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유

저자
마르셀 그라네 지음
출판사
한길사 | 2010-09-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중국학의 대가, 마르셀 그라네의 대표작프랑스 태생의 중국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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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적 앎의 대상

중국의 현자들은 광대들을 줄곧 적개심으로 대해왔다. 광대가 물구나무서기로 직립한 나무를 흉내 내면 세계의 무질서가 초래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중국인에게 우주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사람은 발이 네모나기에 땅에 의지하고, 머리는 하늘을 닮아 둥글다. 이처럼 사람의 신체는 우주의 모습과 일치한다. 그렇기에 광대의 행위는 하늘과 땅을 뒤집은 것과 다름없었으며 우주의 혼란을 야기한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관점은 대우주와 소우주는 크기의 차이일 뿐, 우열의 차원이 아님을 입증한다. 대우주가 소우주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소우주도 대우주에 영향을 준다. 이들의 관계는 하나의 종합적인 앎의 대상이다. 대우주와 대우주 속에 겹쳐 있는 제반 소우주들에 적용되는 이 앎은 그 형성과정에서 단지 유사논리만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유사논리는 무엇인가? 대우주와 소우주에 적용되는 원칙은 대동소이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양자가 서로 분리되어 따로 작용하지 않고, 소우주에 어떤 변화를 겪으면 그 유사한 논리에 따라 대우주도 변동함을 의미한다. 광대의 경우를 보면, 인간의 신체를 ()우주와 같은 원칙으로 작동하는 소우주로 보는 관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단지 신체뿐만 아니라 건축, 군대의 편성, 각종 예법 등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한 사회구조, 규범에서 드러난다. 중국인의 소우주 관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좌우左右에 관련된 제반 사상, 관습, 신화를 들 수 있다.

 

좌우左右 개념에 드러난 소우주 관

좌우의 개념은 어떻게 소우주 관과 연결되어 있는가? 좌와 우는 음양사상과 맞닿아 있으며(左陽右陰), 음양은 하늘과 땅으로 치환되며, 그것은 바로 대우주의 천지와 같다. 그런데 우리의 몸에는 왼손과 오른손이 있으며 신체 각 부위마다 좌우가 함께 놓여 있다. 말하자면 좌우는 대우주의 천지와 상통하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신체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좌우 개념은 소우주 관을 가장 잘 보여준다. 서구인들이 좌를 혐오하고 우를 받드는 종교적 격정은 중국인에게는 찾아볼 수 없다. 중국인들은 오른손잡이임에도 좌를 경배했다. 중국의 위대한 영웅들 중 일부는 왼손잡이였고, 일부는 오른손잡이였다. 무엇이든 간에 좌우의 우열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천덕과 지덕은 상호보완적이다. 양이 음을 능가하고, 도가 덕을 능가하고, 군주의 책무가 재상의 정무를 능가하듯이, 좌와 하늘은 어떤 측면에서 우와 땅을 능가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대립은 위계상의 차이나 용도상의 구분에 따른 것에 불과하다.

오른손을 나타내는 글자 우右는 어원학적으로 손+입의 조합이다. 손을 입에 가져가는 것, 즉 음식을 먹는 손이다. 음식은 땅에서 나는 것이기에, 오른손은 땅에 관계된다. 좌左는 어떤가? 좌는 손+직각을 나타내는 표기 요소의 조합이다. 직각은 종교적이면서 주술적인 제반 기술을 상징하며, 군주와 점술가의 시조인 복희伏羲의 표상이다. 복희는 왼손에 직각자를 들고 있다. 직각자는 땅의 표상인 정방형을 생성한다. 그런데 생성된 정방형은 그 자체에 원형을 내포한다. 직각자는 정방형과 원형을 생성할 수 있는, 즉 음과 양에 동시에 속하는 주술인의 표상이자, 하늘과 땅의 일 모두에 정통했던 복희의 표상이 되기에 이른다. (:복희는 여와와 남매이자 부부이다. 그들은 결혼의 시조로, 인류의 어버이와 같은 존재이다. 중국사유에서 그라네가 든 예는, 그들이 부부가 된 신화를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서 직각자는 음과 양이 성혼成婚을 통해 속성을 교환한 후에야 비로소 남성의 상징으로 될 수 있을 따름이다라고 했으나, 복희의 직각자는 이제 그 속성의 교환 없이도 음양 모두를 포괄할 수 있게 되었다. 신화학에서는 여와를 창조 여신 신화를 모계 사회적 전통을 보여준다면, 복희와 여와의 신화는 남녀가 일부일처를 이룬 가부장적 사회의 인식을 담고 있다고 해석한다)

복희의 왼손에 직각자가 들려지게 되었는데, 왼손은 군주의 업적과 주술적, 종교적 활동을 상기한다. 그렇다고 우가 세속적인 일과 지상에서의 활동을 표상한다고 좌와 적대적 관계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중국사유는 상반성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대조와 교대와 상관성에, 그리고 양성兩性의 속성의 교환에 관건을 둔다. 이러한 교환과 대조의 관계 그리고 상반관계와 교대관계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제반 조건들은 시공간상의 무한정한 다양성으로 자연스럽게 배가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예법은 이 모든 복합양상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때로는 좌가, 때로는 우가 예법상 중시된다. 그건 상황마다 미묘하게 다르지만, 자세히 보면 일관된 분류원칙에 의해 적용된다.

중국인은 오른손잡이다. 인사할 때 남아는 오른손을 왼손 아래에 감추고, 여아는 왼손을 오른손 아래로 감춘다. 복상服喪기간에는 음과 우가 우선되어 남자들도 왼손을 가리면서 오른손을 내보인다. 손바닥을 대고 맹세나 우정을 다짐할 때는 오른손을 부여잡는다. 오른손이 왼손보다 중시된 반면, 왼쪽 귀가 오른쪽 귀보다 중시되었다. 유순한 동물인 말과 양을 인양 받는 경우 오른손으로 밧줄을 잡았던 반면, 보다 난폭한 개는 왼손으로 끈을 잡았다. 중국인들은 줄 때는 왼쪽, 받을 때는 오른쪽에 위치한다. 군주의 진상품은 군주의 왼편에 놓여야 했다. 군주의 명령을 하달할 때는 군주의 오른편에 위치했다. 생선을 대접하는 예법은 특이하다. 꼬리가 손님을 향해 놓여야 하며, 복부는 겨울에는 우, 여름에는 좌로 놓여야 했다. 여름과 좌와 전면(가슴 쏙)은 양에 해당했다. 여름에 대접하는 생선은 양에 해당하는 모든 것과 일치함으로써 공간적으로 바르게 놓인 것이 된다. 겨울에는 이 같은 배치가 일치하지 않으나 나름의 논리로 해명되며, 만약 마른 생선일 경우에는 상황은 또 전혀 달라진다.

결국 공간적으로 바르게 놓는다는 의미는 중국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대우주의 원리는 인사법(소우주), 생선을 놓는 위치(소우주) 등과 같은 일상적 행위로 구현되었다. 이 같은 원칙을 정한 예법은 요컨대 우주를 안배하는 준거체계와 다름없는 것이다. 대우주의 원리는 왜 구현되어야만 했는가? 우주의 원리가 구현되지 못하고 어지러워지면, 그것은 곧 지상의 혼란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서두의 광대를 적대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세계를 나누는 기준, 군주

향응, 예물교환, 서약과 경조사, 이 모든 것은 예법에 따라 관장되며 세부에 이르기까지 좌와 우 중에서 최선의 택일을 도모했다. 이러한 예법의 원칙들이 비롯한 근원과, 좌우를 할당하게 된 기원은 정치에 있는 것 같다. 정치와 논리를 지배하는 것은 복종에 기초하는 봉건사상이다. 좌우의 대립, 의례상의 서열화는 상위와 하위에 대한 봉건적인 구분과 관계된다. 다만 이 구분은 (사회조직이 성의 범주에 바탕 하기에) 남녀와 음양의 구별과도 함께 조합되어야 했다. 좌우를 선택하는 원칙은 우주조직의 구도에 의거했으며, 그러한 구도의 원칙은 문무의식으로 거행된 봉건집회의 수칙에서 찾을 수 있다.

군주는 단상에 올라 남면南面하며 하늘과 양과 남쪽의 기운을 정면으로 받아들인다. 군주의 좌는 동이며 우는 서이다. 동은 떠오르는 승리의 태양이기에, 좌는 높은 쪽이며 양이며 남, 군주의 자리다. 우는 해가 지는 쪽이며 땅과 북, 음에 속한다. 왕세자의 궁은 동쪽에, 대비의 처소는 서쪽에 위치한다. 좌는 남성적, 종교적 활동이며, 우는 여성적, 겨울과 추수와 음식에 해당한다. 생명을 보전하는 행위는 양으로 군주의 일이며 왼손이다. 살생은 음으로 군졸의 일이며 그 집행은 오른손이 맡는다. 군대는 군주의 붉은 깃발과 함께 이동하며 언제나 남쪽으로 행군한다. 따라서 좌군영左軍營은 항상 왼쪽(동쪽)에 위치한다. 앞서 언급한 다양한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 중국인은 세계의 분할을 군주와 연관 짓는다.

부부의 경우를 보면, 바깥주인(남자)은 집안에서 사랑채의 동쪽 계단 위인 좌측에 위치하고, 안주인(여자)은 서쪽 계단 위인 우측에 배정된다. 그런데 집밖으로 나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남자는 이제 오른쪽 보도인 서쪽에서, 여자는 왼쪽 보도인 동쪽에서 걸어간다. 왜 바뀌었을까? 그것은 바로 중국인에게 세계분할은 군주를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군주를 제외한 남자들은 모두 제후(신하)이다. 봉건질서에서 신하의 위치였던 그들은, 일단 자기 집(영지)안으로 들어오면 거기에서 군주 노릇을 한다. 따라서 자기 집안에서는 좌측(동쪽)에 자리했으나, 집밖으로 나온 이상 그곳은 군주의 세력권을 상징한다. 따라서 남자(제후)들은 북쪽을 향해 걸어야 했고, 오른편에 위치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도 집안의 특정한 장소, 예컨대 잠자리 같은 경우는 또 상황이 달라진다. (맙소사!) 잠자리에서 중시되는 방향은 아래쪽, 땅 쪽이다. 여인은 수확한 곡식이 보관된 구석에 자리를 편다. 왜냐하면 곡식에서 능임력能妊力을 빌려오고, 곡식에게 자신의 생식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여인의 자리는 서쪽 벽에 맞닿도록 놓이고, 남편은 아내의 동쪽에 놓인다. 고인故人 외에 부부는 머리를 남쪽에 둘 수 없다. 따라서 밤에는 아내가 서쪽에 위치하나 좌를, 남편이 우를 차지한다. 계속 예시한 군주와 가정에서 나타나는 좌우의 용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모든 전환은 봉건사회구주인 남편에 대한 아내의 종속과 군주에 대한 제후의 종속에 따른 결과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환에도, 좌는 근본적으로 양이며, 우는 음에 해당한다.

정치적 의미를 지녔던 상하 구별은 경우에 따라 좌우 구별로 전이되었다. 즉 상하(남면 혹은 북면)에 적용되는 정치적 함의는 좌우의 개념으로 확장되기에 이른다. 그에 따른 좌우 분배의 원칙은 점성학과 생리학과 역사로 입증되고 있다. 중국 점성학에서 하늘은 좌선左旋, 땅은 우선右旋한다. 군주의 순행巡行은 왼쪽(동쪽)으로 시작했다. 이는 모든 주기적 운행질서와도 부합하는 것이며, 군주와 태양과 양의 행로이기도 했다. 우의 행로는 역행으로, 장례 기간에 준수되어야 하는 행로다. 우右의 운행방식은 생리학으로도 입증된다. 생리학은 수7이나 8이 남녀의 삶을 관장한다는 점을 대전제로 삼는다. 여자의 경우 수7에 의거해, 성장한다. 7은 가을(, ) 12지의 기호 신申에 해당한다. 기호 사巳는 잉태의 위치이며 임신은 10개월 동안 지속된다. 여자의 경우, 잉태의 위치인 사巳에서 여성의 삶이 시작되는 지점인 신申까지 10지를 경유한다. 그런데 이 행로는 우선右旋이다. 즉 태아가 오른쪽에 자리하면 여아인 것처럼, 오른쪽에 잉태된 여아는 오른쪽을 향하여 선회한다. 또한 남녀가 정북에서 출발해 잉태의 위치인 사巳에서 만나려면 남자는 좌로 30, 여자는 우로 20지를 거쳐야 한다(그래서 남자는 30, 여자는 20세에 혼인한다).

좌로의 행보는 상과 양의 사항들에 적합한 동선으로 하늘의 기운이 생기를 불어넣는 영웅들의 특징이다. 우는 꼭 그 정반대다. 이 점에서 역사는 신빙한 여러 증거를 제시한다. 천덕의 힘을 얻은 승탕勝湯은 모체의 가슴()에서 태어났고, 지덕을 지닌 대우大禹는 모체의 등()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대우는 왼발이 결코 오른발보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게 몸의 오른편을 앞으로 내밀고 걸었다. 정치의 기본 은유였던 상하 구별로 사회를 비롯하여 대우주와 여러 형태의 소우주에도 이중의 불균형이 야기되었다. 즉 상에서는 좌가, 하에서는 우가 우위를 접하게 되었다. 불주산不周山의 균열 신화는 이 같은 양상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이용된다. 또한 의사들은 여기서 의술의 기본원칙을 찾아내기도 했다. 서쪽으로 내려앉은 하늘은, 동쪽()에서만 충만하게 되었다. 동쪽은 하늘과 양기의 영향에 놓이고 서쪽은 음기의 영향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몸을 쓸 때도, 상반신에 위치한 눈과 귀에서는 좌측의 것을 사용했고, 인체는 동()으로는 양기가 왕성하나 음이 부족했다고 봤다. 이런 사례는 끝이 없다. 다시 한번 기억하자. 왜 이렇게 집요하리만큼 좌우의 위치를 집요하게 따졌는가? 답은 그것이 바로 우주의 안배였기 때문임을. 지금 나 자신이 행하는 일상의 사소해 보이는 몸짓이 모두 우주를 구성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것은 결코 관념적인 개념이 아니다. 맞고 틀림을 떠나 그 시대를 사는 이들이 공유하는 의식의 근저를 흐르는 사유체계라면, 그것은 그 자체로 효능성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우주와 세계를 안배하기 위한 시도

인간이 우주라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예컨대 하늘은 사계절이 있고 인간은 4지를 지니고, 하늘은 360일이 12(우주의 운행 주기)을 이루며 인간은 360개의 관절이 있다는 식이다. 또 오행이 있어 오장이 있다는 분류도 마찬가지다. 이런 분류체계는 무척 많으며 서로 조금씩 다르다. 상이한 분류들을 상관 짓는 것은 기술상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이 분류들의 병용이 마침내 가능하게 됨에 따라 중국인은 대우주와 소우주의 공통된 질서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인은 실재에 대한 일관적인 성찰을 시도할 때면, 언제나 고대의 신화적 분류들을 끌어온다. 학술적 사유든 기술적 사유든, 중국사유는 신화에서 탈피하기보다는 오히려 사유의 표상적 제재와 방법을 빌려오고 있다. 학자의 역할은 여러 신화들에서 하나의 정설을 추출하는데 있었다. 앎은 유사성에 따른 상관관계의 목록을 증대시키면서 집대성 되었다. 이렇게 보면, 상이한 분류체계는 혼란이 아니라 오히려 인식의 확장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새로운 표상이 생겨도, 그것은 유사성의 원칙(오행)에 의해 곧 포섭되고 만다. 그 일을 한 자들이 학자였던 것이다. 조응관계와 상호관계의 대전제는 자연과 인간, 육체와 정신을 맺어주는 연대성이었다. 그러나 이 조응관계는 시각 차이로 완벽한 목록으로는 제시될 수 없었다. 즉 하늘의 기호를 인간의 활동으로 치환하려는 시도는 학자들 간의 견해차로 각 문헌에 나타난 상이한 오행 도표로 증명된다.

어쨌든 인간의 몸짓과 감정은 오행과 오장을 통해 우주의 현상, 하늘의 기호에 결부된다. <홍범>이 따르는 순서는 5음音의 생성순서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러니 5음과 오행과 오덕의 상관관계는 고대에서 유래되었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시 말해 <월령>이 입증하듯, 중국인은 의례절차상 제물을 바칠 때, 한 특정 음을 표상으로 하는 각 계절에 따라 오장五臟 가운데 하나에 중요성을 부여했다. 각음角音은 간장肝臟을 울려 사람을 완벽한 인仁에 맺어준다. 사마천의 이 문구만큼이나 육체와 정신을 우주의 율동에 따라 하나로 이어주는 표상적 상관작용과 깊은 연대성을 잘 나타내는 것은 없을 것이다. <중국사유>에 제시된 반고의 <백호통>이나 <관자>, <예운>, <황제내경> 등은 모두 나름의 대우주와 소우주의 조응관계에 대한 상당량의 기술記述을 선보인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육체적 차원과 정신적 차원의 모든 것을 총망라하기 위해서 중국인은 갖은 방식을 모색해야 했음을 뜻한다. 즉 그들로서는 제반 분류방식들을 서로 연관 지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계에서든 자연계에서든 질서와 생명은 때로는 땅에 때로는 하늘에 부합하는 수數에 의한 분류방식들을 병용하는 데서 비롯함을 보여주어야 했다.

이제 남은 것은 복잡하고 다양한 분류체계를 효과적으로 조합하고 병용하여, 그 관계의 타당성을 부여하는 작업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 몫은 학자의 것이다. 또한 시인이기도 하고 철학자이기도 하다. 예컨대 눈물은 눈에서 흐르며, 사람은 눈이 있기에 명석하다. 눈은 간장의 구멍이며, 간장은 초록색으로 봄과 목과 바람에 상응한다. 바람은 어둑한 구름을 쓸어 빗방울을 영롱하게 한다. 이는 시인들의 말이다.라고 그라네는 언급한다. 이렇게 보면 시인과 학자는 아주 다른 개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시인의 저 언표는 하늘의 기호를 인간, 육체와 정신을 맺어주는 조응관계의 성격을 띠고 있다. 대우주 편에서 보았듯이 전사들은 세계의 변방을 정복했으며, 시인과 지관들은 그곳으로 탐험을 터났다. 시인들이 정복된 변경으로 파견된 까닭은, 바로 우주의 분류체계와 조응체계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그곳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래야 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우주와 세계는 분할되고, 공간은 비로소 바르게 놓이기 때문이다. 그때 변경은 더 이상 변경이 아닌, 군주가 다스리는 영지인 속하게 되는 것이다.

 

앎은 하나로 꿰어진다 (一以貫之)

생리학과 심리학은 하늘과 땅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 인간을 아는 것은 세계를 아는 것이요, 우주의 구조를 자신의 생명처럼 아는 것이다. 앎은 하나인 까닭에 애써 특수한 학문을 형성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지관으로서 산맥에 정통 하다는 것은 산맥이 땅의 뼈대임을 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뼈대가 인체에 그러하듯이, 산맥이 세계에 견고성과 안정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또 생리학자가 피의 순환상태를 이내 간파해내는 것은 체기體氣의 통로인 혈관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있는 그로서는 단 한 가지 사실, 즉 우주는 강물을 실어 나르는 강줄기들로 사방으로 통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머리카락과 나무, 수풀과 깃털은 동일한 차원에 속한다. 정치가들이나 청명한 하늘을 부르는 도술가들은 이를 익히 알고 있어서 여러 방도를 강구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산의 수풀을 깎거나 수장이 자신의 몸에 난 털을 깎으면 빗물, 즉 능산적인 기운은 흘러내리기를 멈춘다. 여기서 생리학은 의술, 심리학은 역학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소우주라는 세계체계는 모든 기호가 서로 연결되고 조응하는 관계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대우주의 수많은 기호와 다양한 소우주의 분류체계에 통달하여,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조합하고 병용할 수 있는 자는 현자賢者와 명의名醫로 불릴 만했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의 사유 세계체제 내에서는 완벽한 법칙으로 자신의 논리를 설파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우주의 인식론은 (탁월한 혹은 궤변에 능한)학자, 역사가, 의사들의 고민을 해결해준다. 어떻게?

사가들과 심리학자들 또한 고심할 필요가 없었으니! 고도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의 가계나 공자의 가계가 어떠한지, 또 공자의 정신적 특징이 무엇인지를 제시해야 하는 경우에도 그들은 조기에 그것을 파악해낼 수 있었다. 공자는 물의 힘으로 군림하던 은나라의 후손이었다. 그래서 공자의 머리는 정상의 물구덩이처럼 움푹 파였다. 또한 물은 신장과 검은색과 상응한다. 공자의 안색은 매우 까무잡잡했으며(이는 깊이의 암시이기도 하다) 지혜가 신장에 상응하니 공자의 정신은 지혜를 특징으로 했다고 해석한다.

철학자들과 의사들 또한 고심할 필요가 더욱 없었으니! 신화적 분류방식이라는 이 경이로운 영역은 철학과 의술의 소관이었는데, 논지의 펼침을 직업으로 하는 그들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제재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이 영역은 진단이나 판단소재, 치료비법이나 정신적 지침들을 무한정하게 제공한다. 또 이 영역은 대우주와 소우주에 관한 논쟁의 여지를 마련해주는가 하면, 그들이 안락하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모든 묘책이나, 아니면 적어도 세상사의 흐름이 그러하니 만사형통을 절로 받아들이게 하는 방도를 찾아낼 수도 있게 한다.

앞서 중국인들은 신화에서 사유의 표상적 제재와 방법을 빌려온다고 했다. 신화는 해석하기에 따라 다양한 이론을 내놓을 수 있다. 다만 그것이 다른 여러 분류목록들과의 조응관계를 타당하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만 남을 뿐이다. 그것을 가능했던 자들은 현자와 명의로 추앙 받았다. 결론적으로 중국인들은 끊임없이 정치政治와 기술技術로 그들의 사회형태를 관장하는 제반 규칙을 세계에 적용해 세계의 안배를 도모하려 했다. 이것이 바로 종합적 앎이자 유일한 규칙이었다. 이 앎과 규칙이 인간의 모든 행위를 지시하며 사물의 모든 동향을 알려준다. 예법의 준칙을 위배하는 존재는 불응과 무질서를 책동한다. 예법은 유일한 법이다. 우주의 질서는 이 예법에 힘입어 구현되었다. 다음 장부터는 그 우주의 질서, 예법을 배울 것이다. 예법이 우주宇宙를 구성하는 법칙임을 느낀다면, 그저 따분한 허례허식으로 보던 시선이 좀 바뀌지 않을까? 어찌 보면 우리가 우주를 스스로 구성하는 존재라는 말은 그저 수사가 아니다. 그것은 그러한 사유체계 혹은 세계체제 하에선 진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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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루몽과 인류학을 만나다


계집애들 사이에서 소란을 피우며 지낼 뿐 강함이나 유약함의 구분도 없어서 어쩌다 우리를 보면 기분이 좋을 때는 위아래도 없이 함께 어지럽게 어울려 놀고,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우리가 제멋대로 해도 내버려둬요. 우리가 앉아 있거나 누워있거나 간에 상관도 안 하고, 도련님을 보고 본체만체해도 야단치지도 않아요. 그러니 아무도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지요. 누구든 각각 제멋대로 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걸요. (홍루몽 66 p172)


위의 인용은 녕국부의 하인인 흥아가 주인집 도련님 가보옥을 품평한 말이다.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데다 하는 일 없이 무척 바쁘고, 자매들과 어울려 수다 떨기를 즐길뿐더러 남의 잘못을 떠안기 좋아하는 이, 그가 보옥이다. 여자아이를 좋아하나 아랫도리의 음탕함과는 거리가 멀고, 권세를 믿고 남을 함부로 부리지도 않는다. 오로지 남자와 할멈을 병적으로 혐오하고, 출세해 부귀공명을 누리는 것을 어리석은 자들의 짓이라 여길 뿐이다. 좀처럼 잡히지 않는 독특함에서 그는 그저 하늘에서 뚝 덜어진 기이한 자로 느껴졌다. 홍루몽의 수수께끼는 보옥으로부터 출발하고 결국 그를 향한 질문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작자인 조설근이 말하고자 한 붉은 누각의 꿈은 무엇을 꿈꾸었던 것일까?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홍루몽을 처음 접한 것은 작년 여름, 그때 나는 일본의 인류학자인 나카자와 신이치의 <대칭성 인류학>을 함께 읽고 있었다. 아메리카 인디언 원주민의 신화를 텍스트 삼아, 원시부족사회를 공부했다. 그가 제시한 논술 중 눈에 띄었던 점은, 부족을 이끄는 추장에 대한 부분이었다. 추장은 우리가 알고 있는 권력자로서의 리더가 아니다. 그는 부족구성원에 대해 권력행사를 할 수 없다. 추장의 역할은 중재였다. 부족 성원간의 갈등을 슬기롭게 중재하는 것이 그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였다. 중재를 못하는 추장은 권위를 상실한다. 여기서 추장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한 쪽 손을 들어주는 판결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오직 말하기를 무기로 설득할 뿐, 결정을 내리는 자가 아니다. 동시에 서로 다른 텍스트를 읽어서 그랬는지, 추장과 보옥의 모습이 오버랩되기 시작했다. 권력 없는 추장과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대갓집 도련님, 부족 사이를 돌아다니며 중재하는 추장과 대관원 자매들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화를 풀어주려고 애쓰는 보옥이 말이다.


당시 그런 일단의 문제의식을 남겨둔 채로 시간이 흘렀다. 재차 홍루몽을 읽으며 이 문제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나카자와 신이치가 자신의 책에서 언급하며 칭찬한 프랑스의 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를 집어 들었다. 왜 굳이 인류학까지 끌어들여 가보옥을 해명하려고 했느냐 묻는다면, 보옥의 기이함은 지금의 인식론적 기반으로는 해명될 수 없거나 혹은 억지춘향으로 자의적 해석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보옥을 신화적 존재처럼 불가사의한 인물로 내버려둔다거나, 아니면 이분법적 성 정체성의 문제로 귀결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볼 때는 이 둘 모두 뭔가 부족하다. 새로운 인식론적 돋보기가 필요했으며, 클라스트르가 원주민을 분석하는 방식이 바로 내가 찾는 방법론이었다. 그것은 바로 근대적 시선, 즉 서구중심주의적 관점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아마존의 눈물>에 등장하는 부족사회를 접할 때 흔히 느끼는 감정은 현대문명에 비해 미개하다는 표상이다. 이 같은 인식은 문명이 일직선으로 발전한다는 서구중심주의적 시선에서 비롯한다. 클라스트르는 원시부족사회와 근대문명은 역사적으로 이어져 있지 않은, 불연속의 지층에 속해 있다고 가정한다. 부족사회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근대화가 이뤄진다는 역사의 진보는 허구라는 말이다. 양자 사이의 가장 주목할만한 차이점은 앞서 언급한 추장의 권력 문제였다. 원시부족사회는 기이하리만치 권력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그 대척점에 있는 것이 권력을 한 점으로 수렴하여 형성된 오늘날의 국가였다. 가보옥의 추장으로서의 행적을 추적하면, 아마도 조설근이 의도했던 발칙한 꿈의 정체를 해명할 수 있으리라.


 

가보옥, 원시부족의 추장


가보옥은 가부 녕국부의 적손嫡孫으로 요즘으로 치면 명문재벌 4세쯤 된다. 보옥의 출신성분에 비해 그가 시녀, 하인들을 대하는 태도는 극진하기 그지없다. 어린 시녀에게 핀잔 받고도 화내지 않음(35 p358)은 물론이고 어려서부터 남에게 마음을 푹 쏟아 붓는 병적인 성품을 갖고(29 p236) 있으며 남들이 자신을 무서워하는 것을 싫어(20 p447)했다. 그의 관심사는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지내는 것이었다. 권력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그 권력을 남들 사이를 조화롭게 화해시키는데 집중하며 결코 강제로 자신의 뜻을 관철하지 않는다. 우리가 권력자, 권력이라고 하면 연상되는 것은 힘의 강제와 그것에 복종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근대적 시선에서 가보옥의 지위는 마치 권력이 부재한 혹은 권력이라 부를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쉽다. 원시부족사회의 추장에게 부여된 이러한 무력無力한 권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클라스트르는 R.Lowie의 연구를 근거로 추장의 권력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추장은 평화의 중재자이다. (중간에서 어떻게든 화해를 시켜 주려던 것이었는데 화해도 못시키고 오해만 일으키니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홍루몽 22 p56-7)

(2)    추장은 자기의 재화에 대해 집착해서는 안 된다. (하는 일이란 오로지 여러 시녀들을 위해 애를 쓰며 하인 같은 노릇을 하는 것뿐이었다. 홍루몽 36 p366)

(3)    말을 잘하는 자만이 추장의 지위를 얻을 수 있다. (보옥의 언변은 두말할 것 없다)


원시부족사회에서 추장이 우리가 생각하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때는 오직 전시戰時뿐이다. 전쟁이 끝나면, 추장은 다시 원래의 무력한 권력자로 중재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가끔씩 자신의 욕망을 위해 전쟁을 원하는 추장이 등장했다. 그들은 자신이 명령을 내리고 부족을 통솔하는 일단의 권력관계에 매료된 자들로써, 그것을 영속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야 했다. 전쟁만이 그런 욕망을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로니모 같은 인디언 추장이 그랬다. 그들의 욕망은 부족 전체의 철저한 외면을 받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원시부족사회는 강력한 리더십을 행사하는 추장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국가의 탄생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왜 국가의 출현을 거부했는가? 원시부족사회는 너와 내가 위계적으로 놓이지 않는다는 인식하에서 작동한다. 국가의 출현은 권력을 지닌 권력자와 그에 복종하는 피지배자로 나뉨으로써, 필연적으로 인간의 정치적 소외가 발생한다. 원시사회의 추장제는 그러한 소외를 막기 위한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홍루몽의 녕·영국부는 가부라 총칭되는 동시에, 그 사이에는 대관원이 존재한다. 가부와 대관원의 작동방식은 몹시 다르다. 가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주로 왕희봉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희봉이 진가경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사람들을 부리는 장면은, 군주의 권력행사와 유사하다. 또한 살림살이를 관장하며 선물을 주고 받거나 각종 대소사를 치르는 일은, 모두 가부를 무대로 묘사되며 일종의 소小왕국의 모습이라 해도 무방하다. 반면 대관원에서는 권력이나 경제문제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시선이 가부에서 대관원으로 옮겨지는 순간, 전혀 다른 시공간이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가보옥을 중심으로 시를 읊고 환담을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먹고 마시며 논다. 희봉이나 가모 조차도 연회를 베풀면, 가부가 아닌 대관원으로 들어와서 즐긴다. 이러한 교묘한 공간구성의 배치는 조설근이 치밀하게 의도한 바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가부의 실질적인 영도자는 왕희봉이며, 대관원의 중심은 가보옥이다. 똑 같은 리더라고는 하지만, 그 층위는 현저히 다르다. 마치 국가의 강력한 권력을 지닌 영도자와 원시부족사회의 무력한 추장처럼 말이다. 양자는 권력을 지녔으나, 그 권력이 사용되는 방향은 대조적이다. 그런데 가부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대개 치정(가련, 가사, 가진의 호색)과 탐욕(조이랑의 질투와 저주, 할멈들의 원한 등)에 집중되어 있다면, 대관원의 장면은 인간의 감수성에 대한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예컨대 대옥이와 보옥이가 한숨 지으며 인생무상을 노래하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 소외의 문제


국가와 원시부족사회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인간 소외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국가는 정치적으로는 위계를 형성하고, 위계에 따른 역할을 부여한다. 여자다움, 아이다움, 남자다움 같은 표상은 국가가 가족을 매개로 수립되며 다져진 개념이다. 원시부족사회가 반대하는 지점이 여기로 보인다. 홍루몽 세미나에서 줄곧 제기되었던 자기다움의 문제. 그것은 생래적으로 부여된 자기다움이 아니라, 위계에 얽매여 발현되지 못하는 인간의 가능성의 문제인 것이다. 위계는 사람의 성정을 틀에 가둔다. 원시부족사회는 추장의 권력화를 경계함으로써, 끊임없이 추장을 무력화했다. 그럼으로써 부족성원이 저마다의 성정을 발현하기를 바란 것이 아닐까? 이 부분은 다소 짐작이지만, 그러한 주장을 증명할만한 흔적이 있다.


원시사회는 먹고 살기 어려웠을 거라는 시선이 있다. 이른바 생계경제라는 시선은 서구적 관점에서 비롯한, 원시사회가 미개사회이기에 생존에 어려움을 겪었을 거라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클라스트르의 연구에 의하면, 원시부족은 생존하고도 남을 만큼의 생산자원이 있었다. 그들이 우리와 다른 점은, 저장하여 축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잉여생산에 대한 집착이 없었다. 어쩌다 더 많이 생산했을 때는 그것을 모조리 소모해버렸다. 자본주의 사회가 사유재산의 욕망, 내 것을 더 많이 확보하려는 모습과는 다른 지점이다. 내 것, 네 것이라는 인식이 들어서면, 가진 자와 덜 가진 자의 차이가 생기고 그에 따른 소외가 발생한다. 이는 앞서 말한 정치적 소외에 비견되는, 경제적 소외라 할 수 있다. 원시부족사회가 인간의 소외를 경계하는 식으로 작동했기에, 그들은 더 많이 생산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럼 남는 시간에 그들은 뭐했냐고? 놀았다!


서구사회가 보는 인종적 편견 가운데, 멍청한 흑인과 게으른 인디언이라는 시선이 있다.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선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렇기에 근대의 관점으로는 이처럼 일하지 않는 모습이 게으른 것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근대적 인식의 한계이다. 원시부족은 게으른 게 아니고, 그 시간을 즐겼다. 대관원의 자매들이 시사를 만들고 노는 것처럼 말이다. 얼핏 보기에 대관원의 인물들은 부귀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량처럼 즐길 수 있는 게 아니냐 반문할지 모르겠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오히려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선 더 열심히 일하고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명제가 과연 절대적인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 있지 않을까? 가부의 왕희봉만 보더라도, 그렇게 잘사는 대갓집도 살림걱정을 한다. 우리는 얼마나 더 축적하고 벌어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마 그 답은 끝이 없다 일 것이다. 가부 혹은 국가의 배치 하에 있는 한, 무한 축적과 소비의 반복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리라. 그 끝은 탐욕과 치정에 의한 파멸일지도. 원시부족사회와 대관원은 그에 대한 인식의 출구로 작동할 수 있지 않을까?

 


무사망이 곧 혼세마왕


문득 가보옥의 별명이 떠올랐다. 무사망. 할 일 없이 바쁜 도련님을 비꼰 별명이다. 또 하나, 혼세마왕.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대마왕. 모든 이가 자본의 축적을 향해 달려가던 것을 멈추는 상상을 해본다. 사람들은 더 이상 열심히 바쁘게 돈을 벌려고 하는 대신에, 자신의 분수에 맞게(이 부분이 애매하긴 하다) 생활하며 소외되지 않는 삶을 추구한다. 그 순간 국가는 어떻게 될까? 국가 권력은 사람들에게 작동할 수 있을까? 무사망이 곧 혼세마왕이다. 이 말은 자기다움을 찾기 위해 노는 식으로 삶을 구성하면, 그것이 바로 국가를 무너뜨린다는 암시가 아닐까? 국가 권력자가 보기엔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무사망들.. 나는 그들이 자본주의 경쟁구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일군의 백수들이라고 생각한다. 조설근이 꾼 발칙한 꿈은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가부라는 국가 안에서 만들어진 대관원이라는 소규모 공동체에서 그런 시도는 시작되었다. 앞에서 자신의 분수에 맞는 게 무엇인지 조금 애매하다고 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도덕경에 제시된 소국과민小國寡民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으리라. 일단 사람이 너무 많이 모이면, 자연스레 위계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체계가 생기고 제도가 생기고 마침내 국가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러니 대관원에서 훈련된 인물들은 때가 되면 모두 대관원 바깥으로 나와 자신만의 대관원을 곳곳에 만들어야 할 것이다. 대관원이 팽창하면 그 끝은 결국 가부가 될 것이기 때문에.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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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장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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