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후(세계문학전집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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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나쓰메 소세키 (민음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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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태로움은 다이스케의 일상에 깊숙이 침투해있다. 그도 사춘기 때는 아버지에게 반항을 하는 등, 내면의 감정을 분출하기도 했으나 이제는 쓸데없는 마찰을 피하기 위해 건성으로 복종하는 체 한다. 먹고 사는 일의 속물적 속성을 비판하나 상황이 나아질 가능성 또한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없을 거라 믿고 별다른 행동도 하지 않는다. 고상한 풍모는 있으나 내면에는 아버지의 재정적 지원이 두절될까 알게 모르게 불안해한다. 특별히 하고 싶은 일도, 그렇다고 하기 싫은 일도 없는 그의 특징은
! 그게 또 그런가요?라는 식으로 대답하는 서생 가도노와 닮았다

 
가도노는 일종의 다이스케의 분신이기도 한데, 가도노와 마주할 때의 다이스케는 그의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한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하듯이 가도노에게 돈벌이를 해야 하지 않겠냐고 훈계한다. 먹고 사는 일을 속물적인 행위로 간주하기 때문에 다이스케는 일을 할 필요성을 찾지 못한다. 이런 그를 히라오카나 데라오 같은 친구들은 부잣집 도련님이기에 그런 게라고 놀리면서도 부러워한다.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다이스케가 스스로 권태를 느끼는 이유는 주변의 그 누구에게도 의미 있는 인간으로서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이스케가 미치요를 위해 돈을 빌리려고 할 때 느낀 자괴감에서 드러난다. 누군가를 돕고 싶지만 자신은 그럴 능력이 없음을 깨달을 때 이는 존재 가치에 대한 심각한 인식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권태는 불안함을 수반한다. 권태는 그저 심심한 상태라기 보다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신을 자각하며 곧 다가올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공포에 보다 가깝다. 이를테면 폭풍 전야의 고요함과 닮았다고 할까. 막상 폭풍이 다가오면 속수무책으로 휘말려 들어갈 수 밖에 없는 무력한 육체. 따라서 권태는 죽음을 앞둔 사형수의 적막함과 비슷하다. 사형수가 뭘 할 수 있겠는가? 그저 형 집행만 기다리며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을 두근두근 불안해할 뿐 그 순간까지의 가혹한 지루함을 견딜 뿐이다. 다이스케의 권태는 바로 불안이며, 그의 고상한 논리는 불안을 떨쳐버리려는 수사에 가깝다.

 다이스케가 가도노에게 훈계를 하는 것은 재미있는 장면이다. 그가 결혼에 흥미 없음은 여러 이유가 있다. 미치요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실제로 그 즈음 결혼에 별로 관심이 없을 수도 있고, 아니면 결혼에 따른 세상의 속물적인 것을 혐오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그 중심에는 어떤 것이든 책임지고 싶어하지 않는 다이스케의 속성이 담겨져 있다고 본다. 아니 책임지기 싫어한다기 보다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다이스케가 가도노를 훈계하는 것은 어찌 되었든 가도노가 다이스케가 책임져야 할 식객(食客)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또한 아버지에게서 받은 돈으로 먹여 살리는 게지만, 평소 돈벌이의 속물성을 비판하는 다이스케를 봤을 때 매우 이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무언가에 대한 책임감이 사람을 권태, 더 깊숙이 말하면 불안에서 빠져 나오게 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다이스케가 미치요에게 사랑을 고백한 것은 미치요라는 한 인간을 책임지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한다. 그 순간 마지막 장면에서 다이스케가 경험하듯 세상은 타들어가고, 빙빙 돌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고상한 낙원에서 혹독한 현실로 진입하는 징후로만 볼 것인가? 물론 그렇기도 하다. 한번도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한 적 없는 자에게는 머리가 빙빙 돌고 가슴이 타들어 갈 정도로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누군가를 책임지고 싶었고, 마침내 책임지게 되었을 때의 환희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다이스케에게는 그 순간이 조금 늦게 찾아왔고, 그로 인해 가족과 친구를 모두 잃고, 사회의 지탄까지 받게 될지도 모르지만 원래 깨달음은 항상 늦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불안과 맞바꾼 누군가를 책임지고 싶은 마음은 그 불안을 상쇄시킬 만큼 파워가 있다. 다이스케의 막판 배짱 있는 행위가 그 증거이다. 그도 이제 데라오처럼 살아가겠지. 벌떡 일어나 직업을 알아보러 가는 그의 뒷모습이 믿음직스럽다. 책임지고 싶은 마음은 삶을 이어하게 한다. 배운 놈이니 뭐든 하겠지._(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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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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