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신이 죽기 직전 탈고한 고사신편 9편. 실은 10편이었다. 누락된 1편은 광인일기를 비롯해 그의 대표작에 대한 회고 형식의 글이다. 여기저기 손을 타며 여러 사람에 의해 주석이 달리고 수정된 흔적이 있다. 이제 세상에 내놓고 고사신편 외전이라 이름 붙인다.

 

내가 고향을 떠나온 지도 여러 해가 지났다. 돌아보면 간단치 않은 삶! 사람들은 내가 10년 동안 비석을 베낀 시절을 의뭉스레 여기곤 한다. 시간을 낭비한 것은 아니냐고 질책한다. 하지만 모르는 소리, 말하자면 나는 그 기간 동안 은밀히 강호를 주유하며 기인달사(奇人達士)와 접촉했다. 내 작품의 근간은 이때 수집하고 체험한 일들이 전부이다.

광인(狂人)의 모델은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나는 그를 섬서성(陝西省)에서 만났다. 어렸을 때부터 육로로 저 아라사, 구라파를 떠돌아다니며 서구 교육을 받았다는 그는 한 마을에서 소동을 일으켰다. 그 동네의 수호신을 모시는 사당에 켜 놓은 장명등(長明燈)을 끄겠다고 난리를 피워 주민들에 의해 무쇠 방에 감금되고 만다. 창문도 없고 공기도 통하지 않아 서서히 질식해 죽어가는 그 곳에는 이미 다른 이들이 혼수상태에 빠져 잠들어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큰일나겠다 싶어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지. 여보시오! 좀 일어나 보시오! 하하, 신참이 들어왔구먼. 쇳소리에 놀란 그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돌리니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백발과 홍안의 노인이 미소를 띄우며 앉아 있었다. 그 노인은 자칭 수백 살을 먹었다고 하는데, 세상사에 달통한 신선 같은 인물이었다. 그런 노인이 하는 말이 너는 싹수가 있어 보이니 여기서 죽기엔 아깝지. 자, 여기 파란 약과 빨간 약이 있다. 파란 약을 먹으면 그냥 혼수상태에 빠져 편안히 죽음을 맞지, 그러나 빨간 약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지만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다. 선택은 너의 몫이다. 그는 주저 않고 빨간 약을 먹었다. 세상이 노래지고 숨이 턱턱 막히고 온 몸이 뒤틀리며 정신이 혼미해져 아 이대로 죽는구나했더니 어느 순간 눈앞이 환해져 주위를 둘러보니 무쇠 방은 사라지고 어느 들판 한가운데에 놓여져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신기하게 사람의 뱃속까지 들여다보이고, 담 너머에 있는 사람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오랜만에 타지에서 귀향한 동생을 반갑게 맞이해주는 형님 내외와 이웃사람들도 얼굴은 웃고 있지만 요상하게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왠지 얼굴가죽을 잡아 북 뜯으면 그 뒤에 괴물이 추악한 이빨을 드러내고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기분 탓으로 여겼으나 그렇지 않았다. 형님이 요즘 점점 혈색이 좋아지고 얼굴에 기름기가 끼는 것 같아 슬쩍 뱃속을 훔쳐보니 아이의 팔다리 비슷한 형상이 있었다. 아! 그랬구나. 이놈들은 본래 괴물로 우리 마을에 침입해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먹고, 지나가는 과객을 유인해 먹잇감으로 삼은 게 틀림없어. 얼마 전 동네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의심스러웠다. 내가 물었지.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옳은 거요? 그는 일순간 당황했지. 그런 것은 왜 물으십니까. 댁은 참.. 농담 잘하시네요.. 나는 집요하게 따졌지. 옳지 않지요? 그런데 그들은 왜 먹는 거요?! 있을 수는 있겠으나 그건 옛날부터 그래 왔으니까.. 옛날부터 그래 왔다고 해서 옳은 거요? 그는 당황하며 자리를 떴다. 나는 상황을 파악했다. 옳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으니 인성(人性)을 잃고 괴물이 되어가는구나! 이렇게 어린 녀석도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나이 많은 자들은 오죽할까. 아, 사람 고기 맛에 물들지 않은 사람은 없을까? 그렇지, 아이들을 구하자..

광인이 끄려고 했던 장명등은 수백 년 동안 꺼지지 않았다는 그 마을의 보배다. 등불이 꺼지면 재앙이 닥친다고 해서 주민들은 사당에 고이 모셔놓고 애지중지한다. 등불을 꺼도 끄지 않아도 변하는 건 없다. 여전히 한국 사회에 짙게 드리워져 있는 국가보안법 같은 것이 새로운 장명등 아닐까? 시대착오적인 망령을 받들어 모시는 사회, 아, 광인은 어디 있는가? 옥중에서 노신의 이 저작을 만난 것이 감사하다. 그렇지, 아이들을 구하자.. (주석)

나는 광인을 만나고 한참 후에 그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과거에 급제한 후 지금은 어느 현(縣)의 관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지금 먹는 이 고기가 사람 고기라는 걸 알고 있어. 그러나 맛이 좋은 걸 어떡해? 나는 무쇠 방에서 만난 그 노인을 저주해. 나에게 빌어먹을 빨간 약만 먹이지 않았다면 이 생고생도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보라고! 나는 사람의 흉측한 뱃속 따위는 들여다보고 싶지도 않아. 그냥 이렇게 편안히 부드러운 고기를 먹으며 인생을 즐기고 싶을 뿐이라고. 그는 그 일대에서 다른 의미의 광인으로 통한다고 한다. 백성을 잡아먹는 도살자라고. 청년이 청년을 잡아먹는 행태가 대체로 이렇다, 대체로!

청년을 잡아먹는 광인의 최후는 실로 비참했다. 그에게 복수의 정념을 품은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한번은 그곳 근처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사람들의 기세가 흉흉하게 그지 없었다. 아 이거 큰일 났구나. 그래도 옛 정을 생각해 광인을 방문해 충고를 해주려 마음먹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얼굴에 기름기가 끼어 있었다. 모르긴 해도 사람고기를 많이 먹나 보다. 나를 만난 그는 대뜸 말했다. 당신이 나를 어떤 인간으로 생각하든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나는 전혀 상관 없소. 잠시 뜸을 들이며 그는 이내 확신에 찬 눈빛으로 열변을 토했다. 당신은 내가 정신에 이상이라도 생겼다고 여기겠지요? 당신은 내가 영웅이나 위인이라도 된 것으로 여기시오? 아니요, 그렇지 않소. 이 일은 매우 간단하오. 요즘 나는 현령으로 취임해 매달 월급을 은화 80원이나 받고 있소. 사람이 변하는 것은 한 순간이라고 했던가? 나는 문득 적막함을 느꼈다. 만남은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났다. 그 후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는 어떤 미소년의 칼에 참살 당했다고 한다. 그의 육신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으리라. 나는 이 시절을 회상하며 옛 이야기를 다시 써볼까 마음을 먹었다. 그것이 소설집 고사신편이다._(끝)

 

나는 이 글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내가 구상 중인 영화의 시나리오로 적극 추진해보려고 한다. 노신 선생은 정말 위대한 분이다. 그를 만난 것은 내 일생의 행운이다. 광인의 빨간 약 이야기는 참으로 판타스틱하면서 엑셀런트하다. (주석)

2010/07/08 - [연구공간 수유+너머] - [대중지성] 나는 기록한다 고로 존재한다
2010/04/17 - [연구공간 수유+너머] - [대중지성] 구(究)를 구(九)해서 구(求)하라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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