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 4: 스산한 가을바람소리

저자
조설근 지음
출판사
나남 | 2009-07-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국내 최초 정통 중국문학 학자들의 완역본!중국 근대소설의 효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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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이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지난 시간.. 별안간 왕부인의 호출을 받고 달려간 청문. 

난데없이 요사스럽고, 죽은 송장 취급을 당하며 한바탕 혼쭐이 난다. 그 직접적 원인은 왕선보댁의 험담이었다.
청문은 왕부인이 부른다는 소식에 잠깐 생각한다. 워낙 영리하기 그지없는 그녀는 왕부인이 화려한 화장과 경박한 말씨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에, 평소와 달리 일부러 수수한 차림으로 건너가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또 문제였으니..

청문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왕부인은 그녀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비녀는 비뚤게 꽂혀서 떨어지려고 하고 살쩍은 흐트러진 데다가
적삼은 늘어지고 허리띠는 흘러내린 것이 봄날 낮잠에서 깨어난 양귀비나 가슴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있던 서시의 모습 그대로 였다. (홍루몽 74회 p377)

비녀는 비뚤게, 살쩍은 흐트러져, 적삼은 늘어져, 허리띠는 흘러내려.. 이건 뭐 추레하기 그지 없는 모습.
허걱.. 그런데 이 모습이 왕부인의 눈에는 그야말로 요염하기 그지없는 양귀비와 서시처럼 보였던 게다. ;;

이어지는 왕부인의 호통.

넌 그렇게 요사하게 몸단장을 해서 대체 누구에게 보일 심사더란 말이냐? 네가 하는 짓거리를 내가 모를 줄 아느냐? (홍루몽 74회 p378)

이미 왕부인의 눈에는 청문이 무슨 짓을 해도 고까워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수하게 하면 그거대로 요사스럽고, 
화려하면 그거대로 요망하고.. 한마디로 빠져 나갈 수 없는 그물에 걸린 것!
왕부인은 청문에게 왜 그러는가? 그 이유는 대관원에서 입수된 춘화낭으로 인해 마음이 한바탕 뒤집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과연 왕부인의 뒤집힌 눈 때문에 그렇단 말인가? 그렇다면 하필 청문만 날벼락을 맞은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청문의 성격은 다른 시녀들과 달리, 욱하는 성격이 있고 거침없다. 게다가 자색도 남달라 왕부인은 그녀를 평소부터 주시하고 있었다. 어찌보면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라기보다, 예정된 운명이라고 할까? 청문 입장에선 갑자기 자신을 불러다 호통치는 왕부인이 황당할지 모르나.. 그것은 결국 자신의 성정이 뿌린 인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이런 상황에선 논리적 인과가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하아.. 사실 청문같은 억울해보이는 상황은 살다보면 더러 겪게 마련이다. 그럴 때면 황당하고 분이 치밀고 어디다 하소연할데도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그저 '내 탓이오~' 해야 한단 말인가? 물론 나 또한 쉽지는 않으나, 가만 생각해보면 또 '내 탓이오~'하지 않으면 또 어쩔까 싶다. ;;

억울함은 그것을 불러일으킨 대상을 향해 풀지 않으면 풀리지 않을 텐데, 억울한 것 자체가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니 진퇴양난이다. 문득 '보왕삼매론'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억울함을 당해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리하여 성현이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본분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보왕삼매론 中)

이 구절을 읽을 때 슬그머니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왜? 어째서 밝히지 말아야 하지? 내가 잘못한 건 없는데??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의 번뇌와 고통은 더욱 심해지는 것 같다. 억울함은 풀리지 않고, 그 억울함을 가슴에 담고 있는 나는 그것대로 괴롭고.. 이중고에 시달린다. 마치 청문처럼 열이 올라 펄펄 뛰고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이때 오히려 시비곡절을 애써 가리기보다, 그저 확 놓아버리는 게 가장 빨리 번뇌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아닐까?
억울함의 감정은 그 문제가 나 자신과 전혀 무관하다는 인식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그것 또한 대단한 자기 기만은 아닐는지..

청문의 경우만 봐도, 그녀가 왕부인을 만나러 갈때 평소와 달리 수수한 옷차림새를 한 것은 시사적이다.
자기가 잘못한 게 없고 떳떳하면, 왜 그런 눈치를 살피는가? 자기 딴에는 왕부인의 취향을 살펴 눈치를 본 것이지만,
그렇게 한다는 것은 평소 자신이 왕부인과 충돌한만한 기질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그럴때는 어떻게 잔재주, 잔머리를 굴려도 빠져나갈 수 없다. 이미 그런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 다른 누구를 탓하기 전에, 혹은 억울함을 호소하기 전에
그 억울함으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보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물론 쉽지 않지만..

대개 사람들은 제 성질을 못이겨 화를 초래하고 병을 얻는다.
잔재주로 둘러치기 보다, 자신이 쥐고 있는 자아상을 내려놓을 때 좀더 자유로워 질 수 있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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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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