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 4: 스산한 가을바람소리

저자
조설근 지음
출판사
나남 | 2009-07-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국내 최초 정통 중국문학 학자들의 완역본!중국 근대소설의 효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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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저자
피에르 클라스트르 지음
출판사
이학사 | 2005-06-3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원시사회는 국가 없는 사회이다. 따라서 원시사회는 불완전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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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루몽과 인류학을 만나다


계집애들 사이에서 소란을 피우며 지낼 뿐 강함이나 유약함의 구분도 없어서 어쩌다 우리를 보면 기분이 좋을 때는 위아래도 없이 함께 어지럽게 어울려 놀고,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우리가 제멋대로 해도 내버려둬요. 우리가 앉아 있거나 누워있거나 간에 상관도 안 하고, 도련님을 보고 본체만체해도 야단치지도 않아요. 그러니 아무도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지요. 누구든 각각 제멋대로 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걸요. (홍루몽 66 p172)


위의 인용은 녕국부의 하인인 흥아가 주인집 도련님 가보옥을 품평한 말이다.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데다 하는 일 없이 무척 바쁘고, 자매들과 어울려 수다 떨기를 즐길뿐더러 남의 잘못을 떠안기 좋아하는 이, 그가 보옥이다. 여자아이를 좋아하나 아랫도리의 음탕함과는 거리가 멀고, 권세를 믿고 남을 함부로 부리지도 않는다. 오로지 남자와 할멈을 병적으로 혐오하고, 출세해 부귀공명을 누리는 것을 어리석은 자들의 짓이라 여길 뿐이다. 좀처럼 잡히지 않는 독특함에서 그는 그저 하늘에서 뚝 덜어진 기이한 자로 느껴졌다. 홍루몽의 수수께끼는 보옥으로부터 출발하고 결국 그를 향한 질문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작자인 조설근이 말하고자 한 붉은 누각의 꿈은 무엇을 꿈꾸었던 것일까?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홍루몽을 처음 접한 것은 작년 여름, 그때 나는 일본의 인류학자인 나카자와 신이치의 <대칭성 인류학>을 함께 읽고 있었다. 아메리카 인디언 원주민의 신화를 텍스트 삼아, 원시부족사회를 공부했다. 그가 제시한 논술 중 눈에 띄었던 점은, 부족을 이끄는 추장에 대한 부분이었다. 추장은 우리가 알고 있는 권력자로서의 리더가 아니다. 그는 부족구성원에 대해 권력행사를 할 수 없다. 추장의 역할은 중재였다. 부족 성원간의 갈등을 슬기롭게 중재하는 것이 그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였다. 중재를 못하는 추장은 권위를 상실한다. 여기서 추장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한 쪽 손을 들어주는 판결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오직 말하기를 무기로 설득할 뿐, 결정을 내리는 자가 아니다. 동시에 서로 다른 텍스트를 읽어서 그랬는지, 추장과 보옥의 모습이 오버랩되기 시작했다. 권력 없는 추장과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대갓집 도련님, 부족 사이를 돌아다니며 중재하는 추장과 대관원 자매들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화를 풀어주려고 애쓰는 보옥이 말이다.


당시 그런 일단의 문제의식을 남겨둔 채로 시간이 흘렀다. 재차 홍루몽을 읽으며 이 문제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나카자와 신이치가 자신의 책에서 언급하며 칭찬한 프랑스의 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를 집어 들었다. 왜 굳이 인류학까지 끌어들여 가보옥을 해명하려고 했느냐 묻는다면, 보옥의 기이함은 지금의 인식론적 기반으로는 해명될 수 없거나 혹은 억지춘향으로 자의적 해석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보옥을 신화적 존재처럼 불가사의한 인물로 내버려둔다거나, 아니면 이분법적 성 정체성의 문제로 귀결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볼 때는 이 둘 모두 뭔가 부족하다. 새로운 인식론적 돋보기가 필요했으며, 클라스트르가 원주민을 분석하는 방식이 바로 내가 찾는 방법론이었다. 그것은 바로 근대적 시선, 즉 서구중심주의적 관점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아마존의 눈물>에 등장하는 부족사회를 접할 때 흔히 느끼는 감정은 현대문명에 비해 미개하다는 표상이다. 이 같은 인식은 문명이 일직선으로 발전한다는 서구중심주의적 시선에서 비롯한다. 클라스트르는 원시부족사회와 근대문명은 역사적으로 이어져 있지 않은, 불연속의 지층에 속해 있다고 가정한다. 부족사회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근대화가 이뤄진다는 역사의 진보는 허구라는 말이다. 양자 사이의 가장 주목할만한 차이점은 앞서 언급한 추장의 권력 문제였다. 원시부족사회는 기이하리만치 권력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그 대척점에 있는 것이 권력을 한 점으로 수렴하여 형성된 오늘날의 국가였다. 가보옥의 추장으로서의 행적을 추적하면, 아마도 조설근이 의도했던 발칙한 꿈의 정체를 해명할 수 있으리라.


 

가보옥, 원시부족의 추장


가보옥은 가부 녕국부의 적손嫡孫으로 요즘으로 치면 명문재벌 4세쯤 된다. 보옥의 출신성분에 비해 그가 시녀, 하인들을 대하는 태도는 극진하기 그지없다. 어린 시녀에게 핀잔 받고도 화내지 않음(35 p358)은 물론이고 어려서부터 남에게 마음을 푹 쏟아 붓는 병적인 성품을 갖고(29 p236) 있으며 남들이 자신을 무서워하는 것을 싫어(20 p447)했다. 그의 관심사는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지내는 것이었다. 권력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그 권력을 남들 사이를 조화롭게 화해시키는데 집중하며 결코 강제로 자신의 뜻을 관철하지 않는다. 우리가 권력자, 권력이라고 하면 연상되는 것은 힘의 강제와 그것에 복종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근대적 시선에서 가보옥의 지위는 마치 권력이 부재한 혹은 권력이라 부를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쉽다. 원시부족사회의 추장에게 부여된 이러한 무력無力한 권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클라스트르는 R.Lowie의 연구를 근거로 추장의 권력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추장은 평화의 중재자이다. (중간에서 어떻게든 화해를 시켜 주려던 것이었는데 화해도 못시키고 오해만 일으키니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홍루몽 22 p56-7)

(2)    추장은 자기의 재화에 대해 집착해서는 안 된다. (하는 일이란 오로지 여러 시녀들을 위해 애를 쓰며 하인 같은 노릇을 하는 것뿐이었다. 홍루몽 36 p366)

(3)    말을 잘하는 자만이 추장의 지위를 얻을 수 있다. (보옥의 언변은 두말할 것 없다)


원시부족사회에서 추장이 우리가 생각하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때는 오직 전시戰時뿐이다. 전쟁이 끝나면, 추장은 다시 원래의 무력한 권력자로 중재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가끔씩 자신의 욕망을 위해 전쟁을 원하는 추장이 등장했다. 그들은 자신이 명령을 내리고 부족을 통솔하는 일단의 권력관계에 매료된 자들로써, 그것을 영속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야 했다. 전쟁만이 그런 욕망을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로니모 같은 인디언 추장이 그랬다. 그들의 욕망은 부족 전체의 철저한 외면을 받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원시부족사회는 강력한 리더십을 행사하는 추장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국가의 탄생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왜 국가의 출현을 거부했는가? 원시부족사회는 너와 내가 위계적으로 놓이지 않는다는 인식하에서 작동한다. 국가의 출현은 권력을 지닌 권력자와 그에 복종하는 피지배자로 나뉨으로써, 필연적으로 인간의 정치적 소외가 발생한다. 원시사회의 추장제는 그러한 소외를 막기 위한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홍루몽의 녕·영국부는 가부라 총칭되는 동시에, 그 사이에는 대관원이 존재한다. 가부와 대관원의 작동방식은 몹시 다르다. 가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주로 왕희봉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희봉이 진가경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사람들을 부리는 장면은, 군주의 권력행사와 유사하다. 또한 살림살이를 관장하며 선물을 주고 받거나 각종 대소사를 치르는 일은, 모두 가부를 무대로 묘사되며 일종의 소小왕국의 모습이라 해도 무방하다. 반면 대관원에서는 권력이나 경제문제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시선이 가부에서 대관원으로 옮겨지는 순간, 전혀 다른 시공간이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가보옥을 중심으로 시를 읊고 환담을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먹고 마시며 논다. 희봉이나 가모 조차도 연회를 베풀면, 가부가 아닌 대관원으로 들어와서 즐긴다. 이러한 교묘한 공간구성의 배치는 조설근이 치밀하게 의도한 바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가부의 실질적인 영도자는 왕희봉이며, 대관원의 중심은 가보옥이다. 똑 같은 리더라고는 하지만, 그 층위는 현저히 다르다. 마치 국가의 강력한 권력을 지닌 영도자와 원시부족사회의 무력한 추장처럼 말이다. 양자는 권력을 지녔으나, 그 권력이 사용되는 방향은 대조적이다. 그런데 가부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대개 치정(가련, 가사, 가진의 호색)과 탐욕(조이랑의 질투와 저주, 할멈들의 원한 등)에 집중되어 있다면, 대관원의 장면은 인간의 감수성에 대한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예컨대 대옥이와 보옥이가 한숨 지으며 인생무상을 노래하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 소외의 문제


국가와 원시부족사회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인간 소외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국가는 정치적으로는 위계를 형성하고, 위계에 따른 역할을 부여한다. 여자다움, 아이다움, 남자다움 같은 표상은 국가가 가족을 매개로 수립되며 다져진 개념이다. 원시부족사회가 반대하는 지점이 여기로 보인다. 홍루몽 세미나에서 줄곧 제기되었던 자기다움의 문제. 그것은 생래적으로 부여된 자기다움이 아니라, 위계에 얽매여 발현되지 못하는 인간의 가능성의 문제인 것이다. 위계는 사람의 성정을 틀에 가둔다. 원시부족사회는 추장의 권력화를 경계함으로써, 끊임없이 추장을 무력화했다. 그럼으로써 부족성원이 저마다의 성정을 발현하기를 바란 것이 아닐까? 이 부분은 다소 짐작이지만, 그러한 주장을 증명할만한 흔적이 있다.


원시사회는 먹고 살기 어려웠을 거라는 시선이 있다. 이른바 생계경제라는 시선은 서구적 관점에서 비롯한, 원시사회가 미개사회이기에 생존에 어려움을 겪었을 거라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클라스트르의 연구에 의하면, 원시부족은 생존하고도 남을 만큼의 생산자원이 있었다. 그들이 우리와 다른 점은, 저장하여 축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잉여생산에 대한 집착이 없었다. 어쩌다 더 많이 생산했을 때는 그것을 모조리 소모해버렸다. 자본주의 사회가 사유재산의 욕망, 내 것을 더 많이 확보하려는 모습과는 다른 지점이다. 내 것, 네 것이라는 인식이 들어서면, 가진 자와 덜 가진 자의 차이가 생기고 그에 따른 소외가 발생한다. 이는 앞서 말한 정치적 소외에 비견되는, 경제적 소외라 할 수 있다. 원시부족사회가 인간의 소외를 경계하는 식으로 작동했기에, 그들은 더 많이 생산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럼 남는 시간에 그들은 뭐했냐고? 놀았다!


서구사회가 보는 인종적 편견 가운데, 멍청한 흑인과 게으른 인디언이라는 시선이 있다.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선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렇기에 근대의 관점으로는 이처럼 일하지 않는 모습이 게으른 것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근대적 인식의 한계이다. 원시부족은 게으른 게 아니고, 그 시간을 즐겼다. 대관원의 자매들이 시사를 만들고 노는 것처럼 말이다. 얼핏 보기에 대관원의 인물들은 부귀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량처럼 즐길 수 있는 게 아니냐 반문할지 모르겠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오히려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선 더 열심히 일하고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명제가 과연 절대적인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 있지 않을까? 가부의 왕희봉만 보더라도, 그렇게 잘사는 대갓집도 살림걱정을 한다. 우리는 얼마나 더 축적하고 벌어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마 그 답은 끝이 없다 일 것이다. 가부 혹은 국가의 배치 하에 있는 한, 무한 축적과 소비의 반복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리라. 그 끝은 탐욕과 치정에 의한 파멸일지도. 원시부족사회와 대관원은 그에 대한 인식의 출구로 작동할 수 있지 않을까?

 


무사망이 곧 혼세마왕


문득 가보옥의 별명이 떠올랐다. 무사망. 할 일 없이 바쁜 도련님을 비꼰 별명이다. 또 하나, 혼세마왕.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대마왕. 모든 이가 자본의 축적을 향해 달려가던 것을 멈추는 상상을 해본다. 사람들은 더 이상 열심히 바쁘게 돈을 벌려고 하는 대신에, 자신의 분수에 맞게(이 부분이 애매하긴 하다) 생활하며 소외되지 않는 삶을 추구한다. 그 순간 국가는 어떻게 될까? 국가 권력은 사람들에게 작동할 수 있을까? 무사망이 곧 혼세마왕이다. 이 말은 자기다움을 찾기 위해 노는 식으로 삶을 구성하면, 그것이 바로 국가를 무너뜨린다는 암시가 아닐까? 국가 권력자가 보기엔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무사망들.. 나는 그들이 자본주의 경쟁구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일군의 백수들이라고 생각한다. 조설근이 꾼 발칙한 꿈은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가부라는 국가 안에서 만들어진 대관원이라는 소규모 공동체에서 그런 시도는 시작되었다. 앞에서 자신의 분수에 맞는 게 무엇인지 조금 애매하다고 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도덕경에 제시된 소국과민小國寡民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으리라. 일단 사람이 너무 많이 모이면, 자연스레 위계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체계가 생기고 제도가 생기고 마침내 국가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러니 대관원에서 훈련된 인물들은 때가 되면 모두 대관원 바깥으로 나와 자신만의 대관원을 곳곳에 만들어야 할 것이다. 대관원이 팽창하면 그 끝은 결국 가부가 될 것이기 때문에.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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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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