 매우 급격하고, ()근대와 흐름이 매끄럽게 이어질 수 없는 불연속적인 특징을 지닌다. 수천 년 동안 고정되어 있던 인간의 양태가, 불과 몇 백 년 기간 동안 딴판으로 바뀌었다면 급격하고 불연속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인간의 속성이라는 것은 그 범주가 무척 다양하다. 그래서 푸코는 그것을 각개격파 식으로 하나하나 파헤치기로 작정한 듯싶다. (), 지식, 권력, 임상의학, 광기 등 다양한 테마의 연구로 근대의 속성, 즉 근대성의 뿌리를 파고든다. 이처럼 푸코는 현대인의 속성을 그 기원에서부터 역추적한다. 나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다. 그렇기에 근대성을 탐구하는 푸코의 작업은 현대 인간은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덧붙여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런 시각으로 푸코를 읽으면 좀더 몰입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광범위하기 때문에, 푸코의 방법처럼 각개격파의 방식을 따라갈 필요가 있다.「감시와 처벌」이 다루는 주제는 감시를 내면화한 주체의 모습. 달리 표현하면 나는 왜 보이지 않는 타인의 눈을 의식하는가?’라 할 수 있다. 앞으로 이런 문제설정을 하고 독해를 하겠다. 정말 인간에 대한 급격한 변화가 죄다 근대에 이루어졌다고 하니, 도대체 그 시대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

권력은 신체를 통해 구현된다. 신체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능력은 곧 힘이다. 그래서 지배자들은 권력과시를 위해 범죄자들의 신체를 이용했다. 범죄자의 몸은 광장에서 도살되는 가축마냥 잔인하게 분쇄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스펙터클은 권력의 명백함을 드러냈다. 그런데 19세기로 접어들며 잔혹한 신체형은 점차 사라지고 오늘날과 유사한 사법체계의 기초가 세워진다. 이것을 휴머니즘의 진보라 하면 섣부른 단정이다. 19세기는 합리주의와 이성의 시기이기도 하다. ‘이성적관점으로 보았을 때, 이전의 현란한 사형집행에 점차 문제점이 발생했던 것이다. 잔혹한 사행집행은 그냥 마구잡이로 이뤄졌던 것이 아니라, 고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정교하게 진행되었다. 가시적인 고통이 클수록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은 공포를 느끼고, 이것은 권력이 노리는 바였다.

 

그런데 정교한 계산에 의해 짜인 사행집행은 가끔씩 삑사리가 났다. 사지를 말에 매달아 몸을 찢겨 죽어야 하는 애초의 기획(!), 말이 우왕좌왕하는 와중에 실패한다. ! 왕을 암살하려 했던 극악의 죄인을 짜릿하고 무시무시하게 찢어 죽어야 하는데 이게 웬 시추에이션? 예기치 못한 상황에 사행집행인들도 허둥대다 윗전의 허락을 받고 직접 칼로 사지를 잘라낸다. 스펙터클을 기대했던 쇼(Show)는 한바탕의 블랙 코미디로 전락한다. 신체형이 성행하던 시절, 죄인에게 가해지는 사형집행이 우연이든 실수이든 간에 실패하면, 사형수를 사면해주는 것이 암묵적 관행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국가권력으로선 치명적이다. 죽여야 할 놈을 죽이지 못하니 권력이 공포를 유발하기는커녕 조롱의 대상이 된 것이다. 당시 사형집행장에 모여든 민중의 분위기는 양면성을 띤다. 공포에 겁을 집어먹거나, 부당한 권력을 향해 저항하는 연대의 장이 되거나.

 

삑사리의 형태는 사형수의 언동에서도 드러난다. 권력으로선 사형수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대중 앞에서 참회하는 일이 최상이다. 그래야 잔혹한 신체형과 그것을 행사하는 권력의 합당함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죄수들은 고문에 굴복하지 않고 법에 대항한다. 대중은 이들을 영웅시하고 명예로운 것으로 여겨 이에 대한 언술을 생산하고 유통한다. 이는 권력이 의도한 바와 거리가 멀다. , 처벌이 행해지는 지점에서 양극단(국가권력-민중)이 행사하는 권력의 전략이 서로 대결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푸코의 권력 정의를 살펴야 한다. 푸코는 권력을 특정인·특정집단의 소유물이 아닌 관계망 속에서 행사되는 전략이라고 봤다. 따라서 권력은 나와 국가, 나와 친구, 나와 상사, 나와 부모, 어떤 관계에서도 작동하는 원리인 것이다.

 

신체에서 정신으로 이동한 권력

스펙터클의 정치적 효과에 균열이 일어나며 신체형은 소멸한다. 이는 권력의 전략과 양태가 변화한 것이라 봐야 한다. 이제 권력은 사형집행의 공개된 장소에서, 보여지지 않는 은밀한 곳으로 침투한다. 그곳은 바로 인간의 머리 속, 즉 정신이었다. 이제 법정에서 신체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정신이 심판 받기에 이른다. 인간의 정신을 어떻게 재판하는가? 그 방법으로 동원되는 것이 지식, 즉 담론이다. 이른바 사회과학이라 불리는 것들, 사회학·심리학·정신의학 등 근대에 발달한 학문체계는 인간의 정신을 판단한다. 그래서 푸코는 지식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고, 권력의 관계망 속에서 발생한다고 했다. 인간의 신체를 둘러싼 권력의 그물에서! 근대 지식담론은 인간을 분류하는데 유용하다. 정상과 비정상으로 포괄되는 그 범주는 광인과 일반인, 이성애와 성도착 등으로 인간을 가른다. 이런 기준으로 사람들은 각기 따로 관리되고 교화된다. 법정에서 행해지는 판결은 이런 지식담론에 상당 부분 의존하게 된 것이다.

 

근대 지식담론은 우리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과 맞닿아있다. 현대인은 지식담론이 그어놓은 인간 분류표에 익숙하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원래 그런 게 아니라, 근대에 접어들어 많은 부분 만들어 진 것이다. 이를 우리는 상식 혹은 통념이라 부른다. 다른 말로 규범이나 규율로도 불리고 그 작용은 죄수에게는 교화, 일반인에게는 사회화라는 말로 명명된다. 그런데 사회 도처에서 행해지는 사회화의 실체는 워낙 광범위하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바라보기 힘들다. 그래서 푸코는 미시적인 부분에 주목해 헤집고 들어갈 을 특정 장소, 감옥에서 찾은 게 아닐까 싶다. 감옥에서 벌어지는 교화는 전체 사회의 축소판이자, 인간 정신에 인위적으로 가해지는 사건을 극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신체에서 정신으로 이동한 권력의 작동은, 규율의 내면화로 요약된다. 교도소에서 교화된 인간은 철저히 규율에 종속된 존재로 거듭난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레드(모건 프리먼) 30여 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한다. 사회로 재진입한 그에게 모든 것은 낯설다. 그는 동네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화장실 가고 싶을 때마다 관리자에게 가서 묻는다. ‘화장실 가도 될까요?’ ‘이봐요, 화장실 가고 싶으면 조용히 갖다오슈. 매번 묻지 말고.’ 교도소에서 익혀야 했던 규율은 그의 살과 뼈에 각인됐다. 인생의 절반을 살아왔던 감옥이라는 공간은 그에게 하나의 세계이자 우주였다. 그곳으로부터 (자의든 타의든) 이탈하자 마주친 곳은 교도소 외부의 공간, 즉 낯설기만 한 사회였다. 이제 어떻게 하나?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사회화라고 한다. 그런데 교화라는 시각에 담긴 함의는 애초부터 인간을 주체적 존재가 아닌, 사회에 위탁된 객체로 보는 시선이 내포되어 있다. 즉 인간은 길들여져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이다.

 

새로운 상상력의 구성

내가 푸코를 읽으며 줄곧 문제 삼은 것은 새로운 상상력의 구성이다. 근대성을 이해함으로써 내 신체와 정신을 이루는 속성을 발견하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는 것. 이것은 반드시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 현재 사는 것이 만족스러우면 그냥 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근대성이 특정시기에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라면, 공부를 하면서 지금과는 전혀 새로운 신체와 정신을 구성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든다. 그것이 어떤 주체이건, 생활방식이건, 정치체제든 간에 말이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영역으로 가보는 데 있어 푸코의 사상이 첫 걸음을 떼줄 수도 있을 터이다. 근대 이전의 문헌, 이를테면 최근에 읽었던 임꺽정 같은 예에서 힌트를 얻을 수도 있다. 임꺽정 칠형제들은 남의 눈치를 별로 안 본다. 한마디로 지들 맘대로 하고 싶은 걸 한다. 그러고도 속 편하다. 나는 어떤가? 누가 뭐라 하지도 않는데 알아서 눈치보고 스스로 긴다’. 이 간극만 해도 무척 넓다.

 

쇼생크 탈출 얘기를 좀더 하면, 영화는 마지막에 흥미로운 두 갈래 선택을 보여준다. 레드 보다 앞서 출소한 노인 브룩스는 ()사회화에 기가 질려 자살한다. 레드 또한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는 친구 앤디(팀 로빈스)의 말을 떠올린다. ‘희망은 좋은 거에요.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그래서? 그는 탈출을 감행(!)한다. 삶을 포기하지도, ()사회화에 순응하지도 않고 친구를 찾아 해변으로 떠나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새로운 주체의 탄생이라고 하면 과할까? 인간의 자유의지와 인간은 누구나 사회화를 필연적으로 겪는 것에 대한 질문. 그 사회화는 무엇이며, 어떻게 우리 신체와 정신을 지배하는가에 대한 물음. 푸코를 통해 던진 문제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_().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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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nowledgetree.tistory.com BlogIcon 지혜의나무 2010.11.16 09: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로운 시각을 주는 좋은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