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평론가. 대한민국 단 한 명이라는 고미숙 샘의 목소리에는 자부심과 답답함이 동시에 배어있었다. 그 까닭을 살펴보기 전에 고전평론가가 고미숙 샘 말대로 그 자신밖에 없음을 확인해야 했다. 조사방법은 간단했다. 주요 검색사이트에서 ‘고전평론가’ 키워드로 찾아본 결과, 고전평론가=고미숙 Only one이었다. 다른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영화평론가, 문학평론가, 스포츠평론가, 미술, 음악, 정치.. 거의 모든 분야의 어미(語尾)에 갖다 붙이면 되는 게 평론가다. 이 가운데 적어도 고전평론가라는 타이틀의 신(新) 직업을 창조한 것은 샘이 분명했다. Apple의 아이폰과 Mozilla의 오픈소스 웹브라우저 파이어폭스가 유저(user)들에게 사랑 받는 이유는 폭넓은 확장성에 있다. 부가기능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특징은 개개인에게 ‘맞춤 기능’을 제공한다. 아이폰은 새로운 어플 (application)이 쏟아져 나와 사용자가 오히려 혼란에 빠질 지경이란다. 기능과다에 따른 즐거운 비명이다. 그래서 얼리 어답터 (early adopter) 같은 고수들은 미리 사용해보고 추천 어플리케이션을 정리해 대중에게 소개한다. 나 같은 일반인들은 이런 고수들의 도움을 받아 비로소 새로운 세계에 입문한다. 고전? 나는 ‘고전=확장성의 결정체’라 말하고 싶다. 혹은 이전부터 존재해온 아이폰이자 파이어폭스라 할만하다. 아니 비교 불가다.

고전의 칭호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어렴풋이 느끼듯 구닥다리 재미없고 따분한 그 무엇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오래되었음에도 여전히 현실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고전은 다름아닌 신화(神話)라 생각한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기원을 둔 서구 유럽은 물론이고, 각 문명은 신화와 그것의 해석에서 비롯한다. 반지의 제왕·율리시스 같은 영화·문학, 가끔 마시는 박카스 드링크·스타벅스의 인어 로고처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일상 속에 신화는 침투해있다. 수명이 다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만물의 법칙이나 달라이 라마마냥 무한 환생하며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불사신 같은 존재, 그것이 고전이다. 이쯤 되면 고전은 진정 ‘오래된 미래’라 할만하다. 이런 ‘오래된 미래’를 평(評)하고 논(論)하는 고전평론가 Only one 고미숙 샘의 자부심은 지극히 합당하다. 여기서 평론이란 단어가 주는 무거움부터 벗어버리자. 쉽게 말하면 ‘평評’은 따지는 거고, ‘논論’은 수다 떠는 거다. 즉 따지고 수다 떨기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평론가 타이틀을 쟁취할 수 있다. 물론 얼치기 평론가냐 아니냐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쩝! 그런데 답답함은 어찌된 일인가. 그 또한 Only one이기 때문이다. 고미숙 샘은 ‘고전평론가가 한 사람뿐이라 직업으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토로한다. 앞서 고전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송했건만 현실은 시궁창이란 얘기다. 고전은 여전히 땅속 깊이 잠들어있는 화석(化石)에 불과하고 아무도 그쪽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눈 밝은 자는 쥐라기 공원의 존 해몬드(리차드 아텐보로 扮)처럼 화석에서 공룡 DNA를 뽑아내 티라노 사우르스를 만들어낸다. 고미숙 샘도 화석에서 공룡 DNA를 뽑아냈다. 어떻게? ‘리라이팅(rewriting)’이다.

다시 쓰기 혹은 재해석이라 번역될만한 리라이팅은 새로운 글쓰기 시도이다. 리라이팅 자체가 새로운 게 아니고 고미숙 샘이 주도하는 문체가 그렇다는 말이다.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 1호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시공간]이 대표적이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쓰여진 당대에 사대부 사회로부터 홀대 받고 그 후손조차 한동안 출간을 꺼려했던 금서(禁書)였다. 이를 오늘날로 불러들인 이가 고미숙 샘이다. 단순 번역이라면 리라이팅이라 할 수 없다. 괜히 고전평론가인가? 고전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화끈하게 따지고 유쾌하게 수다 난장을 떨었다 이 말이다. 그 말발(?)이 나 같은 독자들을 유혹하고 감응한 것이다. 마치 연암의 시대에 성리학 유일사상에 물들어 고문(古文)만 달달 외고 찬양한 양반들의 뒤통수를 때리는 패관잡기(稗官雜記)식 문체라 하면 비유가 적절할는지. 역사는 반복된다고 오늘날 평전(評傳) 서술에도 문체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인다. 고미숙 샘은 기존의 평전 즉 위인전 서술 방식에 이의를 제기한다. 한마디로 너무 재미가 없다는 얘기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 집에 소년소녀 위인전 100선이라는 전집이 모셔져 있었던 것 같다. 개인차가 있기에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어린 나이에도 그것을 보는 데는 남다른 각오가 요청됐다. 너무 지루하고 졸렸다. 자연스레 책을 덮고 위인전 대신 ‘소년소녀 삼국지·수호지’로 옮겨갔다. 덕분에 나의 십대는 중국 대륙을 향한 동경과 영어 보다 한자에 더 익숙해지는 특성을 낳았다. 어쨌든 재미없음은 책으로선 치명적이다. 나만해도 재미없는 글은 죄악시한다. (혹여 이 글이 그렇다면 가차없이 질책을!)

위인전에 나올 정도면 분명 흥미롭고 얘깃거리가 많은 인물임에 틀림없다. 설마 아무나 위인이라 하겠는가. 자라나는 청소년 새싹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간의 생애를 고르고 골라 뽑아낸 것이 위인전 혹은 평전이리라. 따라서 평전이 지루한 것은 평전의 당사자 몫이 아니다. 그 평전과 위인전을 쓴 사람의 책임이다. (자서전 빼고) 이 지점에서 고미숙 샘은 ‘새로운 평전의 형식을 개척하고 싶다’는 속내를 비친다. 고전평론가 Only one으로 분투하던 1세대를 뒤로 하고, 고전평론가 2호, 3호.. Next generation을 직접 키우고 싶은 것이다. 앞서 말한 파이어폭스가 대중의 환영을 받는 이유는 오픈 소스, 즉 프로그램 설계도가 공유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나 자유롭게 프로그램의 개량·개발에 참여할 수 있다. 최근 위키피디아로 상징되는 집단지성·대중지성·다중지성 등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같은 개념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창작이 아닌 인류의 지혜가 수 천년 응축되어 전해 내려온 성경과 불경이 대표적이다. 아이폰이 유저들에 의해 쓰임새가 무한 확장되듯 고전 또한 마찬가지다. 아이폰 유저(user)가 어플(application)을 개발하는 행위는 학자가 고전에 주석을 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대중지성에서 고미숙 샘이 자신의 글쓰기 노하우를 전수한다고 천명한 것은 오픈 소스의 공개와 같다. 이제 비로소 대중지성 세미나는 그 ‘이름값’을 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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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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