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서 남산

절기 서당 2012.07.22 10:30

소서 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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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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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kdzdsyygijfs/220730461518?107733 BlogIcon 1466129452 2016.06.17 11: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소식 잘 읽었습니다.~^^


도련님

저자
나쓰메 소세키 지음
출판사
문예출판사 | 2001-12-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스스로를 막무가내라고 부르는 도련님은 거기서는 못 뛰어내릴걸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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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도련님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도련님>은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도련님인 ‘나’는 물리전문학교를 갓 졸업한 신참 수학교사이다. 그는 스스로의 성격을 막무가내라고 이른다. 남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 그가 접하는 사회는 이상하다. 예를 들면 학교에 부임한 첫 날 교장 선생과 수인사를 할 때, 교장은 한바탕 선생이 가져야 할 사명에 대해 연설한다. ‘학생들에게 항상 모범을 보여야 한다’ ‘덕을 쌓아야만 참다운 교육자가 될 수 있다’는 둥의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모두 좋고 옳은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것은 무리한 주문이었다. '그렇게 잘난 사람이 월급 40엔 받고 이런 촌구석까지 왜 오겠냐?' 그는 도저히 그러한 주문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할 수 없다. ‘속아서 여기까지 왔으니 포기하고 돌아가자고 생각’하고 대답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교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는 못하겠습니다. 이 임명장 도로 받으시지요.”


  사회생활을 조금 해본 사람이면 도련님의 이런 행동을 융통성 없는 혹은 고지식한 것이라 타박할지 모른다. 교장 역시 그러한 반응을 예상하지 못해 잠시 멍하게 그를 바라본다. “아, 지금 내가 한 얘기는 희망 사항이지. 선생이 내 희망 그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네. 너무 걱정하지 말게”라고 말하며 웃는다. 교장이 건넨 말은 진짜 그렇게 되라는 말이기보다, 교장으로써 응당 해야 할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요컨대 인사치레인 셈이다. 그 자신도 이를 잘 알기에 별 생각 없이 이야기했으리라. 그런데 도련님이 갑자기 임명장을 반납한다고 하니 상황은 묘해진다. 교장은 별 수 없이 자신의 말을 대충 수습한다. 인사치레로 하는 말은 왜 필요한가? 왜 사람들은 겉과 속이 저리도 다른가? 도련님의 의문은 여기서부터 시작되고, 그것은 소세키의 문제의식이기도 했다.


  교사 생활을 시작하며 도련님은 중요한 진실을 듣는다. 교감인 빨간 셔츠는 “이 학교 생활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아서 선생이 학교에서 배운 것대로 돌아가지는 않거든요” 한다. 그렇다. 학교에서 배운 것이 현실에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빨간 셔츠는 문학사 출신으로 대학을 나와 고상한 교육자의 품격을 지니고 있다. 쓰는 말과 행동이 격식에 맞고 예의 바르다. 겉으로는 교사란 무릇 정신적 즐거움을 추구해야 한다고 하나, 뒤로는 기생과 어울리고 남의 약혼자를 꼬드겨 빼앗으려는 인물이다. 또한 패거리를 만들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선생을 내쫓으려고 음모를 꾸민다. 그는 도련님을 구슬리기 위해 나름 이 곳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일러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도련님은 거기에 대놓고 묻는다. “배운 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어떻게 돌아간다는 겁니까?” “저런 저런, 그렇게 내놓고 물어보니까 경험이 없다고 하는 거예요.” “경험이야 부족하겠지요. 이력서에도 썼지만 스물 세 해하고도 넉 달밖에 안 살았으니까요.” “저기, 그래서 생각지 못한 곳에서 이용당할지도 모른다고 얘기했잖아요.” 빨간 셔츠가 보기에 도련님은 풋내기다. 이용하기 딱 좋은 순진한 도련님이다. 빨간 셔츠의 이야기는 사회에 적응하려면 적당히 자신을 숨기고, 눈치를 봐서 처신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그러지 않으면 이용당할지 모른다고 경고한다. 솔직하면 나만 손해라는 인식은 여기서 비롯한다. 그렇다면 솔직한 것은 미덕이기 보다 악덕이다. 학교에서 ‘솔직해야 된다’라고 가르치는 것은 역시 ‘그냥 하는 소리’란 말인가? 학교에서 배운 것이 사회에서 통용되지 않으면, 왜 그렇게 가르치는가? 도련님은 이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은 나쁜 길로 들어서는 걸 당연하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나쁜 것에 물들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없다고 믿는 것 같다. 가끔 솔직하고 순수한 사람을 보면 ‘도련님, 부잣집 도련님’ 하면서 비꼬곤 한다. 그렇다면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거짓말하면 안 된다, 솔직해야 된다’라고 가르치지 말고 차라리 ‘거짓말하는 법’이라든가 ‘사람을 의심하는 기술’ ‘사람 등치는 술책’을 가르치는 편이 이 세상을 위해서도 그 사람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이다. <도련님, 문예출판사, p77>


소세키의 질문, 주체의 문제

  도련님을 소세키 자신으로 본다면, 당시의 역사적 맥락에서 그는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소세키는 1906년에 <도련님>을 발표한다. 이 해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이다. <도련님>의 에피소드 중 학생들끼리 패싸움의 배경인 전승기념일은, 일본이 군사적으로 급격히 팽창하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소세키 본인은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국비유학생 1호로 런던에서 영문학을 배우고 돌아와 메이지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시절이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 제국 일본에 봉사할 역군으로 키워진 것이다. 그렇게 엘리트 코스를 밟던 소세키는 1907년, 메이지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아사히신문으로 옮겨 전업 작가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는 가보지 않은 다른 길을 선택했던 것일까? <도련님>을 발표하고 1년 남짓의 사이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미루어, <도련님>이라는 작품에 그의 고민하던 바가 담겨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초년병 교사 도련님은 학생들과 신경전을 벌인다. 학생들은 신참 교사를 골려 주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한다. 예를 들면 도련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하며 살살 시비를 거는 모양새다. 튀김국수와 당고(구워서 팔이나 꿀 등을 발라 먹는 떡)를 좋아하는 도련님의 모습을 보고 칠판에 그것을 비꼬는 말을 써놓는다거나, 숙직 서는 도련님 이불에 몰래 메뚜기를 집어 넣는 식이다. 이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다. 도련님이 화를 내는 지점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아닌 척 둘러대며 실실 쪼개는 행태다. 앞에서는 공손한 척 대하나 뒤로는 뒤통수를 치는 비열한 근성을 도련님은 참지 못한다. 그는 ‘세상의 일은 모두 이런 학생 놈들 짓거리에서 자라난 것이 아닌가’ 여긴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을 가르치는 학교와 그것을 그대로 배우는 학생들, 세상의 문제는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란 말이다. 어쩌면 학교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던 소세키는 자신이 하는 일이, 비열한 근성을 지닌 인간을 키우는데 쓰이는 사실에 문제의식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인간에 대해 도련님은 일관되게 질타한다.


나란 놈은 장난을 쳤어도 거리낄 게 없다. 거짓말을 해서 벌을 피할 생각이라면 처음부터 장난을 하지 말 일이다. 장난과 벌은 붙어 다니는 것이다. 벌이 있으니까 장난 칠 마음도 생기는 거지. 장난은 실컷 쳐놓고 벌은 안 받으려고 피하다니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인가. 돈은 빌리면서 갚아야 될 땐 오리발 내미는 비열한 놈들은 모두 이런 녀석들이 어릴 적 버릇 못 버리고 자라서 하는 짓거리다. 도대체 학교에 와서 뭘 배우는 거야, 저런 저녁들은! <도련님, 문예출판사, p56>


  그가 비판하는 비열한 근성이란 타자를 수단화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학생들이 도련님을 골탕먹이는 일은 상대와 소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미를 충족하는 것이 목적이다. 여기서 학생들은 도련님을 수단화한다. 그런데 타자를 수단으로 삼으면 이는 결국 자신을 소외시키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런 상황에선 언제든 자신 또한 수단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곳에선 상대의 수단의 제물이 되지 않기 위해 음모와 획책이 난무할 것이다. 되도록이면 자신의 의중을 내비치지 않고, 상대의 약점을 잡는데 몰두하리라. 이 상황은 너무나 피곤하다. 눈치 싸움은 극심해지고, 의심하는 것이 일상이 된다. 모두가 자유롭지 않은 상태이다. 사람들은 주변 동료를 믿지 못하고, 항상 말 못할 고민을 내면에 품고 다닌다. 이는 정신질환과 우울증을 야기한다.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외로워하고, 돈을 주고 낯 모르는 이를 찾아가 정신상담을 의뢰한다.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이렇게 된 연유는 결국 정치/경제적 이득을 얻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한다. 얼핏 보기에 지극히 상식적으로 느껴지는 욕망이다. 그런데 이런 사회통념에 대해 도련님은 의문을 제기한다.


  도련님이 교장과 교감 등을 당황하게 만드는 까닭은, 통념에 대한 의문제기 자체가 통념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도련님이 월급을 올려 받는 것이 싫다거나, 죽어도 사표를 내고 싶다는 행동을 그들은 이해할 수 없다. 즉 여기선 ‘월급을 올려 받는 것은 누구나 선호한다’라는 게 통념의 한 가지 예이다. 통념이나 사회적 상식 등은 고정된 표상이다. 다른 표상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무척 적다. 만약 다르게 받아들이는 자들이 많아지면 그것은 더 이상 통념이 되지 못한다. 고정된 표상으로서의 힘을 상실하고, ‘유동적’인 표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용어를 정리하면 표상이 고정되어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을 때, 상식과 통념 혹은 고정관념이라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정리했다. 상식과 통념 같은 고정된 표상들은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동일한 기제로 작동하며, 개개인의 일상을 포괄적으로 지배한다. 


  그때 주체Subject가 나타난다. ‘나는 ~이다’ 라는 의식은 독립적인 개개인을 나타내는 뉘앙스를 풍기며, 주체적이라는 말은 바람직한 삶의 태도로 인식된다. 그런데 ‘나는 ~이다’라는 주체의식은 필연적으로 고정된 표상에 종속된 존재임을 의미한다. ‘나는 ~이다’ 혹은 ‘나는 ~한 사람이야’라는 존재의 개념정의 자체가 특정 표상에서 비롯된 의미의 고착화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주체를 표현할수록 더욱 고정된 표상에 사로잡히는 셈이다. 그래서 주체는 Subject, 표상이 작동하는 대상(물)이 된다. 이런 측면에서 교장과 교감을 위시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극히 주체적 존재이다. 그들은 교육자로써의 의식이 투철하고 (그것이 어떤 식의 투철함인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한편으로 정치/경제적 이득을 위해 살아가는 것에 익숙하다. 그것은 각각의 표상을 자기 내면화하는 인식에서 비롯한다. 


反주체 혹은 유동적 존재

  도련님은 그런 면에서 反주체적인 캐릭터다. 그는 이름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불려지지 않는다. 그는 <도련님>에서 하녀인 기요 할머니에 의해 ‘도련님’으로 불려질 뿐이다. 사회적 호칭은 어떤가? 도련님의 직업은 수학 교사이지만, 그는 학교 내에서의 선생들과 동일한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빨간 셔츠가 말한 것처럼 선생들은 모두 적당히 겉과 속이 다르나 도련님은 그렇지 않다. 이처럼 도련님은 고정된 표상에 따른 이름이 없다. ‘이름없음’의 설정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유사하다. 고양이는 말한다. ‘아직 이름은 없다’. 그리고 끝까지 지어지지 않는다. 명명되지 않을 때, 어떤 이는 그것을 불안해하며 어떻게든 명명되기를 원한다. 또 어떤 이는 명명하는 것을 희화화하는 방식으로 비틀어버린다.


  여기서 소세키식 유머가 튀어나온다. 시골중학교 학생들은 도련님을 부를 때 ‘선생님’으로 부르지 않고, 튀는 목소리로 ‘새임~’이라고 한다. 도련님 또한 처음 학교에 부임해서 동료 교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들에게 별명을 지어준다. 교장은 너구리, 교감은 빨간 셔츠, 수학은 거센 바람, 영어는 끝물 호박, 미술은 떠버리 등등. 별명은 대개 명명 받는 대상을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우스워진다는 것은 그 대상이 지닌 고정된 표상체계가 흔들린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면 교장은 스스로 교육의 화신인 듯 행동하나, 너구리라는 명명으로 인해 그저 거드름 피우는 ‘너구리’가 된다. 즉 너구리 명명 이전에 교장이라고 하면 ‘교육자’ 혹은 ‘권위’와 같은 표상이 자동적으로 생성되었으나, 너구리로 이름 붙인 이후에 그는 더 이상 권위를 지닐 수 없게 된다. 요컨대 고정된 표상체계에 균열이 생긴다. 우리가 개그 프로그램에서 웃음이 터지는 순간은 기존에 인식하고 있던 표상체계가 무너질 때이다. 그래서 유머는 근본적으로 反상식, 反통념의 언어다. 상식적인 유머란 있을 수 없다. 유머는 단순히 즐겁기 위한 우스개가 아니라, 통념을 뒤집고 기존의 가치체계를 전복한다는 면에서 혁명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소세키는 이런 수단을 동원해 통념과 사회적 상식이라는 표상에 도전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다시 소세키의 시대로 돌아와 살펴보자. 그가 도전하고자 했던 고정된 표상은 무엇이었는가? 그의 시선은 ‘나쁜 것에 물들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없다고 믿는’ 이들을 향하고 있다. 작품에서는 빨간 셔츠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동시에 제국의 시대를 살아가며, 제국의 엘리트로 양성된 자신을 겨누고 있다. 도련님과 빨간 셔츠 두 사람은 소세키의 서로 다른 모습을 상징한다. 그는 당시 딜레마에 빠져 있지 않았나 싶다. 제국이라는 고정된 표상을 향해 치닫는 사회 분위기에 그는 문제의식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제국이 길러낸 적자嫡子였다. 그가 할 수 있었던 선택은 빨간 셔츠처럼 적당히 겉과 속이 다른 태도를 유지하며 영합하거나, 도련님처럼 튕겨져 나오는 일이었다. 그 선택의 고민 끝에 도출된 사유의 집적물이 바로 <도련님>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도련님>을 일종의 선언문이라고 일컫고 싶다. 도련님은 스스로를 ‘막무가내’라고 했다. 아마 소세키는 도련님과 같은 ‘막무가내’의 심정이지 않았을까? 이런 시선으로 보면, 소세키가 1906년 <도련님>을 탈고한 직후 메이지대학 교수직을 사임한 맥락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도련님>을 구상하며 설정한 도련님의 캐릭터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고정된 표상(상식, 통념)을 끊임없이 흔드는 자다. 그러기 위해선 도련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유동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도련님이 가족을 대하는 태도는 담담하다. 어릴 적부터 막무가내로 여러 사고를 친 그를 부모는 ‘글러 먹은 놈’이라 야단친다. 급기야 호적에서 파내려고 하나, 정작 도련님 자신은 그러건 말건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를 보살피는 이는 집안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하녀 기요 할멈뿐이다. 피 한 방울 한 섞인 기요가 도련님을 대하는 태도는 부모 보다 더욱 정성스럽다. 요컨대 도련님은 가족이라는 견고한 표상 바깥에 있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부모님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형과 단 둘이 남은 도련님에게 쥐어진 것은 살던 집과 가재도구를 팔아 치우고 남은 돈 6백 엔. 돈을 대하는 도련님의 태도는 단순하기 그지없다. 중학교에 부임하고 ‘내가 뭐 여기 말고는 입에 풀칠할 데가 없는 것도 아니고, 어디다 내놔도 굶어 죽지는 않을 거라는’ 태도는 금전적 예속관계에 묶여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고정적 주체를 만들어내는 세 가지 주요 요소인 국가(학교/공동체), 자본, 가족에서 도련님은 ‘유동적 존재’이다. 그러니 그의 행동은 고정된 주체들에겐 이상하고, 예측불허인데다, 위험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명명할 수 없고 유동하는 反주체적 인물에도 어떻게는 지시할 이름은 필요했다. 소세키가 설정한 유동하는 존재의 모델은, 처음에는 고양이였으며 나중은 도련님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고 막무가내의 의미가 내포된 도련님은, 소세키가 의도한 反주체성·유동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작명이라 하겠다.


인식의 갱신, 유동의 윤리

  유동적 존재인 도련님은 고정된 표상과 표상 사이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반면 고정된 주체에게 표상 사이를 건너는 일은 두렵다. 예를 들면 빨간 셔츠는 고상한 교육자를 자처하며 동시에 기생질을 하는 이중적 인격이기는 하나, 그 스스로는 자신을 교육자로 내, 외부에 표상하고 있다. 그러던 것이 도련님에 의해 마돈나와의 관계가 공개석상에서 폭로되자, 그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불일치하는 두 가지 표상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불일치하는 두 표상을 건너 다니는 방법은 오로지 눈치를 보며 적당히 은폐함으로써 가능할 뿐이다. 표상과 표상 사이의 심연을 바라보며 우리는 겁이 난다. 그래서 고정된 의미체계에 머무르며, 감히 뛰어넘을 생각을 하지 못한다. 여기서는 항상 같은 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뿐이다. 왜냐하면 고정된 인식에 함몰되어 있기에, 새로운 행동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인식은 행동(윤리)를 낳는다. 즉 고정된 주체는 고정된 윤리에 지배당하고, 고정된 윤리는 국가, 자본, 가족에서 주입 혹은 부여 받기 마련이다. 


  이러한 표상과 표상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을 건너기 위해선, 두 가지 책략이 가능하다. 먼저 심연을 무시하고 그저 훌쩍 건너뛰는 방법이다. 도련님의 ‘막무가내’ 정신이다. 두 번째는 표상과 표상 사이의 심연에 다리를 놓는 것이다. 이성과 언어로 세계를 통찰하는 일이다. 언어화하는 작업은 끊임없이 표상을 구축하고 또한 파괴하는 일의 반복이다. 그것은 인식의 지도를 끊임없이 갱신하는 일과 같다. 업데이트되지 않은 지도는 쓸모 없다. 도련님은 논쟁에서 빨간 셔츠를 당해내지 못한다. ‘도저히 내 머리로는 당할 수가 없는 놈이다. 아무래도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가 없다’라는 토로는 인식이 결여된 행동(윤리)의 빈약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차이 없는 반복에 불과하며, 언젠가는 비판하는 적들과 닮아가거나 혹은 금전의 포로가 될 가능성을 담고 있다. 성찰을 통해 인식이 갱신되지 않으면, 금전이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기 쉽다.


나같이 단순한 사람은 어느 것이 희고 어느 것이 검은지 꼭 집어주지 않으면 누구를 편들어야 하는지 모르는데.

“빨간 셔츠하고 거센 바람, 어느 쪽이 좋은 사람이에요?” (중략)

“그러니께 월급 많이 타는 쪽이 잘난 쪽 아니것는감?”

이래서야 물어봤댔자 별 수 없을 것 같아 그만둬버렸다. <도련님, 문예출판사, p104-5>


  <도련님> 집필 이후, 소세키는 아사히신문의 소설가로 살아간다. 실제로 그가 제국대학 교수를 그만둘 결심을 한 주된 이유도 아사히신문이 제시한 보수, 그러니까 경제적인 안정(나는 소세키로소이다, 이매진, p119)에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돈이 인간의 정신을 매수하는 도구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위의 인용에서 언급된 좀더 부유한 자가 잘난 인간이라는 말은 돈의 위력을 웅변한다. 돈에서 초연하고 초탈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성찰하지 않는 자는, 더욱 그것에 매달리게 될 것임을 소세키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것이 비록 막무가내인 도련님일지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인식의 갱신이야말로 고정되지 않고 유동할 수 있는 행동윤리를 생성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소세키가 아사히신문에 입사하고, 죽기 전까지 부단히 집필을 함으로써 자신의 윤리를 재구성하려 했던 것처럼. 소세키는 그 자신이 바로 유동하는 존재였다_(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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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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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루몽. 5: 엇갈린 운명과 이별

저자
조설근 지음
출판사
나남 | 2009-07-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국내 최초 정통 중국문학 학자들의 완역본!중국 근대소설의 효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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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옥은 칠현금을 타고 보옥이는 음률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는 등, 홍루몽에는 소리와 음악에 대한 장면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소리는 무엇인가? 원일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말씀과 기타 적어둔 메모를 종합해보면..

성(聲) : 소리. 자연에서 들려오는 소리.
음(音) : 소리에 패턴을 잡는 것이 음.이다. 패턴과 흐름을 집어내는 것이 바로 문(文)이다.
악(樂) : 총체적 음. 노래+춤+기악이 한데 어우러진 상태가 바로 악.이다.
예(禮) : 악은 반드시 예와 함께 움직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음란해진다.
정취(情趣) : 예악은 깊고 풍부한 정서와 흥취를 자아낸다. 이것이 바로 도(道)이다.

<나가수>를 비롯한 음악 프로그램에 사람들은 감동한다. 절절한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사무치게 한다.
사무치다.는 사(思) 즉, 생각+'무치다'. 나물 팍팍 무치듯, 생각이 무쳐지는 것을 '사무치다'로 해석해보면,
그것은 강렬한 '진동'을 의미한다. 여러가지 생각과 감정(희노애락애오욕=칠정七情)이 어우러져 무쳐지면
비로소 사무쳐서 감동이 일어난다.

소리가 마음을 사무치게 하는 것은, 바로 소리가 지닌 음파 혹은 진동 때문이 아닐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가슴을 울리고 때리고 후비는 강렬한 진동으로 마음은 요동친다.
이는 물리적 진동이다.

그래서 소리에 밝으면 진실을 알 수 있다. 눈은 잘 속아 넘어 가지만, 소리(진동 혹은 파동)는 속이기 어렵다.
예컨대, 나무 무늬인 벽은 눈으로 보기엔 그저 원목 재질이다. 그러나 실제로 두들겨 보면, 겉만 나무 무늬의 벽지일뿐
속은 다른 재질인 경우가 있다. 어떤 소리가 퉁겨져 나오느냐에 따라 사물의 성질을 파악할 수 있다.ㅈ
거짓말 탐지기도 그 원리는 인체의 미세한 떨림(파동과 진동)을 감지하는 것 아닌가?

언제부터인가, TV 프로그램에 자막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한국어임에도 불구하고, 자막이 없으면 내용 파악이
잘 안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귀가 잘 안들리기 시작한 것인가, 아니면 너무 시각에만 의존하게 된 것인가?

소리의 세계는 내 상상 밖으로 새로운 영역으로 느껴진다.
원일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물방울이 '톡'하고 떨어지는 한 소리로도
그 물방울이 깊은/얕은 물속에 떨어졌는지, 플라스틱/나무 위에 내려앉았는지.. 등등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홀렸다. 아, 이것이 바로 음색(音色)이란 말인가!

겉모습은 성형으로 뜯어 고칠 수 있으나, 목소리를 인위적으로 고친다는 얘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목소리는 스스로의 자세와 태도, 마음가짐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리라. 그렇게 자신을 수양하면 저절로 목소리는 변하는 것..
소리는 단지 목소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걸음걸이에서 나오는 소리, 팔을 휘두르는 소리, 앉았다 일어나는 소리 등..
우리가 일상에서 자세 한번 바꿀 때도,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리는 것처럼 소리는 도처에 있다.

이 소리가 바로 파동이요 진동이다. 그리고 파동과 진동은 일정한 '리듬'을 만든다. 그 리듬은 일상의 패턴, 흐름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일상의 리듬을 바꾸라~는 말은 수사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매우 구체적인 일상의 몸가짐을 재구성하라는 이야기에 다름없다.
즉,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어떤 자세/마음으로 말할 것인가? 앉고 일어나고 걷고 밥먹을 때 어떤 자세인가? 이런 세세한 것이
모두 소리이며 물리적 파동을 일으킨다.

소리는 속일 수 없다. 나의 음성/태도/행동은 지금 어떤 파동을 자아내며, 일상의 리듬을 형성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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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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