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학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라고 말할 뻔 했으나, '삼국지'의 열혈 애독자로 출발한 유년기를 돌아보니 나의 즐거운 취미는 따지고 보면 문학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삼국지만 5-6종 다른 출판사의 판본을 구입하고 달달 외우고 다닐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굉장한 열의였던 것 같다.

 

내가 '삼국지'에 빠지게 된 것은 그때 그 책이 마침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한편으로 내 안에서 그 책을 원하는 욕망이 없었다면 다른 책을 보거나, 아예 책을 가까이 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나는 어떤 흥미와 욕망으로 삼국지를 그토록 추구했나 가만히 돌아보게 된다. 

 

독서를 하다보면, 밑줄을 치는 일이 종종 있다. 그것은 일종의 '시그널'과 같다. 문장이 내 안에서 요동치는 미지의 주파수와 공명하는 순간에, 나도 모르게 밑줄을 긋는다. 이것은 어느정도 무의식적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밑줄에는 밑줄 친 자의 무의식 혹은 욕망의 단서가 담겨 있으리라. 다시 말하면, 밑줄과 그에 수반하는 메모는, 스스로를 재구성 혹은 재정의할 수 있는 탄약과 같다. 

 

그것을 긁어모아 거대한 무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스스로를 폭발시키거나 혹은 압축시키는 힘으로 말이다. 문학은 그렇게 인생을 변화시킨다. 삼국지 매니아 였던 이는 이제 다시 문학에 빠져 보련다.

 

각설하고.

이번 시즌1에는 영국의 황야에서 자라난 세 자매의 소설로 출발한다. 샬럿, 에밀리, 앤.

브론테 자매의 대표작을 연달아 읽으며 밑줄을 쳐보련다.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 민음사

샬럿 브론테 '제인 에어 1-2'  - 열린책들

앤 브론테 '아그네스 그레이' - 현대문화센터

 

같이 읽을 책 

브론테 자매, 폭풍의 언덕에서 쓴 편지(서간집) - 허밍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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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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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순환도덕면체(無限循環道德面體)

 

 

니체 세미나 시즌3을 마치고 마무리 에세이를 구상하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동력은 무엇인가? 책에 밑줄 친 부분과 메모를 취합하며 천천히 윤곽이 드러났다. 그것은 일종의 쾌감으로, 나를 구성하고 있는 가치를 인식함으로써 가해지는 해방 혹은 균열의 쾌감이었다. 본 에세이에서 그러한 해방감과 쾌감에 대해 규명해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앞으로 이어갈 니체 세미나에서 나만의 자체 동력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기묘한 2인3각

올해 초 니체 공부와 함께 연애를 시작했다. 연인도 연구실에서 오랜 시간 공부를 했고, 그래서 니체 세미나에서 얻은 깨달음은 연인과 대화 소재로 자연스레 공유할 수 있었다. 거의 동시기에 출발한 나와 니체, 그리고 나와 연인과의 만남은 마치 2인3각의 걸음을 걷는 것처럼 서로 밀착했다. 이러한 미묘한 삼각관계의 효과는 시즌3이 되어서야 서서히 느껴졌다. 나 자신이 이전과는 어느 정도 달라짐을 체감함은 연인과의 관계에서였다. 말하자면 니체의 이론은 연애라는 현장에서 은연 중에 실험되었던 것이다.

가장 현저한 체감은 도덕으로 대표되는 기존 인식론을 붕괴시킨 니체의 주장에서 비롯한다. 국경 하나만 넘어가도 잣대가 변하는 도덕의 용법, 유용성을 위해 수립된 도덕의 기원을 검토하며 내가 으레 옳다고 여기는 도덕의 제반 가치가 발견되었다. 그 도덕의 일부에는 나 자신의 연애관, 달리 말해 연애도덕도 포함되어 있었다. 연애의 현장에서, 나는 기존 연애도덕의 공식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의도해서라기 보다는, 니체를 공부하며 자연스럽게 그런 의식이 싹튼 것 같다. 일단 남자는 이래야 해, 여자는 이래야 해, 라는 명제에 대해 무척이나 망각하고 싶었다. 망각해야 할 정도로, 내가 지니고 있던 연애라는 현장에 요청되는 도덕질서는 강고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인간이 인식함에 있어, 선악의 논리로 무장한 도덕은 감옥으로 작동한다. 선악의 쇠창살 안에 갇힌 인식은 제한된 부분만 받아들이고 판단하게 된다. 나를 구성하는 연애도덕의 선과 악, 즉 ‘이래야 해’, 혹은‘이러지 말아야 해’라는 당위는 스스로를 속박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속박이기보다, 자연스런 공기와 같았다. 니체를 통해 그것을 인식하기 전까지 말이다.

 별안간 그전에는 별 생각 없던 나 자신의 이른바 ‘스펙’에 대해 스스로 평가하게 되고, 내가 사회적 기준에 적합한 연애할 만한 클라스(?)인지 판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 못 미치는 것에 우울함이 느껴지는 뭔가 굉장히 거시기한 기분을 체험하며 ‘그래, 이것이 니체가 경멸한 속물의 모습인가?’ 되묻는다. 연애를 하기 전만 해도 이런저런 세미나를 통해 굉장히 ‘깨어있다’고 자부했다. 연애를 하면서 여전히 ‘기존 도덕’으로 이뤄진 스스로를 지켜보며, 견고한 도덕의 감옥을 실감했다. 소득은 있었다. 감옥을 감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감옥 안에 있는 것이 불편했고 답답하기 짝이 없으며, 나가고 싶은 갈망이 생겼다. 정신을 차리고 가만히 들여다보니, 감옥처럼 보이던 쇠창살이 있는 방은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철컥!’ 내가 그냥 열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이렇게 그는 도덕의 방을 나서게 되었다.

 

나 이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저 아래로 내려가려 하거니와, 나 또한 그들이 하는 말대로 너처럼 몰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노라 [즐거운 학문] p316

 

나 자신을 따르며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부딪히는 지점에서 한탄하듯 말한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요?’ 정답을 구하려는 수험생의 도덕으로 단련되었기에, 정답이 없는 세계에 던져진 심정은 길 잃은 자의 그것과 같다. 도덕의 방을 나서며, 어떤 길이 놓여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가야 할 길을 콕 집어 알려주는 것이야말로 도덕과 종교에서 많이 해온 고전적 방식이 아니던가. 니체에게 들은 좋은 말이 참으로 많지만, 그것을 참기름 짜듯 압축하면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나(니체)를 따르지 말고, 너 자신을 따르라!’ 여기에 한마디 더 얹히면 ‘모든 것에 회의하라, 너 자신 조차도’ 정도로 정리할 것 같다.

 

나를 따르는 것-너 자신을 따르는 것

나의 방식과 말에 유혹되어

나를 따르고 추종하려 하는가?

오직 너 자신만을 충실히 추종하라

그것이 나를 따르는 것이다-여유롭게! 여유롭게! [즐거운 학문] p39

 

그래서 나도 나 자신의 방식을 이리저리 궁리해봤다. 내가 만든 것도 아닌 기존 연애도덕을 충족시키려 스트레스 받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연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몇 가지 실천하는 것을 언급하자면 첫째, 상호 존대. 둘째, 알아봐주기를 기대하지 않음. 셋째, 수입 공개(?).

먼저 상호 존대를 하고 싶었다. 기존 연애도덕에서 치명적으로 다가왔던 점은 불 같은 ‘소유욕’이었다. 나에게 있어 소유욕은 상대를 통제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며, 동시에 상대로부터 소유 당하고 싶은 이중적 갈망이었다. 이런 갈망은 의존성을 심화했으며 상대 없이는 일상을 지속할 수 없는 장애를 가져왔다. 그래서 연령과 친소를 떠나 상호 존대의 언어생활을 기초로 나와 당신이 서로 분리된 저마다의 욕구와 자신만의 길을 가는 존재임을 기억하고 싶었다. 다음으로 알아봐주기를 기대하지 않음은, 피 말리는 독심술을 겨루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도 잘 모르는데,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바를 언어화하여 표현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싶었다. 세 번째는 좀 웃기긴 한데, 어찌 보면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연애 초창기에 나의 수입을 깠는데(?) 진짜 너무나도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혼났다. 그런걸 말하는 것도 없어 보이고, 또한 상대방의 기준에 턱없이 미치지 못할까 싶은 걱정, 자존심이 입을 상처에 대한 불안 등 이래저래 강렬한 경험이었다.

내가 세운 도덕 혹은 연애윤리는 기존의 나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마련했다. 자기 가치의 설정은 일종의 무게 추를 다는 것과 같다. 기존 사회질서의 도덕과 습속의 중력은 마치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끌어당긴다. 나는 우주를 질주하는 한줄기 유성(流星)이고, 항해를 계속하려면 외부의 중력에 맞설 수 있는 나만의 무게가 필요하다. 여전히 한없는 가벼움에 팔랑거리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어느 정도 무게감이 생긴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거기에서 오는 모종의 해방감 혹은 쾌감이 있다. 이 느낌은 뭐라고 해야 할까, ‘설마 될까 싶었는데 쫌 되네?’라는 기분이라고 할까. 마치 월급을 깔 때 부들부들 떨다, 까고 나서 굉장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때의 쾌감과 비슷했다. 아, 이것은 어떤 종류의 쾌감일까!

 

삶, 쾌-불쾌의 향연에서

혹시 이처럼 자기 가치를 만드는 행위는 어쩌면 쾌감을 가져오는 게 아닐까? 쾌와 불쾌를 상반되는 것으로 인식하면 결코 알 수 없는, 최대한의 쾌는 최대한의 불쾌를 동반하는 인식의 순간으로써 말이다.

 

고도의 인간성에까지 성장한 사람에게 세계는 점점 더 풍부한 것이 된다. 점점 더 많은 관심의 낚시 바늘들이 그에게 던져져, 자극의 양이 끊임없이 커지고, 쾌와 불쾌의 양도 그만큼 늘어난다. 이에 따라 고급의 인간은 더 행복해지는 동시에 더 불행해진다. [즐거운 학문] p277

 

불쾌함과 고통을 회피할수록 삶이 미적지근한 이유가, 고통과 희열이 실은 같은 뿌리를 공유하기 때문이라면? 지루한 삶이 최소한의 불쾌를 원하기에 역시 최소한의 쾌감만 동반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희열과 쾌감을 원한다면 고통이 있는 곳에 스스로를 자리해야 하리라. 니체가 베수비오 화산 옆에 너의 근거지를 마련하라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월급을 깔 때 몸을 배배 꼬고, 식은땀을 흘리던 광경이 떠오른다. 나에게 수입 공개는 화산으로의 등정이었고, 나를 구성하던 연애도덕, 자의식과 콤플렉스의 일부가 화산의 열기에 의해 녹아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오르기까지 고통스러웠으나, 막상 오르고 나니 녹아 내린 빈자리에서 무언가 짜릿한 생성의 쾌감이 느껴졌다.

이는 단지 고통을 감수하라는 종교적 고행과는 결이 다르다. 니체의 시선은 고통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그의 눈빛은 ‘너의 길을 가라’에 놓여 있다. 자신의 길,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나가면 쾌감과 불쾌는 함께 손을 잡고 너 자신을 찾아온다. 나는 여기에서 니체의 고통스런 탄성, 환희의 고함을 상상한다. 인식의 열망! 인식함으로써 기존의 세계로부터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을 겪으나 그가 도달하는 새로운 지평! 여기서 니체는 무한한 감동을 했던 것이다. 이제 고통과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처럼 보였던 역풍은, 장애물 그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다. 고통과 역풍 모두 인식의 대상이며, 삶 그 자체가 사유의 실험 장으로 다가온다. 그가 영원회귀를 열망하고 긍정하지 않을 수 없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삶이 의무나 저주받은 숙명이나 기만이 아니라 인식하는 자의 실험이 될 수 있다는 저 사상이 나를 찾아온 그날 이후로! 내게 그것은 영웅적 감정이 춤추고 뛰어 노는 위험과 승리의 세계이다. “삶은 인식의 수단”이다. 이 원칙을 마음속에 품고 있으면, 인간은 용감해질 뿐만 아니라, 심지어 즐겁게 살고 즐겁게 웃게 된다. [즐거운 학문] p294

 

영웅, 즐거운 가치 창조자로

나는 자기 가치의 창조로 나만의 중력을 획득하며 작은 쾌감을 맛보았다. 쾌감의 본질은 스스로의 힘에 대한 자각에 있다. 타자의 가치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자신의 것(물론 이것도 궁극적으로 회의의 대상이다)으로 설정된 작은 세계를 직접 시뮬레이션 하는 행위에서 스스로의 힘을 실감한다. 그렇게 사회의 질서, 고전적으로 말하면 신의 질서에 의탁하지 않은 자들을 그리스 식으로는 프로메테우스적 영웅, 니체의 표현대로면 위버멘쉬일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힘을 자각한 드문 인간 유형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누가 영웅이고 위버멘쉬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영웅과 위버멘쉬의 덕목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그런 것이 설령 있다면 종교와 도덕에서 정해놓은 미덕과 무엇이 다르랴. 다시 말해 영웅 혹은 위버멘쉬는 스스로가 끊임없이 자기 가치를 생성하고 거기에서 쾌/불쾌를 동시에 경험하며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는 행위자이며, 자신이 스스로를 판단하는 행동 기준이다.

 

저 선한 것들을 부정하고, 그것들로부터 우중(愚衆)들의 갈채와 손쉬운 유행을 박탈하여, 그것들을 다시 고독한 영혼의 감춰진 수치로 만들어보라! 아마도 그대들은 이것들에 다가가는 유일한 인간 종족들, 즉 영웅적인 인간들을 얻게 될 것이다. [즐거운 학문] p269

 

이들이 드문 까닭은 인간은 자기 자신을 너무나도 과소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가치를 만들다 주저 앉고, 상처 받고, 좌절하여 이제는 안전하게 시도 조차 하지 않는 상태에 머물고 있다. 실패와 상처에 대해 니체는 말한다. 그로 인해 너는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고! 어쩌면 나 역시 그랬던 거 같다. 내가 니체 세미나에 왜 들어왔는지 이제야 조금씩 알 것만 같다. 그러한 영광스런 실패와 상처 덕분에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기 위해 여기 나 서 있다고. [즐거운 학문]에서 그 유명한 ‘신은 죽었다’라는 구절을 접하며 세미나 구성원 모두가 찬탄했다. 이 문장이 우리를 여기로 이끌었구나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다시 보면 ‘신은 죽었다’가 아니라 ‘(우리가) 신을 죽였다’이다. 그것을 해낸 스스로에 대해 재평가를 함으로써 긍지를 가져도 충분하다.

 

인간에게 의미를 지니는 세계를 창조한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바로 이에 대한 앎이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으며, 어느 한순간에 그것을 포착할지라도, 바로 다음 순간에 그것을 잊어버린다. … 우리는 우리가 지닌 능력만큼의 자부심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즐거운 학문] p278

 

도덕의 방을 나서고 마침내 깨달은 것은, 그곳이 바깥이 아니라 연결된 또 다른 방으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무한하게 순환하는 영겁의 도덕. 그래도 괜찮다. 새로운 도덕의 방에서 즐거운 인식의 탐구를 할 것이니. 이런 마음이라면 다음 시즌 세미나의 동력으로 삼아도 좋다_(끝)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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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의 사다리 위에서

 

제발, 그 질문만은!

  이 글은 왜 쓰셨어요? 비수처럼 질문이 옆구리에 박힌다. 가장 듣고 싶지 않고, 답하기 어려운 질문. 그러면서도 ‘글을 그렇게 주절주절 많이 썼는데, 그 질문이 나오다니 이 사람은 독해력이 부족한가 아니면 내가 그렇게 글을 못썼나?’ 싶은 불만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니체 세미나 시즌1 독후감 토론 때도 그렇고, 시즌2에도 어김없이 왜 썼냐는 질문이 나왔다. 하지만 한 두 명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관념적이다, 글쓴이가 안 보인다 라는 얘기에 백기를 들 수밖에 없다. 사실 일부러 사적 에피소드는 배제했다. 왜냐하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TMI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니체 글을 읽고 나의 느낀 점만 쓰면 되는 것 아닌가? 굳이 어떤 개인적 이야기가 필요한가 싶었다.

  이런 저항감은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적 에피소드가 왜 필요한지 이해해보려 했다. 에피소드가 없는 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되는 접점이 적다. 삶에서 겪는 일은 아주 특이한 사건이 아니고서는 대체로 비슷하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런 상이한 타인의 경험에서 우리는 자신을 확장할 수 있다. 하지만 에피소드가 없으면, 그 사람이 딛고 있는 현실이 와 닿지 않으며, 고로 그에 따른 의견도 그저 관념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대충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니체의 책을 다시 들여다봤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그렇게 관념적인 책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어렵긴 하지만, 일단 문단이 짧고,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인간 심리를 나름대로 파헤쳐서 흥미로운 구석도 있었다. 개인적인 에피소드에 대한 나름의 고민을 하며, 이 책을 죽 읽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니체라는 사람의 맨 얼굴이 책에서 느껴졌다. 가령 병자가 타인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힘을 행사하는 대목에서는, 침대 위에 드러누워 꼬장을 부리며 다음과 같은 통찰을 서둘러 메모하는 니체의 모습이 떠올랐다.

 

병자나 우울증에 걸린 사람과 교제하며 살면서 스스로 물어보라. 능란하게 호소하고 흐느끼며 불행함을 과시하는 것이 결국 함께 있는 사람을 괴롭히기 위한 것은 아닌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이하 생략] p78

 

  이런, 이거 아닌 척하지만 자기 얘기구먼! 그의 충직한 조수인 페터 가스트가 회상한 바에 의하면, 환자 니체는 정말 간호하기 어려운 지독한 인간이라고 불평했다. 걸핏하면 호출하고, 요구하는 바는 많고, 이랬다 저랬다 변덕도 심한 인간 니체! 아픈 니체는 침대에 누워 가스트를 오라 가라 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실감했을 것 같다. 아니 확실하다. 이렇게 상세히 약자의 심리를 꿰뚫어보고 분석함은 단지 관념적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그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뭔가 지루해 보였던 니체의 글이 한 순간에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래, 이 사람이 그저 처박혀 공상과 관념으로만 글을 휘갈겨 쓴 게 아니구나. 그런 생각에 이르자 니체의 주장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그럴 듯’하게 공감이 되었다. 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하고. 어라, 이것이 관념적이지 않고 생생한 글쓰기 혹은 글읽기일까?

 

니체, 변기 뚜껑을 열다

  그럼 혹시 니체도 그전에는 나처럼 어떤 관념적 사유에 빠져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내가 비극의 탄생이나 반시대적 고찰에서 접한 니체는 뭐랄까, 굉장히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려웠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관점에서 책을 다시 살펴보았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의 1장부터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다. 형이상학이란 뭐 간단히 말해, 현실 너머에 어떤 근본, 본질 등이 있을 거라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은 계속 변하지만, 그 배후에는 불변의 무엇이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니체는 그딴 것은 없다고 말한다. 전부 인간의 바람과 희망과 욕구가 녹여낸 오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른 장을 살펴봐도 대략 이런 이야기의 변주다. 종교, 예술, 형이상학적 그림자가 드리워진 철학에 스며든 기적이나 구원 같은 것은 오류라고 잘라 말한다. 니체는 목사의 아들로 독실한 종교적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가 전작인 ‘비극의 탄생’에서 언급한 예술은‘미적 현상으로서만 실존과 세계는 영원히 정당화’된다며 거의 ‘예술이 삶을 구원한다’에 가까웠는데 그런 입장을 뒤집은 것이다.

 

시인들은 행동으로 헤쳐나가려는 불만에 찬 차들의 열정을 해체하고 일시적으로 해소시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으로 자신들의 상태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저지한다. p169

 

 그리고는 자신의 이러한 주장이 인간을 불편하게 할거란다. 사실 불편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자신을 이루던 종교, 예술에 대한 견해를 뒤집음으로써 고독해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입장을 바꾼 것은 바그너에 대한 실망 등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그러한 관념적 형이상학에 내재한 오류를 눈뜨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단지 관념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미친다고 니체는 진단했던 것이다.

 

가장 위대한 철학자의 오류도 대체로 특정한 인간 행위와 감각을 잘못 설명하는 데서 시작되었다는 것, 잘못된 분석, 예를 들면 소위 비이기적인 행위를 기초로 잘못된 윤리학이 수립되었으며 그 윤리학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시 종교와 신화적 비본질을 인정하게 된 것, 그리고 끝으로 이런 음산한 유령의 그림자들이 물리학이나 세계관 전체에도 드리워졌다는 것이다. p66

 

  이제 니체는 사유의 출발점을 인간의 구체적 일상에서 시작한다. 인간 심리를 일일이 관찰함으로써 거기에 부여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오류’에 대한 분석에 돌입한다. 니체는 이렇게 접근하는 것이 학문이라고 한다. 관념의 안개를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일 말이다. 그렇게 하면 여러 가지로 불유쾌한 일에 마주할 수도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변기 뚜껑을 여는 것처럼,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마주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심리학적 오류와 이 분야에 대한 둔감함은 인간성을 향상시킨다. p65

 

  그렇다. 그냥 적당히 덮고 넘어가면 모두가 위안을 받으며 행복해질지도 모른다. 분명 그럴 것이다. 다만 그것은 잠정적 행복일 것이다. 닫혀진 변기 뚜껑 안에서 그 무엇이 숙성되면 어떤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까! 그래서 스스로 TMI를 싫어하기에 사적인 에피소드를 언급하는걸 원치 않는다고 했던 나의 심리를 관찰했다. 일단 내 사적 얘기가 재미없을 것 같다고 느낀다. 상대방이 나의 이야기를 TMI로 느낄 것 같아서 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어떤 관념 혹은 개념적 지식을 장광설로 떠들어 대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에세이를 쓸 때, 내가 알고 있는 혹은 흥미롭게 느낀 부분을 의식의 흐름대로 줄줄 많이도 썼다. 그리고 돌아오는 ‘이거 왜 썼슈?’ 커헉..! 결국 관념만으로는 사람과 소통은 어렵다. 관념은 나 자신의 머릿속에만 있기 때문이다.

 

속박, 다른 말로 자유정신

  에세이를 처음에 전혀 다른 주제로 썼다가 바꿨다. 왜 이걸 썼나요? 라는 질문이 도무지 짜증이 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최소한 관념적이라는 느낌에서만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짜증 섞인 마음에서 문득 눈에 띈 부분이, 니체가 그렇게 비판했던 종교와 예술을 마냥 나쁘게만 본 것이 아니라는 대목이다.

 

종교적이었던 시대를 경멸하지 말라. 어떻게 네가 아직도 예술에 진정하게 접근하고 있었는지를 철저하게 규명하라. 너는 바로 이러한 경험들의 도움으로 앞서 간 인류의 엄청난 길의 여정을 더욱 잘 이해하며 뒤따라 갈 수 있지 않을까? … 사람들은 종교와 예술을 어머니와 유모처럼 사랑해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명해질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서 바라보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p283

 

  종교와 예술을 비판하지만, 그러한 오류와 속박으로 인해 니체의 사유는 잉태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누구보다 종교와 예술의 분위기에서 성장했던 니체는, 그것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사유를 일구어냈다. 속박을 속박이라 여기고 순응-맹목적인 사람은 영원히 속박될 뿐이나, 속박을 감지하고 그것을 떨쳐내려고 하는 자-근거를 찾는 이는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나아갈 수 있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짜증나던 마음은 어느 정도 내려가고, 그 덕분에 이런 글이라도 쓸 수 있게 되어 고맙게 느껴졌다.

 

네가 어떤 존재이든 스스로 경험의 샘이 되어 너 자신을 도우라! 너의 본질에 대한 불만을 던져버리고 네 자신의 자아를 용서하라. 왜냐하면 어쨌든 너는 인식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백 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사다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행복 때문에, 깊은 유감을 가지고 네가 던져진 것으로 느끼던 시대는 너를 복되다고 찬양하고 있다. p283

 

  위의 인용문은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다. 나 자신의 실수, 오류는 배움으로 나아가는 도정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것은 인식의 사다리를 이루며, 나는 그것을 하나하나 밟으며 오르락 내리락 나아가고 있다. 필시 니체가 말한 동반자로써의 자유정신은, 인식의 사다리가 되어 주는 나 자신의 과오, 불안, 약점 등등이다. 니체여! 그대는 얼마나 고독했을까 라고 말하면 실례겠지. 인식의 슬픔과 고통에 머물러 있는 나 같은 사람은, 여전히 사다리를 오르며 현기증에 시달린다.

 

인식은 슬픔, 가장 많이 아는 자들은

가장 깊이 숙명적 진리를 탓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식의 나무는 생명의 나무가 아닌 것이다. -바이런 p126

 

하지만 그대는 말했지.

 

너는 이러한 목표를 지닌 그러한 삶이 너무나 힘들고 모든 유쾌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러하다면, 너는 아직 그 어떤 꿀도 인식의 꿀보다 달지 않다는 것, 드리워진 고난의 구름도 하나의 유선(乳腺)으로 너에게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으며 너는 기운을 회복하기 위해 그것에서 우유를 짜내게 되리라는 것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p284

 

  인식의 꿀! 단 한 뼘이라도 삶을 다르게 해석하여 달콤함을 맛봤다면 그것은 사유의 힘이다. 세계가 다수의 의미로 이뤄져 있음을 느낄수록, 그 힘은 증대되고 자유로워 질 것이다. 사유의 종착지는 없다. 인식하고 회의하는 행위 그 자체를 위해 영원히 방랑할 뿐. 니체여, 그대는 너무 멀리 있구나._(끝)

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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