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 3: 정월 대보름의 잔치

저자
조설근 지음
출판사
나남 | 2009-07-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국내 최초 정통 중국문학 학자들의 완역본!중국 근대소설의 효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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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력 큰 대감 마님

가사賈赦는 영국부의 큰 대감이다. 개국공신인 조부의 작위를 물려받아 행세하는데, 특별히 하는 일은 없다. 동생인 가정賈政이 조정에 출사해 벼슬살이를 하느라 분주한데 비해, 가사는 집에서 늘 벌렁 드러누워 지내며(1 16 p349) 소일한다. 작위는 세습되는 명예직으로, 가만히 앉아 놀고먹어도 부와 지위가 보장되는 일종의 종신 우대권이다. 냉자흥이 가우촌에게 말한 것마냥 주인이나 하인이나 그저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사람만 가득(1 2 p60)한 곳이 현재의 가부賈府(·영국부 총칭)였으며, 그 대표적인 인물 군상을 나는 가사라고 생각한다.

선대가 피땀을 흘려 세워놓은 터전에 자손들은 그저 받아만 먹을 줄 알았지, 스스로 집안을 일으켜 꾸려나갈 생각은 없다. 가사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집안 살림을 돌보지도 않으니 어떻겠는가? 심심하기 그지없다. 양손에 권력과 부귀를 쥐고 있는 백수 아니 한량이 하는 일이란, 대개 뻘짓거리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큰 대감임에도 불구하고 가사의 존재감은 별로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방안에서 주로 지내며, 가끔씩 우연히 감기가 들고(2 24 p96) 한마디로 있는 둥 없는 둥 하던 그가 마침내 사고를 쳤다. 지금까지 무명(?)의 설움을 단박에 날려버리는 홈런, 그것도 2방을!

가사가 가모賈母의 시녀인 원앙에게 흑심을 품고 접근하다 거절을 당하자 내뱉는 말은 매우 독하다. 그년이 누구한테 시집가든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제년이 죽어버리던지 아니면 평생 남자한테 시집을 안 간다고 하면 내가 그냥 놔두겠어. 그렇지 않다면 일찌감치 마음을 돌려 먹으라고 전해라. 그래야 신상에 좋을 거라고 말이야(3 46 p155). 아니, 방안에서 골골하게 누워지내는 줄로만 알았던 대감마님이 이런 분이셨다니! 화끈, 터프(?)하게까지 보이는 저주 어린 멘트는, 가사의 생의 불꽃을 태우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바로 성욕. 성욕은 존재감 없던 가사假死 상태의 가사도 일으켜 세운다. 그런데 그의 욕망의 출구는 오로지 성욕의 분출로만 쏠려 있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성욕의 해소로 증명하려는 것마냥, 그 외의 길은 전무하다. 아니 하나 더 있다. 바로 물욕.

원앙 사건이 일단락되려는 즈음, 가사는 골동부채에 홀딱 빠진다. 돈은 얼마나 줘도 상관없으니 즉시 구해오라는 성화에 주변 사람들만 곤욕을 치른다. 원앙과 골동부채 사건은 별개의 일이 아니다. 할 일이 없고 시간이 남으면 인간은 자연스레 잡념이 들게 마련이다. 그때 침투하는 것이 성욕과 물욕인데, 이는 오늘날도 별다를 게 없다. 성욕과 물욕을 주체하지 못하면 돌아오는 것은 망신살과 민폐 캐릭터가 되는 일뿐이다. 특히 남자에게 이 두 가지 욕망은 사주명리학으로 보면 재성(財星)에 해당하는데, 나 자신이 극剋하는 요소이다. 다시 말해 재물과 색은 스스로 컨트롤을 해야지, 도리어 컨트롤 당하면 곤란하다. 돈과 색에 빠져 패가망신한 남성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사는 일단 방안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니 성욕만 동할 뿐이요, 그걸 해소하자니 그 사람들 일생을 망치기만 하고 자신의 몸도 제대로 보양하지 못하게 되는(3 46 p138) 꼴이다. 집 떠나면 개고생 이라지만 이럴 땐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것을 몸소 실천한 이가 있으니, 뜻밖에도 개망나니 설반이다.

 

개망나니가 떠난 빈자리에 핀 꽃

유상련에게 집적대다 죽도록 얻어 맞은 설반은 부끄러운 나머지 집을 떠나려고 한다. 그 계기야 어떻든 이런 생각이 든 걸로 보아 그는 꽤 운이 좋다. 철이 살짝 들었다고 할까? 결국 편안한 집을 나서기 위해선 설반처럼 얻어 맞든, 질병에 걸리든 뭔가 충격파가 있어야 한다. 그만큼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다. 설반이 집밖에 나가 여전히 망나니 기질을 못 버리면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설보차의 말처럼 진인사대천명이라고 그저 최선을 다하고 나서 천명을 기다려 볼 수 밖에 없는(3 48 187p) 것 일뿐. 설반은 그나마 유상련이 있었으나 가사에게는 그런 존재가 없지 않았을까? 있었다 한들 철이 안 들었을 수도 있고! 허연 수염 나서까지 어머니의 시녀를 달라고 보채는 유아기적 성향은, 그가 대갓집 속에 폭 파묻혀 곱게 자랐다는 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겠다. 정말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설반이 떠난 빈자리에서 생긴다. 설반 역시 가사 못지않게 주색에 탐닉하는 인물인데, 그를 모시던 시첩인 향릉도 바깥에서 사들인 여자이다. 설반이 얻어맞고 왔을 때는 향릉도 눈이 퉁퉁 붓도록(3 47 p182) 울지만 그가 떠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시작詩作에 몰두한다. 욕망의 일대 전환! 향릉이라고 성욕이 없었을까? 하다못해 몰래 집안의 하인과 정을 통할 수도 있다. 가사가 끊임없이 성욕에 매인 것과 달리 향릉이 보인 행보는 단순히 남녀 성별의 차이로 보기만은 어렵다. 오히려 가보옥의 말에 단서가 있다. 그야말로 땅이 영험하면 사람이 영걸하다더니 하늘이 사람을 낼 때 제각기 독특한 성정을 부여한 것이야. 우리는 향릉을 볼 때마다 그저 평범하다고 늘 안타까워했는데 오늘 저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시인으로 변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3 48 p201).

보옥이 언급한 은 바로 우리를 둘러싼 시공간時空間이다. 그것은 주변 환경을 어떻게 구성하고 더불어 어떤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있는가를 포함한다. 탁하고 막힌 시공간에 있으면 심신은 역시 탁해지고 막혀 순환이 되지 않는다. 홀로 방에 틀어박혀 오로지 자신을 소모하는 야한 욕망에 집착하던 가사가 그렇다. 그가 원앙을 스토킹하고 가련을 매질하는 것은, 그의 몸과 정신이 색욕과 물욕으로 온통 들어차 꽉 막혔기 때문이다. 스스로 순환이 되지 않으니 다른 사람과 소통할 여지가 없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어린이가 때를 쓰는 것처럼, 분노가 시시때때로 일어나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이만한 민폐 캐릭터가 또 있을까?

반면 향릉이 구성한 시공간은 판이하다. 그녀는 일단 지아비였던 설반에게 목 매지 않는다. 그녀는 진작부터 시인의 성정을 품고 있었으나, 설반의 첩이라는 배치에 묶여 그것을 온전히 드러낼 기회가 없었다. 설반이 떠난 후 향릉이 대관원에 들어온 것은, 물을 만난 고기마냥 그녀가 지닌 본색을 펼칠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여기서 향릉의 욕망은 시를 배우고 싶다는 것 오직 하나였다. 배움의 욕망은 맑고 열린 시공간을 구성한다. 그 증거로 맑음은 자신을 내려놓게 되는 것이요, 열림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향릉은 시를 배우기로 마음 먹으며,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온전히 자신을 비움으로써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경청하고, 마침내 꿈속에서도 시를 짓는 삼매三昧의 경지에 다다른다. 또한 향릉이 시를 공부하는 즈음, 묘하게도 대관원에 새로운 얼굴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한다. 기존의 해당시사 회원들 외에, 형부인의 조카인 형수연과 설보차의 사촌동생 설보금, 이환의 친정 동생인 이문과 이기 등등. 그들이 모두 모여 한바탕 시 낭송 오디션을 여니 과연 배움의 욕망은 맑고 열린 시공간을 구성하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사실 탁하고 닫힌 마음가짐이라면 무언가를 온전히 배울 수 없다. 오히려 아집과 허세만 남을 뿐.. 이렇게 개망나니가 떠난 빈자리에 배움의 향연이 펼쳐지니, 설반도 민폐를 끼치기보다 나름 한 몫을 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가사처럼 소유욕으로 얼룩진 것은 자신과 남을 해친다. 차라리 도움이 안되면 설반처럼 그 자리를 떠나라! 상대에게 집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하여, 존재를 꽃피울 수 있게 하는 것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의이리라.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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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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