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이다. 이 격언은 노력과 끈기를 강조한다. 정확히는 두뇌 용량 못지않게,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음이 중요하다는 말일 게다. 덕분에 어떤 사람들은 이 말에 호응해 무작정 자신의 엉덩이를 의자 등받이로 깊숙이 밀어붙인다. 그런데 공부를 오직 머리와 엉덩이로만 한다면 문제가 생긴다. 공부는 온 몸으로 하는 건데, 소외된 다른 신체부위들이 역습을 가한다. 이들은 몸의 주인에게 싸움을 걸어온다. 서로 나 좀 봐달라고 호소하니 국지적으로 전투가 벌어진다. 눈꺼풀은 무겁고 좀은 쑤시며 허리는 찌뿌드드하다. 필사적으로 버티나 이미 머리는 몽롱해지고 하품이 비실비실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이쯤 되면 전황이 기울었음을 깨닫고 몸이 말하는 바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그 놈의 엉덩이論이 뭔지 도통 움직일 생각을 못한다. 졸리건 말건 몸이 아우성을 치건 말건 고집스레 책상머리를 사수한다. 그러고 잠시 후 머리를 처박고 장렬히 꿈속으로 산화한다. 몸이 걸어오는 싸움은 괜한 시비다툼이 아니라, 몸이 나아갈 방향을 일러주는 나침반과 같다. 인체의 통증이나 불편함은 교통신호등처럼 깜박이며 몸 상태를 수시로 진단한다. 그러나 이런 기능은 참는 것이 미덕이라는 고유의 미풍양속 때문에 질병 앞에 무력하다. 국제정신의학계가 가장 한국적인 정신신경 장애증상으로 공인한 화병(火病)이 그 대표적인 예다. 화병은 울화병이라고도 하는데, 한마디로 꾹 참아서 생긴다. 아침 드라마 보면 자주 나오는 뒷목잡고 쓰러지는 장면의 대부분이 화병의 증상이라 할 수 있다. 참다 참다 제 성질 못 이기고 밥솥 터지듯이 몸에 열불이 나 못견디는 것이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몸 상태가 영 아닌데, 무작정 참고 앉아있는다 해서 공부가 되는 건 아니다. 무작정 버틸 경우 보통 졸거나 공부는 역시 지루하다고 여길 뿐이다. 두 경우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무엇보다 공부는 신체 사지말단을 골고루 쓰는 것임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졸리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산책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몸+드라망 세미나에서는 몸을 마구 굴릴 거라고 한다. 그 첫 번째 방법이 소리 내어 읽기다.

 

공자왈 맹자왈 서당도 아니고 웬 낭독? 의아할지 모르겠다. 낱말과 문장은 눈이 아닌 입으로 씹어 뱉어야 제 맛이다. 너를 사랑해’라는 말은 눈으로 읽는 것보다 입술의 웅얼거림으로 내질러야 더욱 짜릿하다. 어디 사랑한다는 말뿐이랴? 욕도 그렇다. 시원하게 드러내놓고 뿜어내야 욕도 제 몫을 하는 것이다. 키보드 전사가 되어 댓글로 저주를 퍼붓는 일은 혹여 낭독의 부재가 낳은 현상이 아닐는지. 앞에서는 감히 못할 발언을 키보드를 두들겨 서슴없이 한다. 화병처럼 속에 꾹 눌러둔 것이 인터넷 댓글 시스템을 만나 기형적으로 표출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꽁꽁 담아놓은 것은 풀어줘야 한다. 혈관도 뚫려야 산다. 막히면 동맥경화로 죽듯이, 마음 속 스트레스도 발산해야 한다. 그 방법이 바로 신체 사지말단과 오감을 총동원해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데 있으며, 그 중 한 가지가 바로 낭독인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책을 읽을 때 주로 시각만 사용했다. 눈으로 보는 것의 가장 큰 단점은 쏟아지는 졸음이다. 그러나 책은 눈으로 보는 것뿐 아니라, 입으로 말할 수 있는 매체다. 한 걸음 더 나가면 몸으로 연기도 할 수 있다. 자신이 다큐멘터리 성우가 된 것처럼 목소리를 깔고 내레이션을 하거나, 영화배우처럼 상황을 설정해 표현할 수 있다. 장동건이 BBC 다큐 지구의 한국어 더빙을 한 것처럼 말이다. 이러는 와중에 텍스트는 죽은 단어의 묘지에서, 오감이 번뜩이는 장으로 거듭난다. 글줄을 소리 내어 읽으며 텍스트 내용을 이미지로 상상한다. 그러면서 독서활동은 시신경만 사용하던 1차원 수준에서, 입술과 혀, 성대, 청각, 공감각적 심상마저 동원하는 다차원으로 확장된다. 살짝 거창하게 말했지만, 한마디로 낭독을 하면 덜 졸린다는 얘기다. 앞서 언급했듯이 졸음은 몸이 지쳤다는 신호다. 즉 특정 부위로 자극이 집중되어 과부하가 걸렸다는 뜻이다. 따라서 낭독으로 눈에 걸린 피로를 다른 신체부위가 분담하니, 몸이 원기를 잃지 않고 작업 (독서)을 계속할 수 있는 이치인 게다.

 

+드라망 세미나는 아보 도오루氏가 쓴 면역혁명이라는 책을 함께 읽는 것으로 출발한다. 물론 소리 내어 읽는다. 책 내용은 누구나 자가치유력을 기를 수 있으며,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도 질병에 맞설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만 아파도 약을 찾는 습관부터 버리라고 말한다. 21세기에 비약적으로 발전할 산업에 손꼽히는 것이 바로 생명공학 바이오 신약사업이다. 거대 제약회사의 추악함을 파헤친 소니아 샤는 저서 몸 사냥꾼에서 제약회사들이 고객으로 하여금 비교적 양호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약을 달고 살도록 조장한다고 비판한다. 제약 업계에서 통용되는 병을 치료하는 것은 좋지만, 매일 복용해야 하는 약은 더 좋다.는 오래된 격언이 충실히 이행되고 있는 셈이다. 인체의 면역 시스템은 질병 덩어리를 죽이는 파수꾼이다. 습관적으로 약을 복용할수록 이 파수꾼은 맥을 못 추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출동하려고 준비하면, 외부에서 투여된 약물이 알아서 바이러스를 진압해주니 할 일이 없는 게다. 이것이 반복되면 면역 파수꾼은 그 기능이 퇴화되어 능력을 상실한다. 샤는 라이프스타일 의약품이 이런 경향을 더욱 심화한다고 말한다. 항우울제 프로작 같은 약들은 일시적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건강하지 못한 생활습관을 고치게 하기보다, 약에 의존해 그런 생활습관에 적응하도록 만드는 것임을 지적한다. 현대 의료가 발달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암 정복은 요원하며, 난치병 또한 허다하다. 그럼에도 신약 개발이다 뭐다 해서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이 눈 앞에 온 듯하다. 과연 그런가?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허황된 말에 자신의 몸을 실험대상으로 내놓을 것이며, 눈먼 돈을 뿌릴 것인가.

 

그렇다고 오늘 당장 다니던 병원을 끊고, 먹던 약과 붙이던 파스를 쓰레기통에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 같아도 지금 소화가 안되면 까스**를 마시거나, 입안이 헐으면 오라**를 열심히 바를 것이다. 신비의 영약은 효과가 어느 정도 보장된다. 마시거나 바르는 즉시 마술처럼 낫는 답답한 복부팽만감과 따끔한 혓바늘. 고통에서 구원해준다는 약물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몸+드라망 세미나에 참여한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이들이 어지간히 건강한 사람 아니면 지병(?) 한 두 가지씩은 보유하고 있으리라. 질병은 훈장이 아니다. 동정 받을 것이 아님은 물론이고 자랑거리도 못 된다. 하지만 부끄럽게 여길 필요도 없다. 참고 숨길 때 병은 쑥쑥 자라난다. 질병은 자신이 살아오며 어떻게 몸을 굴렸는지에 대한 역사이며 증언이다. 심신일원론 같은 문자 쓰지 않아도, 몸과 마음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음은 상식이다. 즉 우리의 몸 상태는 어떻게 맘 씀씀이를 썼느냐 하는 신랄한 고백이기도 하다. 화병 기억하는가?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참고만 살아온 사람은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밀어올라 있을 터이고, 걱정이 많아 매사에 전전긍긍하는 사람은 신경이 곤두서있고 불면증을 호소할지 모른다. 마음과 몸은 상호작용하니 어떻게 심보를 먹고, 몸뚱이를 굴려야 하는지 깨달아야 비로소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한달음에 해결하려 하지 말고 (급한 것이 병이다!) 차근히 배워 가보자. 낭독부터 우렁차게 말이다.

2009/10/25 - [연구공간 수유+너머] - 몸드라망 세미나 출발 ^^
2009/10/26 - [연구공간 수유+너머] - 몸드라망 '프롤로그'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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