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여행의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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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볼프강 쉬벨부시 (궁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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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둘러싼 여러 논의는 근대 문명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선로와 열차가 어우러진 기계적 앙상블의 탄생은 가공할 파괴력을 선보였다. 앙상블을 가능하게 한 요소는 규율화이며 개별적 요소의 통합이다. 그것은 다양한 영역으로 확산되어 활용된다. 앙상블은 철도에서 속도의 향상으로, 군대에서 전투력의 강화로, 공장에서 생산능력의 증대로 각각 구현된다. 선로와 열차의 결합은 공간을 대폭 축소했고, 일제사격술은 적군을 효과적으로 섬멸했으며, 분업은 효율화를 달성했다. 모두 개별적 요소를 조직화하고 통합한 결과이다. 그런데 이 앙상블에 균열이 일어난다. 바로 사고(Accident)의 출현이다. 그것도 가공할만한.

 

기계 앙상블로 얻은 효과의 이면에는 궤도 이탈의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열차가 선로 위를 따라 달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로 인식된다. 그만큼 그 상식이 무너지는 순간, 인간은 패닉 상태에 빠진다. 그것은 일종의 공포에서 유발되는데 이는 자연재해에 의한 것과는 성격이 다소 다른 것 같다. 지진, 폭풍, 화산폭발 등도 강력한 공포를 느끼게 하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기분을 느끼게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은 원래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도로 상징되는 문명은 다르다. 기계적 앙상블은 인위적인 조화의 극치이다. 따라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거기서 배반당한 상황이 바로 사고의 순간이며, 그로 인해 인간은 심리적 충격을 받는다.

 

19세기 후반 프로이트에 의해 정신병리학이 등장하고, 신경증이 부각된 것은 우연이 아니리라. 기계적 앙상블이 현실에 구현되고, 동시에 철로 이탈 등 앙상블의 붕괴를 지켜보며 근대인들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열차에 탑승하면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으나, 사고는 돌발적으로 발생하고 이는 통제할 수 없는 속수무책의 상황이다. 이때 인간은 막연한 불안을 느끼게 된다. 열차가 분명 안전하게 철길을 달리고 있으나, 언제 튕겨져 나갈지 모르는 불안함에서 비롯되는 허탈함과 무기력함은 분명 정신병리적 증세이다. 즉 근대에 신경증이 새롭게 발굴된 것은 철도(문명)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다. 과거 신체적 부상만 인정하던 의학계의 입장도, 이 즈음에 이르러 정신병리적 장애도 인정하기 시작한다. 이는 문명에 의한 자극이 인간 본성에 어떤 근본적 영향을 준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정신질환을 야기한 철도의 직접적 병인(病因)으로써의 지위는 이내 상실된다. 철도사고 같은 대형참사를 겪은 이들의 정신병리적 증세는 환자 개인의 성향으로 그 원인이 돌려진다. 프로이트마저..! 나중에야 (1차 세계대전을 겪고) 비로소 그는 자신의 쇼크에 관한 소박한 교훈을 재검토하게 된다.

 

막연한 불안이 신경증의 주요 요인이라면, 문명은 끊임없이 그에 대고 괜찮아, 다 괜찮아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열차의 흔들림은 쿠션의 안락함으로 가려지고, 기계 앙상블의 균열은 은폐된다. 문제는 이런 앙상블을 유지하기 위해 드는 노력이 과중하다는 것이다. 철도의 예를 보아도, 자연과 재료·인간의 착취를 담보로 한다. 더구나 기계 앙상블이 견고해지고 촘촘해질수록, 그에 비례한 사고의 충격파는 커진다.

 

원래의 불안이 새로운 기술에 직면하면서 기술에 익숙해져서는, 무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잊혀지고 억제되고 안전함이라는 느낌으로 물화된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불안은 새로운 형태로, 그것에 부딪힌 사람의 등 뒤에서 경악으로 나타난다. (p.207)

 

문명은 자극 강도를 지속적으로 증대한다. 실험실 전기충격처럼, 전기충격의 출력을 점점 높이는 것과 유사하다. 아마 인류 역사상 철도가 지닌 의미는 이 출력의 강도를 단번에 급격히 올렸다는데 있지 않을까. 철도 이전에 인류에게 가해진 자극 강도가 비교적 완만했다면, 철도 이후 그 수준이 워낙 갑자기 상승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신경증이 생기는 것도 이해가 간다. 갑자기 멀리 떨어져 있던 공간이 눈앞에 펼쳐지고, 이전에 경험할 수 없던 대참사가 발생하니 사람들 정신이 황폐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현대인은 철도를 19세기의 사람들과 다르게 인식한다. 이제 철도는 느린 여행의 표상이다. 그만큼 자극의 수준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 현저히 높아지고 있다. 이는 그만큼 문명이 발달한 동시에,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자연과 재료·인간의 착취가 심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근대의 지점을 탐사하다 보면, 도대체 지금 우리는 갈 데까지 간 거아닌가 하는 의문이 간혹 들기도 한다.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자극의 수준은 아주 높은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몹시 두려운 일이다. 이걸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욱 정교해지고 세련된 현대 문명임은 분명하다. 흔히 도시 문명은 정글 오지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그럴까? ‘안전사회를 표방하나 그 이면은 위험사회인 도시 한 복판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자극의 강도는 계속 올라가나, 그에 대처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은 점점 약해지는 이 역설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

 

    과정 중시와 성찰하는 태도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열차로 인해 여행의 과정이 생략되었듯이, 그 여행에서 얻는 수행(!)의 의미도 함께 소멸되었다. 따라서 결과 보다 과정을 어떻게 되살리고, 눈에 보이는 것만 우대하던 습관을 버리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여행의 목적지가 여행의 목적이 아니었듯이 말이다. 현대 도시인이 숨가쁘게 살아가지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은 성찰할 수 없는 삶의 구조에서 기인한다. 내 경우를 예로 들면, 공부를 한다고 했을 때 걸리는 지점이 자꾸만 특정 목적을 설정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든 뭐가 되는 간에, 이 욕망이 공부에 빠져들지 못하게 한다. 이것 또한 결과중심적이고 가시적인 근대성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닐까? 결국 공부도 어떤 목적지가 공부의 목적이 아니지 않은가. ‘과정에서 여행의 참 맛을 느끼듯이, 공부도 그 과정 속에서 즐기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기계적 앙상블을 넘어선 새로운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_()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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